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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1화 (1/472)

<천검지애 1화>

1화. 서(序)

“어떠냐?”

“잠시 놀라신 것뿐입니다. 한잠 주무시고 나면 괜찮아지실 것입니다.”

담무룡은 담수련의 이마에 손을 한번 대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보살피고 있거라.”

“예!”

* * *

“어찌할까요?”

담무룡이 밖으로 나오자, 시립을 한 채 기다리고 있던 검은 마의를 입은 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놈들인지는 알아냈느냐?”

“몰락한 남궁세가의 잔당들이었습니다.”

“남궁세가…… 그놈들이 감히!”

담무룡의 몸에서 섬뜩한 살기가 뻗어 나왔다.

“천라지망을 펼쳐 놨습니다. 절대로 도망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조리 색출해서 죽여라.”

“예!”

검은 마의를 입은 자가 짤막하게 복명하고 떠나자…….

“종리화!”

담무룡이 입을 열었다.

“예!”

그러자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여인 한 명이 앞에 나타났다.

“아무래도 네가 직접 수련이를 돌봐야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아이의 옆을 떠나지 마라. 내 명이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이제부터 네가 수련이의 유모다.”

“……가주님, 저는 혼인도 하지 않았는데, 젖이 어디 있다고 유모를 합니까?”

종리화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말했다.

“수련이 나이가 이미 네 살이다. 젖은 필요 없지 않느냐?”

“그래도 제가 명색이…….”

“알아. 하지만 지금 내가 믿을 사람이 너밖에 없다. 부탁이니까 거절하지 마라.”

종리화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의 주군인 담무룡이 부탁이라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혈의나찰이라 불리며 무림인들에게는 공포의 마녀로 통하는 그녀에게, 유모는 정말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래, 아기씨라면…… 한번 해 보지, 뭐!’

어차피 담수련을 예뻐하던 그녀였던지라 못할 것은 없었다. 다만 가만히 있지 못하는 그녀의 성격에, 어린 여아를 돌보며 집 안에만 박혀 있는 일을 견딜 수 있을지는 스스로도 장담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종리화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담수련이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가자, 무복을 입은 자가 담무룡의 앞에 나타났다.

담무룡의 호위대장인 가등우였다.

“호위들은 어찌할까요?”

“그놈들은 모두 죽여라. 감히 수련이를 놀라게 한 것만으로도 죽을죄를 지은 놈들이다. 다만 고통은 주지 마라.”

“예!”

단지 호위를 하다가 보호하던 사람이 놀랐다는 이유로 모두 죽인다는 것은 사실 너무한 일이었지만, 가등우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기씨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안에서 담수련을 돌보던 의녀가 뛰어나오더니 담무룡에게 급히 말했다. 그러자 담무룡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버지…….”

“그래, 아버지 여기 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호위들을 다 죽이라고 명했던 담무룡은, 담수련 앞에서는 한없이 자상한 아버지로 변해 있었다.

이제 겨우 네 살인 담수련은 커다란 눈으로 담무룡을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죽을 뻔한 위기를 겪은 아이치고는 무척 의젓했다.

“아버지, 저를 구해 준 오빠는 어디 있어요?”

담무룡은 담수련의 말을 듣자 눈에 기광이 나타났다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수련아, 네가 오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수운이밖에 없다.”

담무룡의 말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몸이 경직됐다. 이런 경우 담수련이 오빠라 칭한 아이는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았다.

“아버지! 그 오빠 괜찮아요?”

다시 오빠라고 하는 담수련을 쳐다본 담무룡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히 괜찮다.”

“만나고 싶어요.”

“그런 천한 아이를 너와 만나게 해 줄 수는 없다.”

“아버지, 보은을 받은 상대에게 인사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무지 네 살 아이라고는 믿기 힘든 어른스러운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하나 이미 그녀에 대해 다 알고 있는 듯, 이 모습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의 뜻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딸아이에게 담무룡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양보가 없는 그였지만, 그가 가장 사랑했던 아내를 쏙 빼닮은 담수련에게만은 한없이 약한 담무룡이었다.

“좋다. 하지만 반각만이다.”

* * *

“이름이 무엇이냐?”

담무룡이 태사의에 앉아 있고, 그 앞에는 몸에 피를 덕지덕지 묻힌 거지 소년 하나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악불군? 흠! 막돼먹은 천민의 자식은 아닌 모양이구나. 몇 살이냐?”

“열 살입니다.”

잠시 악불군의 얼굴을 뚫어질 듯 쳐다보던 담무룡이 다시 물었다.

“네가 우리 애를 구해 준 것은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있다. 무공도 모르는 네가 그 아이를 어떻게 구할 수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겠느냐?”

“먼저 어떻게 만났는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머님께서 많이 아프셨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전부터 과일 한 번 먹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모은 돈으로 어제 조그만 과일 하나를 사 가지고 집으로 가던 중, 그것을 뺏으려고 하는 아이들을 만나서 맞고 있었습니다…….”

악불군이 한 달 동안 일해서 산 과일은 겨우 사과 한 알이었다.

열 살 아이가 들고 가는 사과는 거지들에게 당연히 먹잇감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악불군이 사과를 안고 버티자 집단 폭행까지 한 것이다.

악불군이 무차별 맞고 있던 그곳에, 호위 무사가 겹겹으로 둘러싼 가마 하나가 지나고 있었다.

그들을 때리던 거지들은 가마를 보자 급히 도망쳤다.

피투성이가 되어 일어나던 악불군은 완전히 부서지고 흙투성이가 된 사과를 보고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때 창문을 통해 자신을 보던 너무나도 귀여운 여아가 악불군에게 이리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무사들이 막았지만 여아는 그러지 말라고 한 후, 가까이 온 악불군의 손에 과일을 여러 개 올려 주고는 배시시 웃었다.

악불군에게 그녀는 실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였다.

담수련에 대해서 잘 아는 담무룡은 악불군의 말에 그럴 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머님께서는 제가 가져온 과일을 먹으시고는 ‘맛있구나.’라는 말을 하시고는 미소를 지으시면서 돌아가셨습니다. 태어나서 어머님께서 그런 미소를 짓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서두가 길다. 내가 물은 말에나 답해라.”

악불군에게는 평생을 잊지 못할 너무나도 큰 사건이자 은혜였지만 담무룡에게는 하찮은 일에 불과했다.

“어머님 걱정에 제가 아가씨께 감사의 인사도 못 하고 온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려고 상국사로 가다가, 우연히 많은 무사들이 상국사를 포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호위 무사들도 발견 못한 자들을 무공도 모르는 네가 알아챘다는 말이냐?”

“전 상국사에서 시동으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과 아닌 사람들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고, 전부 무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담무룡은 말하는 악불군의 눈을 또렷이 주시하며 물었다. 그와 같은 고수가 쳐다보면 여간한 무인들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어린 악불군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이어가고 있었다.

‘특이한 데가 있는 놈이군…….’

담무룡은 피식 미소를 지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상국사에서는 거지들이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에 안으로 통하는 개구멍이 여럿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통해 안으로 급히 들어갔는데, 이미 무인들이 공격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운이 좋았는지 아가씨께서 제가 있는 쪽으로 피신을 해 오셨습니다.”

담무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에 일어난 일은 호위 무사에게 들어 다 알고 있었다.

“네가 수련이를 숨기고는 소리를 치면서 그들을 유인했다던데,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했느냐?”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면서 제게 그러셨습니다.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갚아라.’ 아가씨의 자비로운 마음 덕에 제가 구함을 받았고, 어머니께서 편안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런 은혜를 갚는 일인데 죽음을 어찌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죽어도 슬퍼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담무룡의 얼굴에 의아함이 나타났다.

담수련이 한 일은 맞고 있는 악불군을 구해 주고, 가는 동안 먹을 과일 조각 몇 알을 쥐어 준 것이었다. 그것은 그냥 지나가는 거지에게 동냥 몇 푼 한 것과 대동소이했다.

그런데 악불군은 그 사소한 행동을 구명의 은인이라도 되는 듯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생을 권력과 부를 한 손에 거머쥔 채 살아온 그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원하는 것이 있느냐? 돈이 필요하면 돈을 줄 것이고, 힘이 필요하다면 힘을 줄 것이다.”

담무룡의 말에 잠시 대답을 못하던 악불군은 뭔가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부모님께서도 다 돌아가셨고, 이제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만약 허락해 주신다면 아가씨를 평생 보필하며 종으로 살고 싶습니다.”

“수련이를 평생 보필하겠다고?”

담수련을 세상에서 가장 귀한 여인을 만들려는 생각을 가진 담무룡에게 악불군의 청은 절대 들어줄 수 없는 것이었다.

여인인 그녀에게 남자 호위를 붙여 놓는 것은 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단칼에 거절할 것으로 예상했던 담무룡은, 악불군을 자세히 주시하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이리 가까이 와 보거라.”

“예.”

악불군이 무릎걸음으로 가까이 오자 담무룡은 먼저 그의 맥을 잡았다. 그리고 곧 그의 몸 이곳저곳을 만지기 시작했다.

‘무공은 전혀 배운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신체 조건은 아주 좋군.’

고개를 끄덕인 담무룡은, 이번에는 악불군의 얼굴을 돌려보더니 손으로 옆과 위 심지어 뒤통수까지 전부 살폈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이채가 나타났다.

“수련이의 근접 경호 자리는 아주 위험하다. 수련이가 다쳐도 넌 죽고, 수련이가 너를 싫어해도 죽을 수 있다. 그래도 하겠느냐?”

“죽고 살고는 하늘의 뜻이라고 아버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재미있는 놈이군. 수련이를 호위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상당히 강한 무공을 익혀야 한다. 하나 그러기 위해선, 오히려 죽고 싶을 정도로 큰 고통을 받을 텐데?”

“어떤 고통도 참아 낼 자신이 있습니다.”

담무룡은 미묘한 미소를 지며 말했다.

“좋다. 네 소원이 정녕 그렇다면 기회는 한 번 주지. 단,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는 생각 따위는 하지 마라. 만약 허튼 생각을 했다가 걸리면 죽느니보다 못한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담무룡이 하는 말의 뜻을 알아듣기에는 악불군의 나이가 어렸다.

“아버님께서 은혜를 잊으면 짐승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제 목숨을 바쳐 아가씨를 보호하겠습니다.”

악불군이 머리를 땅에 대며 커다랗게 외치자 담무룡은 천장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 아이를 데려가서 깨끗이 씻기고 수련이를 만나게 해 줘라.”

그러자 천장에서 중년인 하나가 나타나더니 악불군을 데리고 사라졌다.

악불군을 중년인이 데리고 나가자마자, 그 옆에 서 있던 학창의를 쓴 청수하게 생긴 중년인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주군, 근본도 모르는 아이에게 어찌 천금 같으신 아기씨를 보필하게 하시는지요. 거기다 남자 아이이옵니다.”

담무룡의 최측근이자 군사인 문창현이었다.

그는 담무룡이 담수련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었다. 한데 저런 결정을 내리다니…….

“의아하느냐?”

“비록 열 살밖에 안 되었다고는 하나 의심은 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다 천민처럼 살아온 아이치고는 말하는 것이 너무 의젓하지 않습니까?”

문창현의 말에 담무룡은 씨익 미소를 지며 말했다.

“그렇게 따지면 수련이도 네 살 아이는 아니지.”

“아가씨께서는 오음절맥 때문에 천재로 태어나셨습니다. 저 아이와는 다르지요.”

“방금 저 아이가 말한, 은혜를 잊으면 짐승과 같다고 했다는 말이 신선하지 않더냐?”

“물론 이 혼란의 시기에 저런 아이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문창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담무룡은 말을 이어 갔다.

“그렇지. 그리고 무엇보다 저 아이, 신의현맥(信義泫脈)을 타고났더구나. 어차피 수련이에게도 근접 경호를 할 남자 호위가 하나는 필요했다. 아이가 너무 예뻐서 남자 놈들을 붙여 놓을 수가 없었는데, 신의현맥을 가진 아이라면 누구보다도 믿을 만하지 않겠느냐?”

“신의현맥입니까? 당금 이런 혼란의 시기에도 신의현맥을 가진 아이가 있을 줄은 몰랐군요.”

문창현은 놀란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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