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화>
4화. 아이들(1)
아침에 일어난 담무룡은 담수련이 천년설삼액을 마셨다는 보고에 한 걸음에 담수련의 처소로 달려왔다.
“주군, 오셨습니까?”
종리화가 맞자 담무룡은 급히 물었다.
“수련이가 천년설삼액을 마셨다고?”
“예, 처음에는 또 구토하고 싶고 배가 아프다고 칭얼대셨지만 꿋꿋하게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잠봉단 아이들과 함께 무공 수련도 받겠다고 하셨습니다.”
“역시 종리화야. 이러니까 내가 너를 가장 믿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수련이가 천년설삼액이라면 학을 뗐는데 어떻게 설득한 거냐?”
“주군, 같은 여자들끼리는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군께 말씀드려도 이해가 안 되실 겁니다.”
“종리화, 너 많이 변했구나?”
“뭐가 말입니까?”
“천하의 혈의나찰이 여섯 살짜리 아이랑 통한다 말하다니 말이다. 하하하-.”
담무룡의 말에 입술을 삐죽 내민 종리화가 따지듯 말했다.
“이게 전부 다 주군께서 저를 아기씨의 유모를 하라고 해서 생긴 일이잖아요? 그리고 아기씨 이따금 애기 같은 행동을 하기는 하지만, 생각하는 것은 절대 애기가 아닙니다.”
잠룡세가에서 담무룡에게 따지듯 말할 수 있는 단 한 명이 종리화였다.
씨익 웃은 담무룡이 다시 물었다.
“그럼 방법을 말해 주지 않겠다는 것이냐?”
담무룡의 말에 종리화는 대답없이 미소를 지며 자리를 비켰다.
“들어가서 아기씨를 만나 보십시오. 어제보다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담무룡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자신이 두 번이나 물었는데도 답을 주지 않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주군. 하지만 이 일은 모르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종리화는 악불군의 설득으로 담수련이 마음을 바꿨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잘못하면 악불군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의 귀한 천금이 천한 호위의 말에 마음을 바꿨다는 자체가 담무룡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었다.
* * *
“어찌하시겠습니까?”
문창현은 서찰 하나를 들고는 자세히 읽더니 고개를 들고는 담무룡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현 정세에서 이 혼인이 이루어진다면 이익과 손해가 동시에 나타날 것입니다. 하지만 손익 계산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계산을 하라고 너를 부른 것이다.”
문창현은 담무룡의 말에 입을 굳게 다물고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이내 곧 신중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아기씨, 나이가 이제 겨우 열네 살입니다. 좀 이르다는 생각이 좀 듭니다.”
“그러니까 화룡세가에서 약혼이라도 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본 가에 대한 다른 세가의 견제가 점점 심해지는 지금 상황에서 이 혼인을 승락하신다면 분명 당장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저희에게 화 공자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습니다.”
“화정무는 대단히 자랑을 하던데?”
“자랑만 할 뿐, 아직 그의 직접적인 활약은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만약 평범하다면 손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아기씨는 천하의 미인이 될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더 자라면 분명 경국지색의 미모를 뽐낼 것 입니다. 그렇다면 천하의 영웅이 될 청년들이 아기씨에게 몰려들 텐데, 너무 일찍 결정하는 것은 시기상조일 수도 있지요.”
문창현의 말을 듣던 담무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벌써 혼약을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러다가 다른 곳에 선수를 빼앗기면 그것도 문제가 아니겠느냐?”
“화 공자를 이곳으로 한번 오도록 요청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주군께서 직접 인물됨을 보시고 결정하시는 것이 가장 완벽할 것입니다.”
“화정무가 무척 아낀다고 들었는데, 그런 아들을 이곳으로 보낼까? 우리가 볼모로 잡을 수도 있단 걸 알 텐데?”
담무룡이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지금 철룡세가의 위세에 모든 세가가 눌려 있는 상황입니다.”
문창현의 말에 담무룡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것이 무슨 소리냐? 지금 내가 철장표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냐!”
문창현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말이 나간 후였다. 그는 급히 말을 이었다.
“주군께서 철가주를 두려워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황실을 등에 업고 있는 철룡세가의 위세가 나머지 세가를 압도하고 있는 것은 인정하셔야 합니다.”
담무룡은 정치적으로 밀리는 것까지 부인하고 싶지는 않은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화룡세가의 화가주도 지금 이 상황에서 뭔가 돌파구를 마련하고 싶어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내실 것으로 사료됩니다. 문제는 화룡세가에서 저희에게 매파를 보낸 것이 곧 다른 세가에 알려질 것이고, 곧이어 다른 세가에서 견제가 시작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현 무림을 지배하는 다섯 가문을 천하는 오룡(五龍)세가라고 칭했다. 천하를 다섯 개로 나누어 무림에서는 황제와 같은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그들이었다.
송이 망하고 원이 들어선 후 소위 무림인들이 자랑해 마지않던 구파일방과 무림 팔대세가는 처음에는 나름대로 원에 저항했다.
하지만 원의 강력한 군대 앞에 무림도 결국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천하인들에게 신인으로 추앙받던 구파일방과 팔대세가는 그 존재가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봉문을 당한 문파가 여섯이었고, 아예 멸문을 당한 곳도 네 곳이나 되었다.
개방 같은 경우는 끝까지 원에 맞서 싸우자는 쪽과 정치에 무림인이 간섭한 전례가 없었다며 현실을 인정하자는 쪽이 서로 싸우다가 북 개방과 남 개방으로 나뉘어, 지금도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물론 오룡세가 역시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특히 담무룡이 이끄는 잠룡세가는 다른 세가의 질시를 많이 받고 있었다. 그의 세력권인 절강성이 중원 전체에서 가장 부유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담수련을 납치하려는 자들의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담무룡이 담수련을 대단히 아낀다는 것은 이미 무림에 소문이 자자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부자로 이름난 잠룡세가의 천금은 고귀함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가장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한 것이었다.
더구나 담수련은 다른 세가의 여인과는 달리 무공이 약한 것도 그녀를 노리는 이유였다.
그런 탓일까, 이미 힘을 잃고 지하로 숨은 중원 무림인들의 납치 시도도 빈번했다.
현재는 원의 위세와 오룡세가의 힘에 눌려 있지만, 중원인들의 오룡세가에 대한 원한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특히 하북에 자리한 철룡세가보다도 나머지 세가를 더욱 미워했다.
철룡세가는 어차피 원의 쿠빌라이 칸의 혈육이 세운 곳이었지만, 나머지 네 곳은 같은 중원인이 세운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 * *
“후후후! 담무룡이 머리를 좀 썼구나. 추설붕,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잠룡세가의 담무룡의 친서를 받아 든 화룡세가의 화정무는 서찰을 다 읽고는 피식 웃으며 서찰을 추설붕에게 넘겼다.
추설붕은 화정무의 군사라 할 수 있는 학자였다.
평상시에는 화정무의 아들인 화우성의 글 사부이지만, 지금처럼 세가에 일이 생기면 군사로 변하곤 했다.
담수련과의 혼인도 그가 먼저 생각해 낸 것이었다.
“보내셔야 합니다. 그것도 빨리 보내셔야 합니다.”
서찰을 다 읽은 추설붕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유는?”
“소가주님을 보내지 않고는 어차피 이 혼인은 이루어지기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오룡세가에는 전부 아들이 하나씩 있습니다. 그런데 딸은 가주님의 천금이신 아기씨와 잠룡세가의 담수련, 그리고 철룡세가의 철상아 셋뿐입니다. 그리고 각 세가의 천금들이 혼인을 할 곳은 같은 오룡세가밖에 없습니다.”
화정무가 고개를 끄덕이자 추설붕이 말을 이어 갔다.
“그중 철룡세가는 원의 황족이라, 우리 말고도 혼인을 할 곳이 많습니다. 하지만 담수련이나 아기씨는 오룡세가의 공자들과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말이 나온 김에 이번 기회에 빨리 손을 써서 혼약이라도 맺어 놔야 합니다. 소가주님께서 담 소저를 잡는다면 우리의 아기씨는 다른 세가와 짝을 지울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본 세가는 두 곳의 세가와 혼인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화정무는 추설붕의 말을 듣자 곧 무슨 말인지를 깨달았다.
담무룡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그 딸이 자신의 아들과 혼인을 하면 담무룡의 아들은 오룡세가 내에서는 혼인을 할 처자가 없는 것이다.
물론 화룡세가에 딸이 있지만 이미 사돈 관계인 화성미를 며느리로 달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었고, 철룡세가의 가주인 철장표와 담무룡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 뜻은, 화정무 자신은 딸을 혼인시킬 곳이 두 곳이 남는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된다면 그의 화룡세가가 다른 세가를 압도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소가주님께서는 천하에 보기 드문 기재이십니다. 거기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관옥 같으시니, 담 가주께서도 소가주님을 보시면 마음을 굳히실 것입니다.”
“그렇지! 우성이가 내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세상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내 장담할 수 있지.”
말하는 화정무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운 빛이 나타났다.
* * *
“아기씨, 뭐 하십니까?”
그림을 그리고 있던 담수련은 갑자기 등 뒤에 나타난 악불군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기씨?”
악불군은 담수련이 대답이 없자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고는 놀라 다시 불렀다.
“나 이제 아기 아니라고 했지? 또다시 아기씨라고 하면 소군하고 말 안 할 거야.”
담수련이 삐쭉거리며 말했다. 어느덧 열두 살이 된 담수련은 그 아름다움이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요즘은 그녀가 웃으면 지나가던 하녀들까지도 잠시 멈춰 서서는 넋을 잃고 쳐다 볼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아가씨라고 하겠습니다. 아가씨!”
악불군이 호칭을 바꾸자 몸을 돌린 담수련이 미소를 짓더니 물었다.
“힘들지 않았어?”
잠룡세가에서는 무공 수련을 위한 여섯 개의 관문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관문을 통과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아서, 그중 지금까지 다섯 개의 관문을 통과한 무사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악불군이 얼마 전 다섯 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저 같은 놈이 그 정도에 힘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난 소군이 힘든 거 싫어.”
악불군은 담수련의 말을 듣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열여덟 살이 된 악불군에게, 담수련은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제가 빨리 강해져야 언제나 아가씨 곁에 있을 수가 있습니다.”
“소군이 언제나 내 옆에 있는 것은 정말 좋은데……. 여섯 번째 관문은 정말 어렵다던데?”
“꼭 빨리 통과해서 아가씨를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아가씨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아가씨께서도 지금처럼 건강하셔야 합니다.”
“나 하루도 빼 놓지 않고 설삼액 마시고 무공 수련도 열심히 하고 있어.”
“아주 잘하셨습니다. 전 아가씨가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악불군의 칭찬에 담수련은 기분이 좋은지 배시시 웃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다음에 오면 내가 소군한테 얼마나 강해졌는지 보여 줄 거야!”
“예! 기대하겠습니다.”
“그런데 육 관에 언제 들어가?”
“……저 오늘 들어갑니다. 육 관은 다른 관문과 달라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있을 정도의 무공을 익히기 전에는 나올 수 없다는 거 아시지요? 최대한 노력은 하겠지만, 상당 기간 아가씨를 못 볼지도 모르겠습니다.”
담수련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얼마나 걸리는데……?”
“…….”
악불군이 답을 못 하자 담수련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빨리 와야 돼. 꼭! 약속이야.”
담수련이 약속하자며 손가락을 내밀었지만 악불군은 그 손을 잡지 못했다. 대신 엎드려서 큰절을 하며 말했다.
“제겐 아가씨가 전부입니다. 최대한 노력하여 아가씨를 빨리 찾아뵐 것입니다.”
“응, 나도 매일 소군이 언제 오나 기다릴 거야.”
악불군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