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부스럭-
작은 인기척에 무의식을 표류하 던 정신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 암살자인가.'
나는 자다가 일어나 몽롱한 머 릿속을 애써 정리하며 이불 속에 숨겨 두었던 검의 손잡이를 조용 히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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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인기척이 내 침대 가까 이까지 다가왔을 때, 번쩍 눈을 뜨며 검을 뽑아 침입자에게 겨누 었다.
"어."
"......살면서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신선한 아침 인사군요. 북부 군 기지에 갔다가 배워 오신 겁니 까?"
얼빠진 탄식을 내뱉었을까, 침입
자는 갑자기 목에 검이 겨누어졌 는데도 미세하게 좁힌 미간을 제 외하곤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저 들고 있던 산더미 같은 서류를 내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놓을 뿐이었 다.
"부관 조나단 에이머리입니다. 진부한 아침 인사는 생략하겠습니 다. 지휘관님도 저도 그리 좋은 아침은 아닌 것 같으니. 보고할 것이 많습니다."
어느 때보다 피곤해 보이는 조 나단은 답지 않게 농담 같은 말을
-흉흉한 기세를 보면 농담은 결 코 아닌 것 같았지만- 내뱉으며 내 곁에 섰다.
"너무 정 없군. 인사 정도는 하 자고. 좋은 아침이다."
나는 머쓱하게 검을 거두며 괜 히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잠시 빛 한 점 들지 않는 그림 자 진 흑안으로 날 응시한 그는- 이때 조금 소름 끼쳤다- 짧게 한 숨을 쉬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멀쩡해. 오래 잔 것 같은데, 지 금 몇 시지?"
나는 사방으로 뻗은 긴 머리를 대충 정리하곤 눈을 비볐다. 그가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했 다.
"오후 1시입니다. 많이 피곤하 신 것 같아 깨우지 않았습니다."
원래 해가 뜨기 전에도 본능적 으로 눈을 뜨곤 했는데, 이렇게 늦게까지 잔 걸 보아 몸이 지치긴
했던 모양이다.
나는 신음을 뱉으며 침대 헤드 에 등을 기대었다.
"......어제부터 그대가 고생이 많군. 황자 저하는 괜찮으신가?"
"아직 깨어나진 않으셨지만 몸 은 문제없으십니다."
'에휴...... 나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 어쩌긴 뭘 어째. 가정이 무 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나라가 무너지고 대륙이 무너지고......
'저 그냥 치료 안 받으면 안 됩
니까? 차라리 죽고 말겠습니다.'
나는 죽어가던 사람이라도 살린 듯 생색이란 생색은 다 내던 율리 안과 그에게 치료를 받는다는 사 실에 혀 깨물고 죽고 싶어 하던 세레논을 떠올렸다.
화살에 다친 다리를 치료받는 것까진 확인했으니 별 문제 없다 면 오늘 안에 무리 없이 깨어날 터였다.
"아침 보고 부탁하지.
힘차게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제복 재킷을 걸쳐 입었다.
또 하루의 시작이었다.
"아티팩트가 발동하지 않았던 거군요. 조금 불안하긴 했는 데...... 감을 무시해선 안 됐습니 다."
또 다시 시작된 회의. 유니스가 자책하듯 미간을 짚었다. 난 고개 를 저었다.
"어차피 마법사를 선출할 때 자 원하는 사람이 없었을 겁니다• 숲 수색 과정에서도 짐만 됐을 거고 요. 이렇게 둘 다 무사히 돌아왔 으니 되지 않았습니까."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저희 계획이 실패할 거 라는 걸 미리 알고 계셨습니까? 어떻게 강가 앞에 나와 계셨죠?"
어제부터 궁금했는데 정신이 없
어서 미처 묻지 못한 부분이었다. 유니스가 살짝 미소 지었다.
"예정보다 도착이 늦어져 이상 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습니다만, 지원군의 기사가 달려와 전해 주 더군요. 계속 강 너머를 확인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난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 다."
그곳엔 무뚝뚝한 표정의 카시아 가 서 있었다.
"헤엥. 어제 주인 기다리는 개처 럼 강 너머만 바라보면서 대체 언 제 오시는 거냐고 1분에 한 번씩 물어봤으면서 되게 쿨한 척하네 요."
턱을 괴고 앉은 율리안이 실실 웃었다. 그 한마디에 귓가가 순식 간에 붉어진 카시아는 눈매를 사 납게 세웠다.
"그 질문에 꼬박꼬박 답해 준
게 대신관님이었잖습니까. 같이 기다렸으면서 이러깁니까? 얼마나 산만하게 다리를 떠시던지 혼자 지진 난 땅 위에 서 계신 줄 알았 습니다."
"하! 저는 기다리기 싫었거든 요? 그런데 교황 성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손난로로서의 본분 을 다한 것뿐이에요! 당신, 교황 만나 봤어요? 명령 안 들으면 얼 마나 고약하게 구는지 알아요?"
"평민 기사 나부랭이가 교황 성 하를 어떻게 만납니까? 지금 자 랑하는 겁니까?"
카시아와 율리안이 작은 목소리 로 티격태격했다. 자기들 딴엔 안 들린다고 생각하고 그러는 것 같 았지만 회의장이 조용했기에 뭐라 고 시부렁거리는지 다 울려 퍼졌 다.
'율리안은 카시아랑도 사이가 안 좋네.'
세레논이랑만 별로인 줄 알았건 만. 이제 보니 그냥 주둥이로 매 를 벌고 다닌다. 안 해도 되는 말 을 굳이 해서 재앙을 불러들이는 게 습관인 듯했다.
나는 해탈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곤 본론으로 돌아갔다.
"북부군이 데려온 마수를 확인 했습니다."
두 사람의 만담 같은 말다툼에 조금 풀어졌던 회의장 내 분위기 가 다시 가라앉았다. 유니스가 얼 굴을 굳혔다.
"마수에 대해선 충분히 공부해 뒀습니다. 무슨 종류입니까? 혹시
수가 많습니까?"
"수는 적습니다. 단 둘이니까 요."
그 둘이 용과 호랑이 급이라 문 제지만.
순간 유니스의 두 눈에 희망이 도는 것을 본 나는 그가 본격적으 로 기대하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 었다.
"북부가 끌고 온 마수는 바실리 스크와 파천새입니다."
이 한마디에 장내로 거대한 파 문이 퍼졌다.
"그건 대재앙들 아닙니까?"
유니스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네. 바실리스크는 두 번 상대해 본 적 있어서 약점이나 성향을 알 고 있습니다만...... 파천새는 저도 처음입니다."
이게 가장 큰 문제였다.
신이 공평함을 증명하듯, 대재앙 들은 하나같이 약점을 가지고 있 었다. '깊은 숲속의 고요한 폭군' 하라바나는 입 안이 약점이었고, '뱀들의 왕' 바실리스크는 체력이 약했다.
그럼 '뇌우의 군주' 파천새는?
"파천새는 공략 방법이 없는 겁 니까?"
유니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을 때, 난 과거를 회상했다.
'스승님은 역시 대단하세요. 대 체 어떻게 그런 괴물에게서 살아 남으신 겁니까?'
'대단하다고 칭송받을 정도는 아 니다. 우연의 연속으로 겨우 빠져 나왔거든.'
나는 고개를 들어 장내를 천천 히 둘러보았다.
"방법이 있습니다."
내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파천새의 약점은••••••.
그녀는 죽어서도 내게 도움이 되고 있었다.
북부군의 진지를 정면 돌파한 사건으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그간 북부군과 우리들은 강을 사이에 두고 한층 진정된 듯하면 서도, 마치 폭풍전야처럼 싸늘하 던 분위기가 점점 더 고조가 되고 있었다.
"다리는 완전히 나으신 겁니 까?"
"너무 빨리 달리면 조금 절뚝거 리지만 이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세레논이 의기양양하게 자기 다 리를 빙빙 돌려 보이며 씨익 웃었 다.
율리안이 신성력으로 매일 케어 해 줬기 때문인지-한 번 고쳐 주 고 더는 저 인간 치료하지 않겠다 는 걸 어르고 달래서 계속 시켰다 - 그는 금방 나았다. 세레논은 자 연 치유 속도가 빨라서 그런 거라
고 박박 우겼지만.
"그나저나 요새는 조용하군요."
세레논이 강 건너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서히 노을이 지는 시간대.
그날 이후 매일 하루의 일과처 럼 아침마다 강에 낀 얼음을 깨기 시작해-왜인지 병사들이 모두 나 와 구경해서 상당히 부담스러워졌 다- 지금은 잔물결만 은은히 일 어나는 수면 위로 붉은빛이 번져
있었다.
"그래서 더 불안합니다.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건지."
옆에서 땀을 흘리며 검술 훈련 을 하고 있던 카시아가 자연스레 대화에 참여했다. 나는 서늘하게 눈빛을 가라앉혔다.
"우리가 경계를 풀기를 기다리 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긴장을 놓아선 안 되겠죠. 병사들의 훈련 은 잘 되고 있습니까?"
두 대재앙의 습성과 행동 방식, 약점까지 모든 걸 그러모아 짠 훈 련 계획표대로 병사들의 훈련을 주도하고 있는 건 세레논과 카시 아였다.
내가 훈련관까지 맡을 시간은 안 되어 두 사람에게 맡겼는데, 두 사람은 기대 이상으로 잘해 주 고 있었다.
"시간이 촉박해 속성으로 하고 있는데 따라오질 못하더군요."
"카시아 경은 빨라도 너무 빠릅 니다. 우린 그걸 속성이 아니라
폭주기관차라고 말합니다."
허나 둘 사이에서 훈련에 대한 의견 마찰이 있는지 아옹다옹할 때가 잦았다. 이곳에 파견 온 동 안 율리안과 카시아, 세레논은 정 석적으로 친해지진 않았지만 끈끈 히 정이 든 것 같았다.
"그만하고 이만 들어갑시다. 훈 련도 과하게 하면 안 좋습니다."
"하루 9시간 훈련하시는 지휘관 님이 하실 말씀은 아닐 텐데요."
"......전 소드 마스터잖습니까."
"허, 소드 마스터가 권력......이
긴 하죠. 할 말 없게 만드시는군 요."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으며 셋이 서 막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였다.
"지, 지휘관님!"
등 뒤로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병사가 달려왔다. 강 쪽을 망보고 있던 병사였다. 나는 순식간에 얼 굴을 굳혔다.
"무슨 일이지?"
숨을 헉헉 몰아쉬는 병사를 재 촉하자, 그가 말을 이었다.
"북부군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 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붉던 노을이 잦아들고 저녁 어스름이 하늘을 덮었다. 기 온은 서늘해졌고, 주위는 점점 어 두워 졌다.
그들을 위한 밤이 오고 있었다.
"......당장 유니스 사령관에게 알리고 전군 소집령을 내려라!"
"네, 네!"
허둥거리던 병사가 막사 쪽으로 달려갔다. 잠시 시선을 교환한 우 리 셋은 짠 것처럼 동시에 강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탁.
도착한 나는 굳은 표정으로 강 의 표면을 내려다보았다.
쩌저적.
내가 당장 오늘 아침에 깨뜨렸 던 강이 서서히 얼고 있었다.
'끽해야 살얼음 정도로 얼어 있 었을 텐데...... 그걸 얼릴 각오를 하다니 단단히 각오한 모양이군.'
강 전체를 얼리려면 대마법사 정도는 와야 하건만. 그들은 마법 사들을 갈아서라도 오늘 결판을 내려는 것 같았다.
人、己 르 -- o •
우리 병사들이 빠르게 소집되고 유니스가 달려와 내 곁에 설 때, 나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전군, 출전을 준비하라."
전쟁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