247화
"......제발 농담이라고 해 주세 요."
잠시 인간의 언어를 잃었던 나 는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속삭 였다.
농담이었다면 이 급한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나 싶어 화가 났겠지 만, 차라리 그게 나았다.
진담이라면 절망뿐 이었으니까.
"저도 농담이었으면 좋겠어요."
머리를 부여잡은 율리안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자신도 고통스러 운지 은빛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 리고 있었다.
밀어붙인다고 나오는 게 아니라 는 걸 직감한 나는 침착하게 숨을 고르고 그를 달랬다.
"기억나는 건 있습니까?"
"그......! 전능하신 라이시여, 권
능의 몽둥이를 드사......? 지금 이 곳에서 당신을 보이소서까지는 기 억나는데......!"
"권능의 팔이겠지! 그건 성서에 도 적힌 구절 아닌가! 당신 대신 관 맞나?"
"아! 맞다!"
떨어지는 독침을 베어 낸 세레 논이 답답한 듯 소리쳤다. 율리안 이 해맑게 탄성을 뱉었다. 그의 신뢰도가 반절 깎이는 순간이었 다.
"시간을 드리면 기억해 낼 수
있겠습니까?"
나는 율리안의 어깨를 꽉 붙잡 았다. 못 미덥긴 하지만 그는 이 사태를 해결할 핵심 열쇠였다. 율 리안이 앓는 소리를 내며 제 머리 를 마구 헤집었다.
"젠장, 이래서 오기 싫었다고요. 지휘관님 손난로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원망 섞인 투정엔 정의로움이라 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10분만 주세요. 어떻게든 기억 해 낼 테니Z7E 안 되면 기도라도 해 보지, 뭐."
율리안이 제멋대로인 데다 여러 바퀴 돌아 버린 인간이긴 해도 이 런 상황에서 책임을 회피할 인간 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 다. 그것이 살고자 하는 이기심일 뿐이라고 해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카시아를 돌아보았다.
"카시아 경!"
"네, 지휘관님."
"마수들을 조종하는 주술사가 반드시 이 주위에 있을 겁니다. 은밀히 찾아내서 내게 보고합니 다. 할 수 있습니까?"
"명을 따릅니다."
카시아가 각 잡힌 자세로 허리 를 굽혀 인사하고 설원을 가로질 러 뛰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조나 단을 돌아보았다.
"조나단 에이머리 경. 무슨 일이 있어도 율리안 대신관을 지켜라.
경의 몸이라고 생각하도록."
"......분부를 따릅니다."
눈을 느리게 깜빡인 조나단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조금 길게 그를 바라보다 검날을 한 번 털었 다. 나뭇가지에 불이 붙듯 칼날에 검은 오러가 타올랐다.
"저하는 저와 가죠."
"네, 스승님."
세레논의 검 위로 달빛 오러가 찬란하게 번쩍였다. 아직 완성된 건 아니었으나, 처음 보았을 때보
다 한층 더 안정된 상태였다. 나 는 서서히 쏟아지기 시작하는 키 피라를 지켜보다 주위를 둘러보았 다.
"허억! 케일리, 케일리!"
"사, 살려 주세요! 제발! 잘못했 어요."
코와 입을 엉성하게 가리는 정 도로는 환각을 일으키는 붉은 가 루를 막을 수 없었다. 이미 많은 병사들이 환각에 빠져 허우적거리 고 있었다.
'사람의, 숨통을, 끊을 땐...... 절대 그의 눈을 피해선 안 된다.'
나는 옅게 일렁이는 시야와 함 께 저절로 머릿속에서 울리기 시 작하는 그리운 이의 목소리에 눈 을 질끈 감았다.
내가 이래서 키피라를 상대하는 걸 싫어하는 걸 싫어했다. 몸을 찢으러 달려드는 마수들은 그저 베어 내면 그만이었지만.......
'나를, 죽여라, 슈슈.'
키피라의 붉은 가루는 가장 끔 찍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코와 입을 꽉 틀어막으세요, 저 하."
나는 코와 입을 막은 푸른 천을 더욱 강하게 눌러 덮으며 세레논 을 돌아보았다.
그 또한 환각 증세가 시작됐는 지 새하얀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흐 르고 있었다. 면역이 있는 나도 슬슬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니 그럴 만했다.
" 괜찮습니까?"
정신적 타격이 큰지, 그의 오러 가 벌써 흔들리기 시작하는 게 느 껴졌다. 내 물음에 크게 심호흡을 한 세레논이 환하게 웃었다.
"네. 멀쩡합니다."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탁, 탁!
나는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마나를 모아 허공을 디디는 발판 으로 삼으며 매서운 기세로 하강 하는 키피라들을 향해 달려갔다. 세레논이 나를 따라왔다.
"어떤 환각이 보이십니까?"
"••••••네? 그게••••••
내 질문에 멈칫한 세레논이 허 공에서 삐끗했다. 나는 그를 빠르 게 붙잡아 주며 그가 곤란하해하 고 있음을 짐작했다. 아무래도 알 려 주기 어려운 기억인 모양이었 다.
나는 여상스레 입술을 열었다.
"저는 제 스승님이 죽어 가는 장면을 봅니다."
'네가 앗아 가는 생명의 무게를 반드시 짊어져야 해......
카라쇼를 죽인 후로 키피라의 붉은 가루가 보여 주는 환각의 종 류는 늘 동일했다.
내 대답에 세레논이 등잔만 해 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변함없는 낯으로 허공을 밟으며
달리는 것에 집중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할 때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고 아직도 완전히 극복하진 못했지만 더는 마주하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종기 난 나비처럼 생긴 키피라 들이 우리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그들의 이빨엔 정신 착란을 일으 키는 독이 흘러내렸다.
'네 생명은 내가 살린 것이니 살 아라.'
"저는 그때의 저보다 훨씬 강하 니까요."
나는 더 이상, 악몽이 떠오르면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는 어린애 가 아니었다.
쉬이익!
몸을 크게 젖혔다 훅 당기며 그 반동을 이용해 검을 크게 휘둘렀 다. 검은 오러는 파도치듯 거대한 크기로 날아갔다.
키에에엑!
몸이 잘린 키피라들이 찢어질 듯 울부짖으며 추락했다. 지상의 병사들을 노리던 키피라들이 목표 물을 변경한 듯 우리에게로 날아 왔다.
사르륵.
날갯짓이 우리를 향하며 주위에 산란하는 붉은 가루의 양은 급속 도로 많아졌다. 입이 텁텁할 정도 로 가루를 흡입했고, 환각은 점점 더 짙어졌다.
설원에 흐르는 붉은 피. 내가 도 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흉측한 이 빨과 내 검에 찔려 피를 토해내던 카라쇼. 처음으로 발현했던 검은 오러. 그날의 악몽이 다시 재생되 었다.
"힘들다면 억지로 버티지 않아 도 괜찮습니다. 내려가 계세요."
서걱!
나는 세레논을 물어뜯으려 달려 드는 키파라 하나를 베었다. 세레 논은 이제 손까지 식은땀으로 축
축이 젖어 검을 자꾸만 고쳐 잡고 있었다.
"......제겐, 어머니가 보입니다."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나 는 아무런 대꾸 없이 몰려드는 키 피라를 베고 또 베어 냈다. 검날 위로 붉은 가루가 자욱하게 덮일 만큼.
"키프로스 백작가가 황태자가 되지 못했던 저를 쓸모없다 비난 할 때 유일하게 절 감싸 주셨던 어머니가요. 반드시 네게 권력을
쥐여 주겠다고 속삭이며, 다른 이 들의 욕을 듣는 어머니를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무력함이 떠오릅니다."
어른들의 욕심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상처 입어야 하는 걸까.
나는 키프로스 백작의 역겨운 낯짝을 떠올리며 한숨을 참았다.
"하지만, 맞습니다."
촤아악!
터져 나온 은빛 오러가 허공에 자욱한 붉은 가루들을 정화시킬 듯 신비롭게 치솟았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성숙한 빛줄기. 하지만 완성되지 않았을 때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스승님 말처럼 저는 더 이상 그때처럼 약하지 않아요."
초점이 흐려진 눈을 하고서도 앞을 보려는 의지. 세레논은 내게 자랑과도 같은 제자였다.
"제가 오른쪽을 맡겠습니다. 왼 쪽을 부탁드립니다!"
"네!"
나는 시원스럽게 웃으며 허공을 휘젓기 시작했다.
길게 날아가는 오러의 궤도를 따라 나비 날개들이 움직임을 멈 추고 검은 피들이 솟구쳤다. 허공 에서 붉은 악몽들이 터져 나갔다.
"조준, 발사!"
콸콸콸.
내 지시에 마법사들이 또다시 일제히 물 마법을 사용해 키피라 들을 격추시켰다. 키피라들이 만 들어 내는 단내에 코끝이 아릿해 졌다.
키피라들은 원거리에선 꽤 위협 적인 적이었으나, 근거리로 달라 붙으면 나비를 잡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슈슈. 내 사랑하는 제자.'
두 가지 문제는 키피라의 숫자
가 토할 만큼 많다는 것과 머릿속 에 울리는 목소리 때문에 그리움 이 증폭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옛 추억에 빠져 한숨처럼 웃었다.
'스승님. 이제 그만 쉬세요.'
콰앙!
검은 오러가 나무를 석둑 잘랐 다. 아래에서 경악스러움 섞인 시 선들이 느껴졌으나, 피해자는 없 었으니 굳이 살피지 않았다.
'당신의 의지는 제가 이을게요.
쉬실 때가 되셨잖아요.'
이어지는 환각들은 더는 내게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지휘관니이임!"
온몸에 가루를 뒤집어쓸 만큼 키피라들을 베고 있을 때, 아래에 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는 빠르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주문이요! 주문! 기억났어요!"
그곳엔 화색을 띤 율리안이 손
을 휘휘 흔들고 있었다. 머리를 쥐어뜯은 건지 은빛 머리칼 사이 로 없던 땜빵들이 설핏 보였다.
"저 인간이 드디어 밥값을 하는 군요."
세레논이 헛웃음을 뱉었다. 시니 컬한 말투와 다르게 얼굴엔 다행 이라는 기색이 가득했다.
쉬이익!
나는 내 걸음을 지탱하던 마나 의 발판을 바로 사그라트리고 추
락하듯 떨어졌다.
쾅
착지하느라 땅이 가볍게 울렸지 만 나는 개의치 않은 채로 율리안 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습니 까?"
"후, 잠시만요. 처음으로 사용해 보는 거라 떨리는데."
율리안은 긴장한 듯 가볍게 제 두 손을 맞비비더니, 두 팔을 벌
려 허공을 짚었다.
치지직.
그의 하얀 손끝에서 신성한 기 운을 풍기는 은색 스파크가 터져 나왔다.
"잠깐, 지휘관님! 조심하세요!"
콰직!
그리고 세레논의 다급한 외침을 시작으로, 키피라들이 율리안을 향해 무자비하게 몰려오기 시작했
다. 나는 율리안을 향해 날아온 독침을 베어 냈다.
'신성력을 느꼈나? 그러면 이리 로 올 게 아니라 도망가야 할 텐 데. ......주술사가 조종한 모양이 군.'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방해하려 는 것 같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검을 세웠다.
"당신은 제가 지킵니다. 빨리 발 동하세요!"
내 소리침에 눈을 끔뻑인 율리 안이 굳게 고개를 끄덕이곤 눈을 질끈 감았다. 집중하듯 미간을 좁 혔을까.
화아악!
그의 몸에서 은색 빛이 터져 나 왔다.
"전능하신 라이시여. 권능의 팔 을 드사, 지금 이곳에서 당신을 보이소서."
온몸의 감각을 붕 뜨게 할 만큼 의 신성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 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구름 위를 날아다니듯 묘한 느낌이 일 었다. 엘과 함께 있으며 방대한 신성력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건 만, 전력으로 발동했을 때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리이까. 당신의 처소가 그곳에 있는데. 당 신께서 하늘 아래 인간들을 보살 피시니 우리가, 사......망의 골짜 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중간에 아슬아슬하게 머뭇거리 긴 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넘겼다. 나는 오러를 폭발적으로 난사했 다. 키피라들의 날개가 찢겨 나갔 다.
주르륵.
단시간에 급하게 마나를 끌어올 리고 붉은 가루를 과다 복용한 부 작용으로 코피가 주르륵 흘렀다. 나는 뜨거운 액체를 손등으로 대 충 닦아 냈다.
"당신의 충실한 종이 땅에 발을
딛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당신의 자비를 기다립니다."
번쩍.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율리안이 눈을 퍼뜩 떴다.
눈이 흰자와 동공의 구분 없이 연하늘색 빛을 뿜어내고, 붉은 피 가 눈꼬리를 타고 느리게 흘러 떨 어졌다. 어마어마한 신성력을 끌 어내는 부작용인 것 같았다.
파앗!
율리안이 한쪽 무릎을 굽혀 몸 을 숙이고 손바닥으로 설원을 짚 자, 그가 짚은 곳을 기준으로 빛 의 기둥이 하늘로 치솟아 올라갔 다. 땅과 하늘을 잇는 은빛 줄기 는 신성하고도 경이로웠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잠시 검을 멈추고 감탄했다.
평소 워낙 돌아 있어서 잊고 살 았는데, 율리안은 거대한 제국 내 에서도 극소수밖에 되지 않는 대 신관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신성
력이 그저 그런 수준일 리 없었 다.
"나, 태양 앞에 간원하오니
힘에 부치는 듯 허억, 숨을 들이 켠 율리안이 날카로운 눈으로 하 늘을 바라보았다.
"지금,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 를 내리소서."
홀리 레인.
그가 작게 속삭였다.
쾅
새파란 낙뢰가 하늘을 찢었다. 하늘이 한 차례 진동했다. 구름이 순식간에 은빛으로 물들고, 빛기 둥이 더욱 강하게 번쩍거렸다. 그 순간 모두 넋을 놓고 하늘을 올려 다보았다. 오랜 가뭄에 간절히 비 를 바라는 이들처럼.
마치 신이라도 강림할 듯 신비 롭던 순간.
쏴아아아.
하늘에서 세상을 떠나보낼 듯 거센 장대비가 떨어지기 시작했 다.
키에에엑!
내게 달려들던 키피라들이 은빛 빗줄기에 닿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혼적도 남기지 않고 치지직 타들 어갔다. 성수는 모든 악한 것을 정화하는 불꽃이었다.
나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줄기
를 향해 손을 뻗어 보았다. 손을 뒤덮고 있던 붉은 가루가 깨끗이 씻겨 나갔다.
살갗에 닿는 물은 차갑지 않았 다. 한없이 따뜻하고 포근했다.
성수로 세례를 받은 것 같은 기 분이었다.
"하하, 쿨럭! 제가, 할 수 있다 고 했죠? 커헉!"
거친 기침 소리에 고개를 돌리 자, 율리안이 낄낄거리며 입가에
묻은 피를 닦고 있었다. 그의 얼 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젠장, 율리안!"
상황이 급박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하늘에서 성수를 내리 게 할 정도의 권능이라면 몸에 큰 부담을 줄 게 분명했다.
나는 다급하게 달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는 율리안의 몸 을 받았다.
"지휘관 님."
"말하지 마세요! 미치겠네, 기운 이 엉망이잖아! 치유 마법사! 수 습 신관! 당장......!"
턱.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 내 팔 을 붙잡았다. 원래의 연보랏빛으 로 되돌아온 눈동자가 날 향해 휘 어졌다.
"저, 쓸모 있죠?"
갈라진 목소리가 애교스럽게 물 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저......
"젠장, 당신!"
"아리아 공녀한테 잘 좀 말해 주세요......
툭. 내 팔을 붙잡았던 손이 힘없 이 떨어지고, 눈이 스르륵 감겼 다.
그의 상태를 빠르게 살펴본 나 는 율리안을 지탱한 채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자는 거면서...... 유언처
럼 말하지 말라고......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가 퍼져 나갔다.
율리안은 대단히 멀쩡하게 잠들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