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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52화 (252/254)

252화

"여기가 어디일까요."

내 다친 어깨를 붙잡고 호들갑 을 떠는 것도 잠시, 세레논이 주 위를 두리번거렸다. 강 건너편 숲 속인 건 확실한 것 같지만 처음 와 보는 곳이라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글쎄요. 우선 이동해 봐야 할 것 같군요."

마수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젖힌 채 눈을 감고 허공의 냄새를 맡다 실소를 터트 렸다.

'이러니까 탐지견이 된 것 같지 만.'

한평생 마수의 악취를 맡아 온 내 후각으로 탐지하는 것만큼 확 실한 게 없었다.

풀 냄새, 밤이슬 냄새, 시린 눈

내음과 멀리서 느껴지는 사람 냄 새들을 모두 제치고 감각을 곤두 세우던 나는 그 틈새를 파고드는 익숙한 악취에 눈을 떴다.

"오른쪽입니다. 가죠."

동이 트기 전, 어둠 속에 몸을 숨길 수 있을 때 일을 끝내야 했 다. 우리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 기 시작했다.

'젠장, 숲만 아니었어도 훨씬 빨 리 찾았을 텐데.'

나는 한숨을 쉬며 주위를 두리 번거렸다. 키 큰 나무들과 어둠은 우리를 가려 준다는 장점이 있는 동시에 우리의 시야를 가린다는 단점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스승님."

"잠시만요."

"저기 앞에, 사람 기척 아닙니 까?"

세레논이 숨까지 죽인 채로 속 삭였다. 후각에 온 신경을 집중하 고 있던 나는 그제야 다가오는 기 척을 느낄 수 있었다.

"순간이동의 흔적이라니...... 전 에 보낸 염탐꾼이 죽은 걸 보고도 정신 차리지 못한 건가. 혼적은 가까운가?"

"그리 멀진 않은 것 같습니다."

멀리서 아주 흐릿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세레논은 동시에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는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거울을 보진 않았지만 나 또한 만만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 으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힐다였다.

"......저희 큰일 난 거죠?"

" 아무래도요."

" 뛸까요?"

"네."

허탈함이 깃든 몇 마디 말이 오 간 즉시, 나와 세레논은 나무 위 로 뛰어올라 소리를 죽이고 달리 기 시작했다.

'다행으로 여겨야 할 부분인 데...... 좀 짜증 나긴 하는군.'

사람을 극한으로 몰아넣으며 훈 련시키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여태 헷갈려 하다 위기 상황이 되 자마자 갑자기 감을 잡은 내 얄미 운 후각이 이를 증명했다.

나는 가장 위급한 순간 극적인 발달로 간신히 생존해 온 사람이 었다.

우리는 달빛에 반짝거리는 조약 돌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헨젤

과 그레텔처럼 더러운 악취의 흔 적을 따라 달려갔다. 마수의 흔적 이 가까워짐과 동시에 인기척도 짙어졌다.

"......마스터를...... 죽여라."

누군가의 목소리가 신기루처럼 둥둥 떠다녔다. 나와 세레논은 속 도를 대폭 낮추며 인기척을 죽였 다.

목소리는 같은 음정과 형태로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주문이나 세뇌 같을 정도였다. 이를 세레논

또한 느꼈는지 그가 얼굴을 찡그 렸다.

"뭘 하는 걸까요?"

난 한숨을 푹 쉬며 나무 사이를 뛰어넘었다. 대충 짐작 가는 부분 이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고, 저 멀리로 치솟는 모닥불이 보일 때.

"소드 마스터를 가장 먼저 죽여 라."

바람 소리처럼 들리던 목소리가 귓가에 정확히 꽂혔다.

"......들으셨습니까?"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지자 세 레논도 들었는지 놀란 눈으로 나 를 돌아보았다. 나는 비릿하게 웃 었다.

"아무래도 제가 사랑을 많이 받 는 모양입니다."

사냥 대회에서 상대했던 바실리 스크.

한 번쯤 나를 돌아볼 법한데도 거대하고 흉포한 뱀은 무언가에 세뇌된 미친 개처럼 레오만을 쫓 았다.

'그게 정말 세뇌된 거라면?'

아마 소드 익스퍼트를 죽이라고 세뇌했을 것이다. 마수는 사람을 알아볼 줄 모르지만 오러는 느낄 수 있으니까.

'아마 바실리스크 이전에 나와 라이너 앞에 하라바나가 나타난

건 또 다른 소드 익스퍼트인 라이 너를 타겟으로 오인했기 때문이겠 지.'

아리아와 칼에게 바실리스크의 심장 조각을 주고 연구까지 부탁 하여 내린 결론이었다. 북부는 마 수를 조종할 수 있는 것으로도 모 자라 마수에게 타깃을 세뇌시킬 수도 있었다.

사냥대회에선 라이너와 레오를 혼동하는 사고가 있었으나, 이번 엔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소드 마스터를 가장 먼저 죽여 라."

파블로프의 얼어붙은 호수 위에 서 소드 마스터는 나밖에 없을 테 니까.

우직.

"아......

"조심하세요!"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내 뒤를 쫓아오던 세레논이 나무를 뛰어넘 다 말고 삐끗했다. 도약하다 밟고

있던 나뭇가지가 부러져 버린 탓 이었다.

다행히 추락하진 않았지만 놀라 움직임을 멈춘 나는 그를 붙잡아 주었다.

"나무들이...... 왜 이렇게 시들 었죠? 설마......

주위를 두리번거린 세레논이 어 두운 낯으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인기척에 가까워질수록 나무들의 상태가 가뭄이라도 맞은

듯 비정상적으로 말라갔다.

'풀엔 그을린 자국이 있고, 바위 는 깨져 있고......

황폐한 주위를 보며 이마를 짚 었다.

염탐꾼의 단말마를 단서로 삼아 추정할 수 있었던 마수들 중 가장 아니길 바랐던 마수와 점점 가까 워지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 가까이에 이르렀 을 때 오른손 주먹을 꽉 쥐어 보 여 멈추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내 뒤를 따라오던 세레논이 내가 선 두꺼운 나뭇가지 위에 사뿐히 착 지 했다.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가 아슬 아슬해 보였으나 부러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타닥타닥.

멀리서 보았을 땐 작은 모닥불 같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부두교에

서 제사를 드릴 때나 피울 법한 거대한 불길이었다.

그 앞엔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 이 계속해서 같은 말을 중얼거리 고 있었다. 아무래도 주술사인 것 같았다. 그의 몸 위론 거대한 그 림자가 져 있었다.

"......정말 아니길 바랐는데요. 아직도 그날 일을 악몽으로 꾸거 든요."

세레논이 목 졸린 듯 속삭였다. 그의 두 눈은 주술사 앞의 거대한

존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또 한 잘 아는 마수였다.

"저도 아니길 바랐습니다."

나는 눈빛으로 무언가를 태울 수 있는 것처럼 대상을 노려보았 다.

쉬이익.

미끈한 비늘을 가진 것이 길고 검은 혀를 날름거렸다. 파충류 특 유의 세로로 쭉 찢어진 생기 없는 동공이 섬뜩했다.

대재앙이라 불리는 다섯 마수 중 하나인 '뱀들의 왕' 바실리스 크였다.

"이 자식들, 완전히 미쳤군요."

나는 완전히 질린 채로 어둠 속 을 응시했다.

우리 앞에 있는 마수는 바실리 스크 한 마리뿐이 아니었다.

모습은 큰 독수리이고 날개는 번개처럼 생겼으며 번개와 날씨를

자유자재로 조종한다는 강력한 괴 조, 천둥새'.

보통 사람의 발이 닿지 않는 숲 에서 사는 데다 개체 수도 극소수 라 기록은 있지만 실존하긴 하는 지 오리무중인 전설의 새였다.

천둥새는 성향이 독립적이라 인 간이 길들이는 건 불가능에 가까 우나,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덤 벼들지 않기 때문에 그리 위험하 진 않았다. 오히려 악한 것들을 정화하는 신성한 힘이 있기에 이 로운 동물이었다.

허나 그 천둥새의 시체에 마기 가 깃든다면 최악의 괴물이 탄생 했다.

키에에엑!

"헉."

세레논이 다급하게 숨을 들이쉬 었다.

긴 울음소리는 소음의 영역을 넘어 뇌파로 다가왔다. 누군가 뇌 를 붙잡고 마구 혼드는 듯한 끔찍

한 감각이 일었다.

'빌어먹을. 이건 나도 상대해 본 적 없는 마수인데.'

입술을 짓씹었다.

안 그래도 개체수가 얼마 되지 않는 천둥새에 마기가 깃드는 우 연까지 합쳐져야 했기에 10여 년 을 마수 토벌에만 종사한 나조차 도 본 적 없을 만큼 희귀했다.

'그것들은...... 정말 끔찍하지. 만나면 살아남을 거란 생각은 버

려라. 나도 천운으로 겨우 기어 나왔으니까. 희귀하다는 게 신의 안배다.'

나는 카라쇼에게서 들은 이야기 를 떠올리며 지독한 위압감을 풍 기는 그것을 찬찬히 살폈다.

한 입에 사람 하나를 삼킬 수 있을 것 같은 긴 부리와 징그럽도 록 많고 뾰족한 이빨. 불길한 마 기로 일렁이는 푸석푸석한 보랏빛 깃털과 폭풍을 일으키는 거대한 날개.

캬아악!

울부짖음으로 하늘을 뒤흔들고 날갯짓으로 날씨를 뒤바꾸는 거대 한 새.

다섯 대재앙 중 하나인 '뇌우의 군주', 파천새였다.

'미친놈들. 대재앙을 두 마리씩 이나 끌고 와?'

나는 머리를 싸맸다. 대재앙 한 마리를 상대하는 것은 자신 있었 다. 이미 여러 번 해 봤으니까.

하지만 두 마리부터는 확신이 없었다. 심지어 파천새는 상대해 본 경험도 없는 놈이었다.

"스승님."

내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세레논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희뿌연 벽안이 달빛을 받아 묘한 섬뜩함을 자아냈다.

"저 주술사, 지금 죽이고 가죠."

죽음을 논하는 그의 얼굴엔 표

정 변화조차 없었다.

그 순간 자각했다. 세레논은 평 생을 궁중 암투 속에서 살아남아 오며 사람의 죽음에 익숙해져 있 을 거라는 걸.

그는 다정하고 선해도 제국을 위해선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는 디에고와 같은 종족이었다.

아무리 유순해 보여도 태어나길 지배자였다.

"......계획에 없는 일입니다. 우

리가 이곳에 있다는 걸 들킬 겁니 다."

나는 동요를 보이지 않으려 노 력했다. 이제 와서 살인을 하고 싶지 않다는 소리를 할 순 없었 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이치에 맞는 이유를 대어야 했다.

"융통성은 필요하죠. 소리 없이 죽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왔는 데 좀 더 성과를 거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人 己르 -- o •

세레논이 가터에 꽂힌 단검을 조용히 뽑았다. 저걸 주술사의 목 에만 명중시키면 주술사는 신음조 차 내지 못하고 즉사할 터였다.

번뜩이는 단검 날에 비친 내 두 눈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으신 거 죠."

그의 속삭임에 나는 흠칫했다. 티 나지 않게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내 착각인 모양이었

다.

그가 태연자약하게 웃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눈을 감고 계 셔도 좋습니다."

저렇게 쉬이 말할 수 있을 때까 지 그는 몇 구의 시체를 봐야 했 을까. 오싹함이나 껄끄러움보단 회의와 걱정이 먼저 밀려왔다.

나는 입 안의 살을 짓씹다 고개 를 젓곤 그의 단검을 부드럽게 낚 아챘다.

"아뇨. 제가 하겠습니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기 싫다는 이유로 다른 이에게 살인을 맡기 다니, 그런 건 스승도 아니고 좋 은 지도자도 아니며, 선인은 더더 욱 아니었다. 그냥 겁쟁이 위선자 일 뿐이었다.

언제까지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 다."

"제가 해야 합니다."

단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어차 피 익숙해져야 한다면 최대한 빨 리 익숙해지는 게 나았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주술 사의 목에 검 끝을 맞추었다.

내 몸의 일부처럼 휘두르던 검 의 위력을 자각한다. 이 날붙이는 마수의 두꺼운 가죽뿐만 아니라 인간의 온기 어린 피부도 찢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난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하는

손을 으스러져라 쥐었다. 휘몰아 치는 폭풍우에 탑승한 사람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죽일 수 있어.'

도망가고 싶었다.

도망가선 안 됐다.

이를 악물고 어깨를 힘껏 젖힐 때.

우지끈!

말라 비틀어져 아슬아슬하던 나 뭇가지가 큰 소음을 내며 부러졌 다.

쉬이익!

이미 내 손을 떠난 단검이 허공 을 가르고 날아갔다.

푸슉!

"크아악!"

갑작스레 추락한 탓에 조준한 궤도가 어긋나 어깨에 단검을 맞

은 주술사가 비명을 질렀다. 핏발 선 눈이 우리 쪽을 죽일 듯이 노 려보았다.

"침입자다!"

그의 우레 같은 외침과 함께, 숲 속은 난장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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