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나는 강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얼어붙은 수면이 내 얼굴을 비추었 다.
'수원으로 쓰기에는 문제없겠네.'
강물은 얼핏 봐도 특별한 정수 과 정 없이 마셔도 될 만큼 깨끗해 보였 다. 살얼음 아래로 물고기들이 헤엄 치고 있는 것을 보아 식량 공급원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은 육안으론 강 너머를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넓었다. 나는 주의를 기 울여 감각에 날을 세워 겨우 그 너머 를 볼수 있었다.
막사를 치기 쉬운 평지, 그 뒤로는 우거진 숲이 있었다.
'저 숲은 북부와 이어져 있으니 여 차하면 도망치기도 쉽겠지.'
앞으로는 강, 뒤로는 숲.
식량과 물, 도피로를 모두 충족시켜
줄 이곳은 북부군이 우리를 기습하기 에 최적의 장소였다.
이 강을 건너올 수만 있다면.
"강은 어느 정도 깊이로 업니까?"
"해가 뜨는 낮엔 살얼음이 끼는 정 도지만 기온이 떨어지는 밤엔 제법 두껍게 업니다."
확실히 해가 지며 점점 더 온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밤이 되면 강이 두 껍게 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뒤 에서 율리안이 으슬으슬한 듯 몸을 떨며 걸치고 있던 망토를 여몄다.
"밤에 건너올 가능성이 높겠군요"
강이 조금이라도 더 얼어 있을 때 와야 마법사들의 마나 손실이 적을 터. 안 그래도 병력이 적은 북부군이 니 귀한 마법사들을 최대한 아끼려 할 것이 분명했다.
"북부군이 언제 올지는 파악되었습 니까?"
"오늘 오후 들은 바로는 유터스와 파블로프의 갈림길 지역에서 마지막 혼적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높은 가능성으로••...
"파블로프에 오겠죠."
한시라도 빨리 침입에 대비해야 했 다
나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 느새 내리기 시작한 진눈깨비가 얼어 붙은 호수의 표면을 덮었다.
"북부는 불화살을 사용합니다. 한 번 상대한 적 있습니다. 거리가 머니 이번에도 사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를 대비해 호수 앞에 바리케이드와 보호 마법 아티팩트를 배치해 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불화살...... 까다롭군요 그래도 눈 이 쌓였으니 마을까지 불이 번지진 않을 겁니다."
'지겨운 눈이 도움이 될 때도 있 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카시아를 바라보았다.
"카시아 경."
"네, 지휘관 님."
"나는 이번에도 그대에게 마수를 조종하고 있는 주술사를 찾아내라는 명을 내릴 겁니다."
그녀의 푸른 눈이 흐릿한 달빛을 받아 시리게 번뜩였다.
"이번엔 찾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푸른색이 저 렇게나 뜨거울 수 있다는 걸 카시아 로 인해 처음 알았다.
눈을 형형하게 불태운 그녀가 주먹 으로 심장 부근을 툭 치곤 고개를 숙 였다.
"만회할 기회를 주신다면 이번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굳은 책임감이 묻어났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서 서히 구름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그믐달을 올려다보았다.
전투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후 유니스와 당장 급한 안건의 토의를 마친 나는 지원군 일행을 막 사로 보내고 마을로 향했다. 마을의 상태를 보고 싶었다.
'크게 어려워 보이진 않네.'
수도처럼 큰 건물이나 화려한 조형 물은 보이지 않았으나 부족한 것도 없어 보였다. 용병 일로 마수를 토벌 하러 다니며 다 쓰러져 가는 마을만 보곤 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듯해 안심되었다.
이미 밤이 깊었기에 거리엔 사람이 없다시피 했다. 오랜만에 고요한 혼 자만의 시간을 즐기게 된 나는 정처 없이 걷다가, 오른편 골목에서 느껴 지는 익숙한 인기척에 눈을 크게 뜨
며 고개를 돌렸다.
"자, 이제 좀 괜찮나?"
"윽, 못 일어나겠어요......
기계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고조 없 이 낮은 목소리는 어울리지 않게 친 절했다.
확인사살차 대상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부축해 주마. 많이 아픈가?"
자상한 낯을 한 조나단이, 넘어진
건지 바지 무릎 부근에 피가 번진 채 울상인 아이를 부축해 주고 있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지 만••... 정말 안 어울린다••...
아이에게 상냥하게 구는 조나단이 라니, 조심스럽게 꽃꽂이하는 악마를 본 기분이었다.
말 걸 타이밍도, 못 본 척 지나갈 기회도 놓치고 어정쩡하게 있었을까, 시선을 느낀 건지 고개를 돌리는 조 나단과 눈이 딱 마주쳤다.
"......지휘관 님. 일은 끝나셨습니 까."
곧바로 평소의 정색한 낯으로 돌아 간 조나단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나는 지금의 그와 조금 전 그에게서 크나큰 괴리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 였다.
"잘 끝났다. 경은 왜 쉬지 않고 나 와 있나. 이 아이는 누구지?"
나는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올려 다보는 아이를 향해 허리를 굽히며 최대한 환하게 웃어 보였다. 흠칫한
아이는 내 웃음이 이상했는지 조나단 뒤에 쓱 숨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역시 아이들은 어려워.'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위험에 민감 해서 본능적으로 내 기운을 느끼고 두려워하곤 했다. 아이들은 잘못 다 루면 부서져 버릴 것 같아서 내가 함 부로 다가가지 않기도 했다.
얼굴을 더 들이대 봤자 아이를 더 겁에 질리게만 할 것 같아 몸을 일으 키고 조나단과 마주했다. 그의 무덤 덤한 시선이 살갗에 닿았다.
"저와 부딪쳐서 다친 아이입니다. 데려다주려고 했습니다."
"아하."
조나단의 허리쯤 오는 작은 아이니 그와 부딪쳤다면 분명 크게 넘어졌을 것이다. 조금 고민하던 나는 이내 허 리를 굽혀 조심스레 아이와 눈을 맞 추었다.
"상처, 치료해 줄까?"
"......네? 아니, 괜, 괜찮은데......
"자금 여기서 바로 치료해 줄 수 있어서 그래."
나는 주머니에서 잘 빻은 약초가 담겨 있는 유리병을 꺼냈다. 전시엔 약초를 따고 손질할 시간이 부족하니 응급처치에 필요한 약초 정도는 늘 바로 쓸 수 있는 상태로 소지하고 다 녔다.
"해치지 않을게. 오래 걸리지도 않 을 거야."
나는 한껏 눈을 휘었다. 조나단의 옷자락을 꾹 잡고 있던 아이가 고민 하는 듯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잠깐 바지만 걷어 볼래?"
최대한 부드럽게 자아낸 목소리에 아이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바지를 걷었다. 꾸물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잠깐."
내가 무릎을 굽히며 아이의 무릎으 로 손을 뻗을 때, 조나단이 날 붙잡 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제게 주시죠?"
"......그대가?"
"네."
그의 손이 내가 쥐고 있던 유리병 을 낚아챘다. 눈 덮인 땅 위에 한쪽 무릎을 굽힐 때까지도 그의 표정은 무뚝뚝했다.
"지휘관이 그 어느 상황에서도 굽 히지 않도록 돕는 것이 부관의 사명 입니다."
무심하면서 사려 깊은 말투. 그는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약초에 대해 아나? 어떻게 사용하 는지도?"
"시골에서 자라서 대강 알고 있습 니다. 카소르 허브 아닙니까."
약초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빻 아져 있는데도 조나단은 곧바로 알아 보았다.
'북부 지역에서만 나서 다들 잘 모 르는데.'
나는 놀라움을 감추며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자신의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 낸 그는 아이의 무릎 위에 약초를 듬뿍
바르고 새로운 손수건으로 무릎 위를 묶어 고정시켰다. 한두 번 해 본 솜 씨가 아니었다.
바짓단까지 고르게 내려 준 그가 몸을 일으켰다.
"무리하지 마라. 또 뛰어다니다 이 번처럼 부딪치지 말고•"
"......네."
아이는 민망한지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통통한 뺨을 붉게 물들였다. 조 나단은 그런 아이를 보며 살짝 웃었 다
저렇게 웃는 그는 처음이었다.
"데려다주마. 집이 어느 쪽이라고 했지."
"아요! 괜찮아요! 바로 저기거든 요!"
아이의 작은 손끝은 200m도 채 되 지 않는 곳에 있는 집을 가리키고 있 었다. 이제 내가 무섭지 않은 건지 활짝 웃은 아이가 나와 조나단에게 붕붕 손을 흔들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안녕히 가세
요"
아이들은 신기할 만큼 해맑았다. 나 는 제대로 겪지 못했던 유년기의 순 수함을 그득히 담은 두 눈은 늘 내게 묘한 충족감과 회의감을 동시에 느끼 게 했다.
나는 아이들이 어려웠으나, 싫어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경은 아이들을 좋아하나?"
아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까지 두 눈에 담은 뒤에 물었다. 마찬가지로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조나 단이 내 물음에 느리게 눈을 굴렸다.
"아뇨. 특별히 좋아하진 않습니다."
"그런 것치곤 아이와 잘 어울리던 데."
소름 끼치도록 새롭던 그의 태도를 떠올리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까, 조나단의 새까만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어린아이를 보호하고 돕는 건 어 른들의 사명 아닙니까. 어린아이를 지켜 주지 않는 사회는 문명사회라
불릴 자격이 없죠."
그 말 한마디가 짙고 무거웠다. 순 간 그의 표정이 일렁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막사로 돌아가시죠. 날이 많이 춥 습니다."
금방 태도를 갈무리한 조나단이 자 신의 망토를 벗어 내 어깨에 걸쳐 주 었다. 나는 되었다고 할까 하다가, 이것도 부관의 임무라며 기계처럼 답 할 조나단의 모습이 뻔히 예상되어 그만두었다.
"그래. 돌아가자고."
하늘은 땅을 전복시킬 듯 끊임없이 눈송이를 쏟아 냈다.
파블로프에서의 아침은 아름다웠다. 강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여느 때와 같이 누구보 다 일찍 일어난 나는 돌담에 걸터앉 아 일출을 보다 다가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부지런하시군요."
유니스가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내 게 다가왔다. 나는 의례적으로 마주 웃어 주었다.
"셜리 경도요. 아직 이른데 왜 벌써 나오셨습니까. 좀 더 쉬시죠."
"요새 도통 깊이 자질 못해서 말입 니다. 한번 깨면 다시 잠들지 못합니 다. 이왕 깬 거 크리시스 경과 함께 일찍 하루를 시작하도록 하죠"
그가 넉살 좋게 답했다.
이후 잠시 이어진 어색하지 않은 침묵을 즐기던 나는 첫 만남부터 품 었던 의문을 입에 담았다.
"셜리 경, 검사가 아니시죠?"
"......어떻게 아셨습니까?"
유니스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 았다.
"경의 손이 검 잡는 사람의 손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예민하시군요 맞습니다. 저는 창 잡이입니다."
'창잡이?'
보통 지휘관들은 검사였으나, 마법 사 지휘관 또한 적지 않았다. 그래서 마법사가 아닐까 예상했건만, 창잡이 라니, 확실히 독특했다.
"하하. 못 미더우십니까?"
"아뇨. 창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사 람은 처음 봐서 신기했던 것뿐입니 다."
창은 검을 배우며 적당히 사용 방 법을 습득하는 보조 무기와 다름없다 는 것이 보통의 인식이었다. 사정거
리가 길다는 장점은 있었으나 검과는 달리 베어 내는 데 쓰기 애매하고 길기 때문에 오히려 궤적이 읽히기도 쉽다는 단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호탕하게 웃은 유니스가 눈을 빛냈 다.
"하기야. 창잡이가 흔치는 않으니까 요 창도 충분히 강하다는 걸 보여 드리겠습니다."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그 자신감 에 흥미가 돌아 눈을 가늘게 들 때였 다
쿠구구구궁.
멀지 않은 곳에서 대지가 울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단숨에 신경이 곤두섰다. 위험한 것 들이 가까이 있을 때 으레 그랬다. 나는 단숨에 얼굴을 굳힌 채 강 너머 육지를 바라보았다.
땅에 쌓였던 눈이 먼지처럼 사방으 로 휘날리고 있었다. 강이 출렁일 만 큼 육지가 진동하•己 나무들이 이리 저리 혼들렸다. 나는 점점 더 모습을
드러내는 무리를 노려보았다.
' 아.'
그리고 처음으로 드러난 인영에 심 장이 철렁 가라앉았다.
'지그문트, 이 개자식. 노린 거겠 지.'
북부군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내가 북부와의 첫 전투에서 죽이지 않고 보내 줬던 북부 습격군의 대장, 힐다 베스토였다.
내가 죽이지 않은 그녀 때문에 몇 명이 죽게 될까.
그는 내게 끊임없이 딜레마를 던졌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