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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48화 (248/254)

248화

"상태는 어떻지?"

"자잘한 상처는 모두 치료했습 니다. 기운도 조금 전부터 안정되 셨지만 신성력을 너무 많이 사용 하셔서 깨어나는 데엔 조금 시간 이 걸릴 것 같습니다."

수습 신관에게 율리안의 상태를 들은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성 수가 채 마르지 않은 그의 머리칼 을 쓸어 넘겨 주었다.

병사들을 수습하고 빠르게 위치 를 옮겨 막사를 친 뒤에야 여유가 생겨 그가 휴식 중인 막사를 찾을 수 있었다.

주술사는 찾지 못했다. 아쉽지만 애초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고, 사망자 없이 끝난 것만으로 만족 스러웠다.

'죄송합니다. 이에 대한 벌은 기 꺼이 받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나도 전투 중에 틈 틈이 살폈는데 안 보인 걸 보아

단단히 숨은 것 같더군요.'

'할복할까요? 아니면 일주일 연 속 보초 서기라도.'

'당신 지금 내 말 안 듣고 있 죠? 괜찮다고.'

나는 미친 사람처럼 벌을 달라 매달리던 카시아를 떠올리며 고개 를 저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지 나치게 엄했다.

'저하, 팔이......!'

'아, 독침 한 개가 꽂힌 걸 뒤늦 게 확인했습니다. 깊게 찔리지 않 아 이상 없으니 염려치 마세요.

치료사를 찾으니 과잉 진료를 해 주더군요.'

그녀를 겨우 진정시킨 다음엔 세레논이 문제였다.

그의 팔에 꽁꽁 묶여 있는 붕대 를 보고 경악하니, 그가 머쓱하게 웃었다.

세레논은 통솔을 돕겠다고 나섰 으나, 낯빛이 좋지 않은 것이 아 무리 봐도 과잉 진료는 아닌 것 같아 쉬라고 막사에 억지로 구겨 넣고 율리안에게 온 참이었다.

"언제쯤 깨어나겠나?"

나는 걱정스럽게 율리안을 내려 다보았다.

그가 깨어난 뒤 이동할지, 어차 피 도착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았 으니 깨든 못 깨든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할지 고민되었다.

"신성력이 회복될 때까지는 시 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신성력은 마나처럼 일정량 이상

을 사용하면 한동안 회복 기간을 가져야만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충 전식 힘이었다.

수습 신관이 차트를 살폈다.

"제 예상으론 적어도 사흘 은 "

"엣취! 푸엣휴!"

커다란 재채기 소리가 막사 안 을 울렸다.

나와 수습 신관은 동시에 침대 를 내려다보았다.

"크응...... 추워...... 지휘관 님...... 솜이불 없어요?"

적어도 사흘 뒤에 일어난다던 율리안은 쓰러진 지 5시간도 되 지 않아 눈을 뜨고 줄줄 흐르는 콧물을 닦으며 솜이불 타령을 하 고 있었다.

나와 수습 신관은 다급하게 시 선을 교환했다.

"......사흘 걸린다며?"

"최소 사흘에서 최대 2주까지

예상했는데...... 어떻게......

수습 신관은 경악스럽다는 표정 을 띤 채로 율리안의 몸을 이곳저 곳 살펴보았다.

자다 깨서 정신이 없는지 율리 안은 '응? 으응?' 같은 졸음이 섞 인 신음을 내며 종이인형처럼 펄 럭거렸다.

"......신성력 회복 속도가 상상 을 초월합니다. 닳았던 신성력이 벌써 반쯤 회복되었습니다."

수습 신관이 감탄했다. 대신관은 회복 또한 빠른 모양이었다.

'그냥 단순해서 빨리 나은 거 아 닐까......?'

뾰족하게 사방으로 솟아 고슴도 치 같은 머리 스타일을 한 채 하 품을 하고 있는 율리안을 보자니 합리적인 의문이 들었다.

신성모독 범주에 들 수 있는 발 언이니 입 밖으로 뱉진 않았지만.

"몸은 괜찮습니까?"

어찌 됐든 잘된 일이니 기뻐하 기로 했다.

수습 신관을 물린 나는 율리안 옆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네...... 추운 것 빼고는 괜찮아 요."

으스스 몸을 떤 율리안이 자기 몸에 덮여 있던 모포를 잡아당기 더니 꾸물꾸물 몸에 둘렀다. 이불 에 파묻힌 모습이 애벌레 같았다.

"바로 이동해도 문제없으시겠습 니까?"

"그 빌어먹을 망아지만 안 타면 요."

타고 온 말이 정말 싫었던 건지 그는 지긋지긋해하며 얼굴을 구겼 다.

' 멀쩡하군.'

그의 태평한 태도를 보며 나는 설핏 웃음을 흘렸다. 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에 내가 과한 것을 요청했나 싶어 조마조마했건만 괜

한 걱정이었던 것 같았다.

그의 상태를 확인했으니 나머지 일을 처리하려 나서려던 찰나, 의 문이 하나 떠올랐다.

"그런데 아리아한테 잘 말해 달 라는 말은 왜 한 겁니까?"

"쿨럭."

율리안이 목이 막힌 듯 기침을 내뱉었다.

"어 그게

연보랏빛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 러갔다. 변명거리를 찾는 듯한 모 양새였다. 슬쩍 내 눈치를 본 그 가 횡설수설했다.

그의 양 귀 끝이 붉어져 있었다.

"아리아 공녀님은 멋진 분이잖 아요? 그냥 친하게 지내면 좋겠 다 싶기도 하고......

"설마 당신."

변명임이 분명한 주저리들을 뚝 끊은 나는 얼굴을 왈칵 찌푸렸다.

찬장 속 초콜릿을 훔치다 걸린 아이 같은 표정을 지은 율리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리아한테...... 약점 잡혔습니 까?"

나는 진심 어린 걱정을 담아 율 리안을 바라보았다.

아리아는 내게 천사 같은 아이 지만, 나는 오랜 경험 끝에 내 천 사가 다른 이들에게까지 천사 같 진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들였던 레이스들을 두 배 가 격으로 팔 거란 말이지. 으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고급 레이스는 귀족들의 사치품 이야. 돈 많은 사람들 금고 좀 터 는 게 어때서?'

'그렇긴 하다만......

'내가 레이스 사들일 때 멍청한 짓이라고 비웃던 인간들 다 기억 하고 있거든. 그 사람들한테는 세 배로 팔 거야.'

나는 소악마처럼 웃던 아리아를 기억했다. 아리아는 누구를 먼저 건드리는 법은 그다지 없었으나,

한 대 툭 얻어맞으면 상대를 녹다 운 시켜야 물러서는 아이였다.

'율리안이 깐족대다가 아리아의 미움을 사고 약점 잡혀서 구르고 있다? 일리 있지.'

내 머릿속에선 한 편의 드라마 가 재생되고 있었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날 마주하던 율리안이 삐걱삐걱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비슷 해요. 약점은

약점이지."

"괴롭히지 말라고 해 드려요?"

"아뇨...... 그럴 것까진 없고 그 냥 잘만 말해 주시면 될 것 같아 요• 엘 그 자식이 왜 늘 미쳐 있 는지 조금 알 것 같네요......

율리안이 먹먹한 표정을 지었다. 왜인지 모르게 욕을 얻어먹은 느 낌에 기분이 나빠졌으나, 우선 고 개를 끄덕였다.

"아리아에겐 잘 말해 드리겠습 니다. 살신성인해서 지원군을 지 켜 주셨다고요."

"좋네요. 향신료도 좀 쳐 주세 요. 율리안 대신관 등 뒤에서 후 광이 빛났다, 뭐 이런 거. 느낌 알죠?"

"그건 좀......

"쳇."

잠시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까, 막사 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 다.

"지휘관 님. 확인해 주셔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조나단의 목소리였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먼저 가 봐야겠습니다. 가기 전 까지 푹 쉬세요."

"아, 맞아."

가려는 나를 율리안이 잡았다. 할 말이 있냐는 표정으로 돌아보 니, 그가 방긋 웃었다.

"전장에서 지휘관님은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워요. 지켜 주셔서 감 사해요."

가볍지만 진솔한 감사 인사였다.

나는 피식 웃었다.

"계속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러 니 살아 계세요."

살아만 있다면, 누구든 지킬 수 있었다.

우리는 날이 밝는 대로 길을 나 섰다. 붉은 가루와 마비 독의 후 유증이 남은 병사들이 있긴 했으 나, 모두 성수로 씻은 덕에 이동 이 불가능한 사람은 없었다.

어깨가 하늘까지 솟아 유세를 부리는 율리안을 세레논이 한 대 치려 한 걸 빼면 무탈한 이동이었 다.

"마을이 보입니다."

내 옆에서 말을 몰던 조나단이 전방을 가리켰다. 그가 탄 검은 말이 히잉 울었다.

눈 쌓인 숲속에 위치한 작은 마 을. 화려하지 않으나 단란해 보였 다. 나는 숨을 길게 뱉었다. 새하

얀 입김이 하늘로 올라갔다.

우리의 목적지, 파블로프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을에 들어서자 병사들의 선두 에서 갑옷을 입은 남자가 우리를 반겼다. 북부의 침입이 일어난 이 후 아타라 각 국경 지역에 파견되 었다던 중앙군으로 보였다.

나는 휙 말 위에서 내려 그 앞 에 섰다.

"유니스 셜리입니다. 반갑습니 다."

"카슈미르 크리시스입니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붙잡아 혼 들다 문득 의아해졌다.

'검사가 아니네.'

굳은살이 박인 부분이 검사들과 는 달랐다.

조금 호기심이 동했을까, 남자가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그는 노 란색에 가까운 환한 주황색 머리

카락과 자애로운 낯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 다. 쉬셔야겠죠? 막사를 칠 위치 부터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다만 막 사는 병사들에게 맡기도록 하죠."

찰그락.

안장에 걸어 두었던 검집을 빼 내어 허리춤에 걸었다.

"북부와의 경계가 되는 강부터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곳으로 안 내해 주시기 바랍니다."

언제 북부군이 쳐들어올지 모르 는 시점에서 여유를 부릴 순 없었 다.

내 대답에 잠시 눈을 깜빡인 유 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크리시스 경 은 절 따라와 주세요."

나는 조나단에게 병사들의 통솔 을 맡기고 뒤를 돌아보았다.

"세레논 저흐}, 카시아 경, 율리 안 대신관. 따라오세요."

"에엑, 저도요?"

군말 없이 말에서 내리는 세레 논과 카시아에 비해 마도구를 이 용해 둥둥 떠서 오던 율리안은알이 싫다더니 선택한 운송수단이 바로 저거였다- 예상 못 했다는 듯 반문했다. 나는 씨익 웃었다.

"손난로가 떨어져서야 되겠습니 까? 빨리 오세요."

사실 이번 홀리 레인 사건으로 율리안이 마수를 상대하는 데 굉 장한 전력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수뇌부로 데리고 다니 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귀찮은 일은 질색이라며 모르쇠 잡을 그의 태도가 훤히 보 였기에 말을 돌렸다.

율리안은 귀찮다는 듯 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순순히 나를 따 라왔다.

"오는 길에 습격이 있다고 들었 습니다. 병력 피해는 없으셨습니

까?"

"네. 부상자만 몇 명 있는 정도 입니다."

"경의 수환이 대단한 모양이군 요."

"과찬이십니다. 운 좋게 잘 아는 마수를 만났을 뿐입니다."

발걸음을 옮기며 유니스와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꽤 순한 인상 의 남자였는데, 인상만큼이나 성 격도 서글서글한 것 같았다. 부드 럽게 대화를 이끌며 적절한 칭찬 을 섞는 것이 대단한 고단수 같았 다. 나는 적당히 겸양을 떨며 넘

겼다.

"중앙 회의에서 북부군이 강을 얼려 넘어올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쪽 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이곳 을 지키면서도 침입은 없을 거라 고 생각했는데 정신이 번쩍 들더 군요."

탁.

유니스가 발걸음을 멈춰 섰다.

나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강을

바라보았다.

"시딘의 강은 건너올 수만 있다 면 최단 거리의 길이 되어 줄 테 니까요."

물속이 비칠 정도로 맑은 강의 수면엔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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