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 화
"......직접 다녀오시겠다고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유니스가 이내 얼굴을 굳혔다.
"그 결심은 감탄스럽습니다만, 너무 위험합니다. 크리시스 경의 실력을 불신하는 건 아니나, 만에 하나 크리시스 경을 잃었을 땐 어 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유니스는 침착하게 자신의 의견 을 역설했다.
"맞습니다. 지휘관이 자리를 비 우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기 도 합니다. 한 번 더 고려해 주시 죠."
조나단도 의견을 보탰다. 늘 의 중을 비치지 않던 검은 눈동자가 오늘만큼은 복잡해 보였다.
"저도 쉽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 다. 지휘관이라는 자리의 무게를
모르지 않습니다."
나는 잠시 감았던 눈을 스르륵 떴다.
"무사히 돌아올 자신이 있어서 가겠다고 하는 겁니다. 제가 가면 인명 피해 없이 끝낼 수 있는 일 인데, 몸을 사려서 또 다른 피해 를 만들고 싶진 않습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조나단을 바 라보았다.
"그대, 저번에 보니 내가 없을
때도 지원군을 제대로 통솔했더 군."
검은 눈동자에 잔잔한 파도가 일어났다.
"한 번만 더 맡기지. 그대를 믿 는다."
아직도 인간적인 거리감이 느껴 지는 사람이다. 그는 단 한 번도 '부관'이 아닌 '조나단'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또렷한 이성과 냉
철한 지성은 과연 감탄할 만했다. 일 처리 실력만 보았을 땐 그가 나보다 지휘관에 걸맞을지도 몰랐 다.
나는 아직 조나단이라는 인간은 믿지 못했으나, 그의 실력은 믿었 다.
조나단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 지 못했다. 나는 그의 미묘한 동 요를 잠시 눈에 담다 유니스를 돌 아보았다.
"오늘 밤 바로 출발해 내일 아 침까지 돌아오겠습니다. 살아 돌 아올 거라고 장담하죠."
나는 그 무엇도 쉬이 장담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오만이라도 떨어 야 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는 진지를 비우는 것이 지휘관으로서 무책임한 짓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책임을 지는 방 법은 모두가 다른 법이다.
묵묵히 뒤에서 지키는 것으로 의무를 다하는 지도자가 있는 반
면, 누구도 다치지 않도록 먼저 나서는 것으로 의무를 다하는 지 도자도 있었다.
나는 절대적으로 후자였다.
유니스가 갈팡질팡하는 표정으 로 나를 바라보았다. 잡아야 하는 지 보내야 하는지 고민하는 기색 이 역력했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수긍하겠 네.'
잠시간 본 유니스는 이성적인
설득을 깡그리 무시하고 원칙을 고수하는 답답한 사람이 아니었 다.
이 기세에 박차를 가해 완전히 설득시키려 할 때, 누군가 나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확실히 지휘관 님이 다녀오시 면 더 이상의 인명 피해는 없겠 죠. 하지만 혼자는 안 됩니다."
나는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시선 을 돌렸다.
"저도 같이 가죠."
세레논의 희뿌연 푸른빛 눈이 진중하게 빛났다.
"황자 저하...... 아니십니까?"
유니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 정으로 세레논을 바라보았다.
상상도 못 했다는 눈빛을 보아 황자인 세레논이 전장에 나온 이 유가 대외적인 이미지 때문이라고 지레짐작한 모양이었다.
황자로서 대우를 받으며 위험하 지 않은 곳만 적당히 돌다 가면 될 그가 가장 위험한 일에 직접 나서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검사입 니다. 지휘관 님 보조로는 충분할 겁니다."
세레논이 유니스의 말을 정정했 다. 황자라는 막강한 직위를 놓고 소드 익스퍼트라는 자격으로 전장 에 나온 그의 결심이 엿보였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위험하다는 말은 듣지 않겠습 니다. 위험한 건 지휘관 님도 매 한가지 아닙니"h 지휘관 님과 가 장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본 제가 함께 가는 게 맞습니다."
마침 위험하다고 말하려 했던 나는 그의 단호한 표정에 입을 다 물었다.
세레논은 한 번 결심한 것은 절 대 꺾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가 가는 한, 그 또한 함께 가게 되리 라는 것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
었다.
"슬슬 솔라티네 제국이 부러워 지려 하고 있습니다."
나와 세레논을 조용히 지켜보던 유니스가 중얼거렸다. 그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더는 제가 말릴 수 있는 부분 이 아닌 것 같군요."
그의 표정은 결연했다.
"다녀오시죠. 이곳은 제가 지키
고 있겠습니다."
북부 염탐조가 결성되는 순간이 었다.
"두 분 다...... 왜 그렇게 사세 요? 조 이름은 '사서 고생'으로 하지 그러세요. 줄여서 '사고'."
율리안이 질린 표정으로 주절거 렸다. 걱정인지 조롱인지 분간이 안 가는 투였으나 그냥 걱정이라 고 믿기로 했다.
"저도 같이 가야 하는데...... 실 수하시는 겁니다."
카시아가 푸른 눈을 시리게 불 태우며 나를 노려보았다.
"카시아 경은 남아야 하는 이유, 충분히 설명해 드리지 않았습니 까. 표정 좀 푸세요."
누가 보면 맛있는 거 먹으러 가 는데 두고 가는 줄 알겠다. 털 세 운 고양이 같은 카시아를 보며 한 숨을 쉬었다.
'카시아 경 잠시 대련에 어울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네. 가겠습니다.'
얼마 전에 알았는데, 카시아는 지원군 평민 기사들 사이에서 영 향력이 대단했다.
귀한 집 자제들에게 곧 죽어도 굽히지 않는 반골 기질 때문에 원 래도 평민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데다, 평민 기사들 사이에서 가장 강했기에 대련 요청이 끊이지 않 고 들어온다고 했다.
'하긴, 평민 기사들이 황자인 세 레논에게 대련을 요청하긴 무서울 거고. 지휘관인 내게 다가오기도 힘들 테니까.'
귀족 출신 기사들에게 세레논이 있다면 평민 출신 기사들에겐 카 시아가 있는 모양이었다.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상황 이 잘못되더라도 기사들이 해이해 지지 않게 세레논과 카시아 중 한 명은 남아 있는 게 낫겠지.'
나는 일당백을 해 주고 있는 세 레논과 카시아를 떠올리며 옅게 미소 지었다.
"또 다쳐 오면 나만 고생이겠지. 에휴. 나 없으면 어쩔 뻔했어."
그러니 뺀질거리는 건 이 인간 밖에 없을 터다.
나는 잔뜩 생색을 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율리안을 보면서 헛웃음을 뱉었다.
홀리 레인을 성공한 뒤로부터
아들 낳은 후궁처럼 생색이란 생 색은 다 내는데, 이상하게도 밉지 않았다.
"목숨만 붙여 오세요. 멀쩡히 고 쳐 드릴 테니까."
고운 연보랏빛 눈동자를 초롱초 롱하게 빛낸 율리안이 애교스럽게 웃었다.
"역시 지휘관 님한테 깜찍이는 저밖에 없죠?"
그가 눈을 찡긋거렸다. 나는 결
국 소리 내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누가 보면 지가 가는 줄 알겠 네......
"뭐요? '지,? 대신관한테 '지'?"
"아무 말도 안 했네만."
도끼눈을 뜬 세레논의 중얼거림 에 율리안이 버럭 성을 냈다.
또다시 시작된 두 사람의 싸움 을 가볍게 무시한 나는 추운 날씨 인데도 땀을 뻘뻘 흘리며 마법진 을 그리고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번부터 고생이 많군."
"앗! 아닙니다!"
이마의 땀을 쓱 닦은 남자가 해 맑게 웃었다. 저번에 협곡에서 북 부가 기습했을 때 나를 바위산 위 로 이동시켜 준 그 마법사였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곳으로 텔레포트를 발동시키는 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텔레포트 마법은 조금이라도 계산에 오차가 생기면 이동자의 팔다리쯤은 간단히 절단
시킬 수 있는 위험한 마법이었다.
'저...... 제가 해봐도 되겠습니 까?'
그 어떤 마법사도 지휘관과 황 자를 다치게 할 위험을 감수하면 서 순간이동 마법을 전개하려 하 지 않을 때, 이 남자만이 자원했 다.
"자원해 줘서 고맙군. 그대가 아 니었으면 얼음 호수를 헤엄쳐서 건널 뻔했어."
"하하. 그럴 수야 없죠. 저도 멀
쩡히 보내 드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건 아니지만......
남자가 조금 불안해하는 표정으 로 나를 바라보았다.
"순간이동이 잘못되어도 문책하 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겁니다."
"갑자기 사막나라로 보내 버려 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니까. 다만 하늘나라로 보내 버리면 조금 곤 란할 수는 있지."
부러 능청스레 너스레를 떨자 남자가 낮게 웃었다. 위축되어 보
이던 그는 조금 긴장이 풀린 듯 어깨를 폈다. 그의 두 눈은 총명 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대에게 두 번이 나 신세를 지게 됐는데도 아직 이 름을 모르는군. 이름이 어떻게 되 나?"
빛나는 그 눈이 어쩐지 시야에 진하게 맺혀서, 나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내 물음에 눈을 끔뻑인 남자가 활짝 웃었다.
"시안입니다. 지휘관님이 기억해
주신다면 영광스러울 겁니다."
나는 머릿속 한구석에 그의 웃 음과 이름을 새겨 두었다.
"마법진은 얼추 완성됐습니다. 계산은 오류가 없는지 스무 번도 더 검토해 보았습니다. 이론상으 론 완벽합니다."
그 후 몇 분 정도 땅에 고개를 처박고 머리를 부여잡으며 괴로워 하던 시안은 뭔가를 마치고 비로 소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이 갑작스레 십 년은 더 늙은 것 같
아 조금 미안해졌다.
"순간이동 아티팩트 잘 챙기셨 죠?"
"그래."
"마법사들 전원이 마력을 때려 박았고, 테스트도 해 봤습니다. 전파 방해도 이겨 낼 수 있을 겁 니다."
나는 주머니에 고이 넣어둔 아 티팩트를 만지작거렸다.
순간이동 아티팩트는 대단히 편 리했다. 그러나 가본 적 없는 곳
으론 이동할 수 없다는 단점 때문 에 올 때는 사용할 수 있어도 갈 때는 마법사의 힘을 빌려야 했다.
"몸조심하십시오."
"다섯 번째 당부하지만 살아서 만 와요."
카시아와 율리안이 차례대로 말 했다. 미련 없이 인사하는 입과는 다르게 두 사람 다 걱정스러운 눈 빛을 보내고 있었다.
"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는 늘 짧고 간결하게, 특별 히 절절하지 않게 하려 했다. 애 절하게 인사하면 정말 죽으러 가 는 것 같으니.
잠시 집 앞에 마실 나가는 것처 럼 가벼이 인사한 나는 세레논을 돌아보았다.
"준비되셨습니까?"
검집을 매만진 세레논이 씨익 웃었다.
"그럼요. 스승님이 같이 가시는
데 두려워할 것도 없지 않습니 까."
그 온전한 믿음이 진심으로 고 마워졌다. 나는 세레논과 함께 마 법진 위에 서고 시안을 향해 고개 를 끄덕였다.
"바로 출발하지."
" 네."
시안의 표정에 긴장이 스쳤다.
쉬익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한 그는, 눈 을 부릅뜨며 마법진 위에 마나를 주입했다.
" 텔레포트!"
파앗!
눈을 멀게 할 듯 환한 빛이 터 져 나왔다. 익숙한 울렁거림이 속 을 뒤집는 가운데, 나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M 으 "
그리고 어깨를 찌르는 강한 통 증에 어깨를 부여잡았다.
스르륵.
부유감에 해롱거리던 정신이 어 느새 가라앉았다.
손으로 뜨거운 액체가 느껴지는 가운데, 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이 정도면 귀엽지.'
길게 찢어진 어깨에서 흐르는
피가 설원을 적시고 있었다. 위험 도가 상당한 순간이동에 대한 대 가치고는 상당히 가벼웠다.
"스승님, 어깨가......!"
"쉿. 목소리 죽이세요."
어지러운지 약간 휘청거리던 세 레논이 내 어깨를 보더니 눈을 크 게 떴다. 나는 코앞에 검지를 갖 다 대 입을 막으며 그를 살펴보았 다. 다행히 그는 잔상처 하나 없 이 멀쩡해 보였다.
늘 주머니에 상비하고 다니는
깨끗한 천으로 대충 상처를 묶어 지혈한 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가 빼곡한 숲.
높은 나무 사이로 달빛이 어스 름하게 깃들었다.
"잘 도착한 것 같군요."
순간이동은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