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2화 (2/472)

<천검지애 2화>

2화. 신의현맥(1)

신의현맥이란 강직한 성격을 타고난 아이에게 나타나는 특이한 혈맥으로, 저 옛날 삼국시대의 관우가 신의현맥이었단 말도 있었다. 신의현맥인 사람은 절대로 배신을 하지 않고 주인에게 죽음으로 충성한다고 했다.

그러나 신의현맥은 타고나는 것은 아니었다.

자라면서 성격이 형성되어 가는 동안 항상 올바른 생각을 하며 신의를 목숨같이 여기는 생활을 하다 보면 저절로 그 맥이 발달하는 것이다.

악불군의 몸에서 신의현맥을 발견한 담무룡이 상당히 놀란 것도, 악불군의 나이가 신의현맥이 나타나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신의현맥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그만큼 악불군의 성격이 강직하다는 말이었으니 한번 믿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래도 오늘 처음 보았고 신분도 아직 명확하지 않은데, 벌써 아가씨를 뵐 수 있게 하신 것은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좀 의외이긴 하군.”

“예?”

마치 삼자를 칭하듯 말하는 담무룡의 말에 문창현은 의아한 듯 쳐다보았다.

하나 담무룡의 시선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담무룡은 지금, 불굴의 의지를 담고 있었던 악불군의 눈을 생각하고 있었다.

“됐다. 수련이가 자신을 구해 준 은인이라며 꼭 만나고 싶다고 내게 부탁을 했다. 종리화가 있으니 확실하게 관찰을 할 게다. 그리고 뭔가 특별한 아이 같단 말이야…….”

문창현은 이해가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다 싶은 일에는 누구의 설득도 불가능한 담무룡이었지만, 당수련의 부탁만은 다 들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후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무공을 가르쳐 봐야지. 만약 진전이 느리면 평생 먹고 살 정도의 돈을 들려 내보내거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네 말대로 비천하게 살아온 것 같은데, 내 앞에서 할 말도 다하고 말도 조리가 있어. 확실한 것이 좋을 것 같으니, 네가 직접 저 아이의 부모는 어떤 자들이었고 그동안 어떻게 자라왔는지 자세히 알아보아라.”

“알겠습니다!”

* * *

“이름이 뭐야?”

악불군이 들어서자 종리화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눈을 맞췄다.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너 아주 예쁘게 생겼다? 크면 아주 미남이 되겠는데?”

종리화의 말마따나, 목욕을 하고 단지 깨끗한 옷을 입었을 뿐이었지만 악불군의 모습은 아까와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악불군의 대답을 들은 종리화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기씨께서 너를 꼭 보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가주님께서 허락을 한 모양인데, 조심해야 할 게다.”

“어떤 조심을 하라는 것인지 알려 주시면 조심하겠습니다.”

종리화의 말에 악불군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물었다.

“얼굴만 예쁜 줄 알았는데 머리도 똑똑하네?”

종리화는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 갔다.

“이곳은 대단히 무서운 곳이야. 그러니 네가 아기씨 앞에서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아기씨를 만나고 나가는 순간 죽을 수도 있다.”

“제가 실수를 하지 않도록 가르침을 주십시오.”

이어지는 악불군의 말에 종리화는 피식 웃었다.

“너, 열 살이라고 했지?”

“예.”

종리화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주인이나 호위나 똑같이 애 늙은이라 잘 통하기는 하겠다. 말 잘 들어.”

“예!”

“우선 아기씨를 보면 오체투지를 하고 머리를 바닥에 대고 있어라. 아기씨의 명이 있기 전에는 절대 먼저 아기씨의 존안을 보지 마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기씨가 뭐든 물으면 짧게 그리고 똑똑히 말하거라.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럼 따라와.”

종리화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 악불군은 침대에 앉아 있는 너무나도 귀여운 여아를 보자 급히 오체투지를 하고는 머리를 바닥에 댔다.

“오…….”

악불군을 부르려던 담수련은 급히 입을 닫았다.

유모가 된 종리화가 그녀가 악불군을 만나면 절대 오빠라고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물론 말도 반말로 해야 한다고 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똑똑한 담수련은 그 말에 담긴 진심을 깨닫고 바로 따랐다.

종리화가 담수련에게 조언한 이유는, 그녀가 계속 오빠라고 칭하면 악불군이 나가자마자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름이 뭐야?”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저를 아는 사람들은 소군이라고 불렀습니다.”

“소군? 이름이 부르기가 참 좋은 것 같아. 그리고…… 고마워.”

악불군은 담수련의 말에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저야말로 아기씨 덕에 어머님을 편하게 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어머님이 어디 갔는데?”

“멀리 가셨습니다.”

“그럼 이제 못 봐? 나도 엄마 못 보는데…….”

똑똑한 담수련은 곧 그 말의 의미를 알았는지 금방 눈에 눈물을 글썽였다.

악불군은 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만으로도 가슴이 한 없이 벅차올랐다. 그를 진정으로 가엾어 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이 계속 머리를 바닥에 대고 있자 담수련이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

“고개 들어 봐.”

악불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담수련은 악불군의 얼굴을 보자 미소를 지었다.

“그럼 오빠…….”

다시 오빠라고 하려던 담수련은 깜짝 놀란 듯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는지 악불군도 살짝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럼 소군은 이제 어디 가?”

“제가 가주님께 아기씨를 보필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기씨께서 받아만 주신다면 아기씨의 종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럼 소군이 수련이랑 같이 살 수 있어?”

“아기씨만 허락하신다면, 제가 죽기 전까지는 아기씨 옆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악불군의 대답에 담수련의 얼굴에는 기쁜 미소가 나타났다. 그러자 악불군도 씨익 미소를 지며 화답했다.

“인사를 했으니 이만 가 보거라. 아직 아가씨의 몸이 불편하시다.”

종리화가 나섰다. 담수련이 피곤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 괜찮아.”

담수련은 급히 괜찮다고 말했지만, 종리화의 눈짓에 악불군은 허리를 굽혀 예를 취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런 뒤 밖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교관을 따라 어디론가 걸어갔다.

“아기씨는 주군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다. 저런 분을 모시려면 네가 강해져야 한다. 이제부터 지옥이 기다릴 것이다. 각오는 되어 있느냐?”

교관의 말에 악불군은 입을 꾹 닫고는 고개만 꾸벅했다.

* * *

“주군, 악불군에 대한 보고서가 들어왔습니다.”

뭔가 고심하듯 생각에 잠겨 있던 담무룡은 문창현의 말에 고개를 돌리며 반문했다.

“어떻더냐?”

“삼대를 절강에서 살아왔습니다. 증조할아버지인 악도관은 전 황조의 절강성 판관까지 지낼 정도로 명문이었지만 황조가 바뀌면서 완전 몰락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글선생을 하며 간신히 생활은 했는데, 삼 년 전 역병 때 모두 죽고 어머니와 악불군만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그건 됐고, 악불군의 자라 온 과정은 어떻더냐?”

“세 살 때 사서삼경을 뗄 정도로 기재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아직까지도 주변에서 칭찬이 자자하더군요. 대단한 효자로, 온갖 굳은 일을 하면서 어머니를 먹여 살렸다고 합니다.”

“고래(古來)로 충신들은 거의 다 효자지. 됐다, 그 정도면 우선 믿을 수 있겠구나.”

“저도 그렇게 판단됩니다. 그런데 주군.”

“왜?”

“제가 감히 주군의 마음까지 헤아릴 수는 없지만…… 무슨 고민이 있으신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제게 말해 주실 수 없으십니까?”

“예전에도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지?”

“예.”

“그때 내가 뭐랬느냐?”

“아무 일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나가 보거라.”

“예.”

문창현은 어쩔 수 없는지 고개를 숙이고는 나갔다.

그러자 다시 담무룡의 얼굴에는 고심의 표정이 나타났다. 그리고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도대체 뭐가 잘못됐기에 이십 년이 넘도록 풀어내지를 못한다는 말인가…….’

* * *

“소군!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나와 봐.”

여섯 살이 된 담수련은 따뜻한 봄볕 속에서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유난히 꽃을 좋아하는 그녀를 위하여 담무룡이 신경을 써서 만들어 준 정원에는 갖가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잠시 정원을 거닐던 그녀는 한쪽을 보며 악불군을 불렀다.

“예! 아기씨.”

그러자 대답과 함께 악불군이 꽃 속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측근 비밀호위는 얼굴을 보이지 않고 숨어서 호위를 해야 한다는 교육에 의거, 악불군은 언제나 숨어서 담수련의 주위를 맴돌았다.

하지만 무척이나 어설퍼서 담수련이 언제든지 악불군의 위치를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꽃 예쁘지? 이리 와 봐.”

예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악불군을 부른 담수련은 꽃 몇 가닥을 따더니 악불군의 귀에 꽂아 주었다.

“이렇게 조금씩은 따 주어야 더 잘 자라. 그래도 이렇게 빨리 사라지는 것은 슬퍼. 소군이가 귀에 꽂고 많이 사랑해 주다가 시들면 땅에 묻어 줘.”

악불군은 담수련의 말에, 자신의 귀에 꽂혀 있는 꽃에 손을 한 번 대더니 속으로 중얼거렸다.

‘예, 듬뿍 사랑하다가 정성 들여 땅에 묻어 주겠습니다.’

“소군이 언제 가야 해?”

담수련은 하늘을 살짝 보며 아쉬운 듯 물었다.

악불군과 담수련이 같이 있을 시간은 한 달에 열 시진이 채 안 되었다.

그나마도 주종간의 충성과 신의는 어릴 때 맺어질수록 더욱 돈독하고 자주 얼굴을 보아야 한다는 담무룡의 지론 때문에 주어진 시간이었다.

악불군이 어린 나이로는 견디기 힘든 혹독한 수련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담수련을 만나는 이 짧은 시간이었다.

“아직은 시간이 좀 있습니다.”

* * *

“어떠냐?”

담수련과 악불군이 정원에서 얘기하는 장면을 유심히 보고 있던 종리화의 뒤로 담무룡이 나타나더니 물었다.

“주군!”

종리화가 깜짝 놀라 예를 갖추려 하자 담무룡이 손을 저으며 다시 말했다.

“저 아이, 어떤 것 같으냔 말이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기씨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합니다. 다만…….”

“다만……?”

“너무 친하게 지내시니 혹시라도…… 그저 노파심입니다.”

“걱정 마라. 남자 놈이니 수련이를 보고 연모의 마음 같은 것이 생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수련이를 보호할 것이다. 도만 넘지 않으면 돼.”

종리화는 모르지만 담무룡도 나름대로 악불군에 대해 감시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선을 넘겨 행동한다면 그 순간 악불군을 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담수련에 대한 악불군의 충성은 믿을 만했다.

담무룡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담수련은 악불군과 함께 있는 것이 즐겁기만 한 듯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아기씨께서 소군을 만날 때 이외에는 거의 웃지 않는다는 것을 가주님께서는 알고 계시려나…….’

담수련이 전혀 웃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짜로 즐거워서 웃는 것과 그냥 보이는 미소와의 차이 정도는 종리화도 알 수 있었다.

* * *

이른 아침, 담수련이 아프다는 말에 담무룡이 정환후와 함께 급히 담수련의 방으로 달려갔다.

정환후는 잠룡세가의 전속 의원으로, 절강성에서는 신의로 불리는 자였다.

“어떤가?”

정환후의 진맥이 끝나자 담무룡이 급히 물었다.

“제가 약을 지어 드릴 것이니 그것을 먹으면 차도가 있을 것입니다.”

“오, 그래.”

정환후의 말에 담무룡은 안심한 듯 딱딱한 표정을 풀었다.

“그런데…….”

“뭔데 말을 멈춰?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게.”

“오음절맥의 음기가 점점 육체를 잠식하고 계십니다. 이러다가는 십육 세 전에 돌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무슨 소리야? 삼십까지는 살 수 있다고 했잖은가?”

담무룡이 어불성설이라는 듯 소리를 질렀다.

“저도 이렇게 급속하게 음기가 활성화될지는 몰랐습니다.”

“무조건 생명을 더 늘릴 방법을 찾게. 최소한 수련이가 좋은 사람 만나 혼인하고 행복한 생활은 경험한 뒤에 죽어야 하지 않겠나?”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그에게도 아버지로서의 사랑만은 어쩔 수 없는지, 강압적인 말투가 어느새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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