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화>
3화. 신의현맥(2)
정환후는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가주님, 천년설삼을 달인 물을 다시 드시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공 수련도 다시 시작하십시오.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오음절맥을 고치는 약으로는 극양의 기를 가진 만년설삼밖에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만년설삼은 무공을 배운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천고의 영약으로, 실지로 존재하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귀물(貴物)이었다.
그래서 의원들은 대용으로 천년설삼이나 백년설삼을 사용했다. 하지만 천년설삼은 물론 백년설삼도 원체 구하기 어려워, 오음절맥에 걸린 여자들은 속절없이 열 살 전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담무룡은 수년을 수소문하여, 만금을 주고 천년설삼 다섯 뿌리를 구하는 데 성공했었다.
정환후는 천년설삼을 수백 조각으로 나눈 후 조금씩 달여 담수련에게 매일 마시게 하면 음기와 중화를 시켜 생명을 최대한 늘일 수 있다고 했다.
문제는 담수련이었다.
천년설삼을 끓인 물만 마시면 무척이나 괴로워했고 심지어 토하기까지 했다. 정환후는 담수련의 체력이 너무 약해서 그런 것이니 무공을 가르치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았다.
조금만 수련을 하면 음기가 차올라 금방 지쳤고 온몸의 힘이 빠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견디지 못한 담수련이 모든 것을 거부하면서, 담무룡은 어쩔 수 없이 천년설삼액을 마시는 것과 무공 수련을 멈추게 하고 말았다.
그 역시 그녀가 너무 괴로워하는 것을 보기 힘들어서였다.
그나마 지난 기간 먹은 덕분에 지금까지 버틴 것이었는데, 지금 정환후는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수련이가 너무 힘들어 하네.”
“아가씨의 의지가 관건입니다. 참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아가씨의 생명을 늘릴 수 있습니다.”
* * *
“주군, 죄송합니다. 제가 아기씨를 좀 더 잘 보살폈어야 하는데…….”
담수련이 잠든 것을 보고 밖으로 나온 종리화는, 정원에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담무룡의 뒤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네 잘못이 아니다.”
담무룡은 무겁게 답을 하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주군,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담수련에게 천년설삼액을 마시게 하고 무공 수련을 시킬 방법이 뭐가 있을까 생각중이다.”
“아가씨께서 너무 힘들어 하십니다. 근래에는 액을 보기만 해도 토할 것 같다고 하실 정도입니다.”
“힘들어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열여섯 전에 죽는다고 하지 않느냐? 난 수련이를 그렇게 어린 나이에 죽게 할 수 없다.”
담무룡의 말에 종리화도 괴로운 듯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때 갑자기 그녀의 머리에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주군,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 있습니다.”
“정말이냐?”
“예.”
“무슨 방법이냐?”
“제가 성공하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 * *
오관(五關)에서 만난 악불군의 교두는 모두 네 명이었다.
권법을 사용하는 도정, 검을 가르치는 검무, 신법과 보법을 담당한 무영, 그리고 호위에게 필요한 은신술과 진법, 추적 등을 가르치는 잠밀이었다.
모두 담무룡이 신임하는 측근 심복으로, 악불군이 사관(四關)을 아주 높은 점수로 통과하자 담무룡이 직접 붙여 준 자들이었다.
이는 사실 대단한 특혜였다.
물론 그들의 수련 방식은 실로 무식하다 할 정도로 강력하고 무시무시했다.
도정은 대부분 비무를 통해 권법을 가르쳤는데, 어찌나 실전 같이 가르치는지 수련이 끝나면 아예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심지어 내상을 입고 피를 토하는 경우도 여러 차례 있을 정도였다.
검무 역시 조금도 사정을 봐 주지 않았는데, 다행인 것은 진검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수련이 간신히 끝나고 자신의 방에 도착한 악불군은 마치 기절하듯이 엎어지더니 반 시진이 넘게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언뜻 보면 죽은 듯 보일 정도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열리며 도정과 함께 종리화가 들어왔다.
“아직 나이도 어린데 너무 심한 것 아니냐?”
쓰러진 악불군의 등을 살핀 종리화는 아미를 찌푸리며 말했다. 이미 심하게 멍이 든 부위에 또 타격을 받아 온몸의 피부가 까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저도 심하다 생각해 수련의 강도를 좀 줄여 줄까 물었습니다. 그런데 더 강하게 해도 괜찮다고 그러더군요. 저도 살다 살다 이렇게 지독한 놈은 처음입니다.”
종리화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악불군의 등에 두 손바닥을 갖다 댔다. 그러자 뜨거운 기가 요혈을 통해 악불군의 몸을 들어갔다.
그렇게 반각쯤 지났을까…….
악불군이 일어나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종리화를 보며 물었다.
“단주님께서 어떻게?”
“정신이 좀 드느냐?”
“오늘은 이상하게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몸도 괜찮고요.”
악불군은 종리화가 자신을 위해 내공으로 몸 안의 상처를 치료해 준 것은 느끼지 못한 듯했다.
“그럼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너라.”
“제가 나갈 날은 아직 이틀 더 있어야 합니다.”
“아기씨께 일이 생겼다.”
“예?”
담수련에게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듣자 악불군은 급히 옷장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무관을 통과하는 자들 중 자신의 방에 옷장이 있는 것도 그만이 받는 특혜 중 하나였다. 담수련을 만나러 가면서 지저분하게 가지 말라는 배려였다.
“아가씨께 안 좋은 일이 생겼습니까?”
담수련에 대한 걱정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종리화의 뒤를 따라온 악불군은, 담수련의 방 앞에 이르러 종리화가 멈추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내가 네게 아주 중요한 임무를 맡기겠다.”
“아기씨를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목숨을 걸고 완수하겠습니다.”
“목숨까지 걸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기씨의 목숨이 달린 일이 될 수도 있다.”
담수련의 목숨이 걸렸다는 말에 악불군은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종리화는 악불군의 바짝 긴장한 얼굴을 보며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지금 보이는 악불군의 얼굴은 마치 자신이 죽을 일이 걸린 것처럼 절실해 보여서였다.
‘얘를 진짜 아기씨 옆에 계속 두어도 될지 모르겠네?’
종리화는 뭔가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여섯 살과 열두 살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 나갔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아기씨께는 지병이 있다.”
종리화가 생각해 낸 방법은 바로 악불군에게 담수련을 설득해 달라는 것이었다.
터무니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런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은 담수련이 악불군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럼 아기씨께 그 약을 매일 아침 먹고 무공 수련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그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 약은 양기를 지닌 약이고, 아기씨는 음기가 강해 먹는 즉시 충돌을 일으킨다. 아기씨께서 상당히 괴롭다는 말이다. 거기다 오음절맥 때문에 신체에 힘이 거의 없어서 수련을 받는 것도 힘들다. 아기씨께서 그 모든 것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의지를 네가 북돋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악불군은 알았다는 듯이 입술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옆에 있을 거다. 하지만 나는 없는 사람 취급하고,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사용해서 아기씨를 설득해라. 설득만 하면 어떤 말도 문제 삼지 않겠다.”
“알겠습니다.”
* * *
가주전에 마련된 비밀 연무장.
이곳은 오로지 담무룡만 알고 있는 곳이었다.
그는 이십 년이 넘도록 하루에 최소한 한 시진은 이곳에서 무공 수련을 해 왔다.
“도대체 이게 뭐야? 왜 안 되는 거냐!”
책자를 들춰 가며 이상한 자세를 계속 취하던 담무룡은 분노한 듯 소리쳤다.
그는 책자를 들어 내팽개칠 듯 자세를 잡았지만 결국 다시 내려놓고 말았다.
이십오 년 전 야심만만하던 그는 천하를 오시하며 명성을 높여 나가던 중,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천하에서 가장 큰 세력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그리고 그를 도와 커다란 계획을 세웠다.
남송의 멸망을 끝으로 중원을 완벽하게 점령하는 데 성공한 대원 제국이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무림의 해체였다.
무림을 그냥 두고 중원을 정복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필두로 한 무림은 강력하게 저항했지만, 대원 제국의 강력한 군대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결국 거의 모든 문파가 지하로 숨어 반원 세력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일 갑자가 지났다.
하지만 원나라는 여전히 중원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가 없었다.
천륭검가 때문이었다.
대원 제국에서는 여러 차례 그들을 치려고 했지만, 천하제일 고수인 구문황이 이끄는 천륭검가를 무너뜨릴 수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구문황이 아무리 천하제일 고수라 해도 나이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드디어 그가 죽은 것이다.
대원 제국의 감찰 조직인 어사대와 중원 무림을 감시하는 어찰단의 총책인 대공은 다섯 명의 조력자를 포섭하여 천륭검가에 대한 공격을 계획했다.
‘내가 판단을 잘못했어…….’
담무룡은 고심하듯 자리에 털썩 앉았다.
* * *
종리화의 뒤를 따라 담수련의 방에 들어선 악불군의 얼굴이 확 변했다.
담수련이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불을 덮고 있었지만 너무 작았다.
“아기씨, 소군 왔습니다.”
순간 담수련이 힘들게 눈을 떴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었다.
“소군, 왔어?”
“예, 아기씨 많이 아프십니까?”
그렇게 고된 수련에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던 악불군의 눈에는 벌써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녀의 아픈 모습이 그를 더 아프게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많이 아프지는 않은데 힘이 없어. 소군이 왔으니까 같이 놀아야 하는데…….”
파리한 얼굴에 살짝 미소를 그린 담수련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악불군이 급히 제지하며 말했다.
“힘드신데 무리해서 일어나지 마십시오.”
“일어날 수 있어.”
“아기씨, 아기씨께서 아프시면 제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픕니다.”
촉촉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악불군의 모습에 담수련은 자신까지 가슴이 저려옴을 느꼈다.
“미안해…… 아파서.”
“아기씨께서 빨리 나으셔야, 같이 재미있게 놀 수 있지 않겠습니까?”
“빨리 나을 거야. 그래서 소군하고 같이 놀 거야.”
너무 똑똑해서 애늙은이라는 말까지 듣는 그녀였지만 결국 여섯 살 여아였다.
그녀에게 가장 귀에 솔깃한 말은 논다는 것이었다.
“아기씨께서 건강하셔야 제가 모시고 세상 구경도 할 수 있습니다.”
악불군은 언젠가 담수련이 세가 밖으로 나가 세상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한 말을 기억해 냈다.
“맞아, 나 건강해져서 소군하고 같이 세상 구경할 거야!”
“아기씨, 의원님께서 아기씨께서 건강해지시려면 설삼액을 매일 마시고 무공 수련을 해야 한다고 했답니다.”
“하지만 설삼액은 정말 마시기 싫은걸……. 그리고 무공 수련은 너무 힘들고.”
“아기씨, 저도 아기씨께 세상 구경을 시켜드리고 즐겁게 놀기 위해, 정말 힘들고 싫은 수련을 열심히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기씨께서 아프셔서 아무것도 못 한다면 제 노력이 모두 무용지물이 되지 않겠습니까?”
진정성을 가지고 말하는 악불군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던 담수련은, 뒤에 서 있는 종리화를 슬쩍 보더니 악불군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러자 악불군은 무릎걸음으로 그녀의 침상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평상시 같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종리화는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귀 대 봐.”
“귀요?”
악불군은 약간 당황한 듯 종리화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불군이 그녀의 입가에 귀를 갖다댔다.
“나 오빠 정말 좋아.”
담수련의 말에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것을 느낀 악불군은 머리를 바닥에 대며 말했다.
“저도 아기씨가 정말 좋습니다. 전 아기씨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유모.”
“예, 아기씨.”
“나, 설삼액도 마시고 무공 수련도 할게.”
담수련의 말에 종리화는 안심한 듯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녀의 한숨에는 뭔지 모를 염려도 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