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5화>
5화. 아이들(2)
담무룡이 담수련을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지만, 아기 때 엄마를 잃은 담수련은 굉장히 외로운 생활을 해 왔다.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가까이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조금만 실수를 해도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어릴 때 따랐던 오빠인 담수운도 담무룡과의 갈등으로 몇 년에 한 번 찾을 정도였고, 담무룡은 언제나 바빠서 담수련을 만날 시간이 너무 적었다.
종리화는 편하기는 했지만, 모든 상황을 담무룡에게 보고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나이 차도 너무 많았다.
그런 그녀에게 악불군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친구이자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악불군에게도 담수련은 너무 귀하고 하늘같은 존재였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음을 악불군이 알게 되는 건 아직은 머나먼 일이었다.
“나 잊어버리면 안 돼?”
“제겐 아가씨뿐입니다.”
담수련이 큰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울먹이며 말하자, 악불군은 마음이 아픈 듯 바닥에 다시 머리를 갖다 댔다.
* * *
“관주님,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육 관의 교두인 구상규는 악불군의 싸우는 장면을 보며 감탄하듯 말했다.
육 관은 오 관까지 오면서 배운 모든 무공을 실전화시키는 곳이었다. 모든 수련 과정에서 날이 선 무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심지어 죽는 수련생도 이따금 나오는 곳이었다.
“타고난 무재에다 누구나 부러워할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어. 가주님께서는 저런 아이를 어디서 데려왔을까?”
육 관의 관주인 흑야신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악불군은 배운 무공을 완벽하게 습득했을 뿐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까지 하여 더 높은 위력까지 보여 주고 있었다.
그가 그럴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보기 드문 신체의 탄력성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잠룡세가의 삼인자 소리를 듣고 실지로 무림에서도 백대고수 안에 들어가는 흑야신보다도 더 유연한 움직임이었다.
만약 악불군이 내공과 절기를 얻게 된다면 신체의 유연함은 상승 작용을 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을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악불군의 불굴의 참을성이었다. 아니, 의지라고 해야 맞았다.
육 관의 수련은 잠시도 쉴 새가 없었다. 잠을 자는 도중에 기습은 다반사였고, 식사 중이나 볼일을 볼 때도 어디서 공격이 들어올지 가늠키 어려웠다. 한마디로 잠잘 시간도 주지 않고 무조건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동안 육 관에 들어온 자들은 대부분 삼 일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곤 했다. 그럼 그제야 휴식시간을 주는데, 그 대신 깨어나면 벌로써 고문이 기다렸다. 고문 역시 수련의 일종이었기에 그 강도는 대단히 강했다.
그런데 악불군은 처음 육 관에 들어왔을 때 무려 이십 일을 버텼다.
결국 쓰러지기는 했지만 그 와중에도 끝까지 자신의 무기를 손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그리고 이 년이 지난 지금, 악불군은 이제 거의 잠을 자지 않고도 버티고 있었다.
아니, 잠을 자지 않는다기보다 어떤 상태에서도 잠을 잘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심지어 이동을 하거나 밥을 먹을 때조차 시간만 나면 잠을 자는 것이었다.
“육 관이 만들어지고 가장 빨리 통과하는 아이가 될 것 같습니다.”
* * *
“오는 데 힘들지는 않았나?”
담무룡은 인사를 하는 화우성의 아래 위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물었다.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아버님 없이 처음 하는 여행이라 그런지 더 즐거웠던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가 없이 해서 더 재미있었다……? 흠~ 이유가 뭔가?”
“아버님께서는 너무나 저를 어린애 취급을 하십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가 직접 지휘를 하며 왔습니다.”
담무룡은 화우성의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라면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겠지…….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지?”
“을축년 인시에 태어났습니다. 곧 열여섯 살이 됩니다.”
“화정무가 아들 하나는 잘 두었군. 그래, 무공은 어디까지 익혔나?”
“자질이 부족해 아직 가전 무공도 다 익히지 못했습니다. 간신히 창천화룡검식의 육 식까지 펼치는 정도입니다.”
담무룡의 얼굴에 이채가 나타났다. 화룡세가의 창천화룡검식은 그도 잘 알고 있는 초식이었다.
창천화룡검식은 모두 십이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걸 모두 익힌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려운 절기였다.
한데…….
“육 초식까지 펼친다면…… 네가 열여섯 살의 나이에 벌써 내공이 일 갑자에 육박한다는 말인데?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솔직히 믿기 힘들구나.”
“아버님께서 어렸을 때부터 천하에 구하기 힘든 약재들을 구해 주신 덕분이지요. 제 능력이라기보다는 부모님을 잘 만난 덕이라고 해야겠지요. 하지만 이제부터 제 스스로 저를 완성시켜 나갈 생각입니다. 가주님 말씀대로 일 갑자에 가까운 내공을 가지고는 있지만, 수련이 뒷받침되지 않은 약재의 힘인지라 정순하지가 않습니다.”
생각 외로 너무 솔직하고 당당하게 말하는 화우성을 보며 담무룡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마음에 든다는 신호였다.
“하여튼 먼 거리에 힘든 여행을 했으니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수련이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보게. 그 아이가 몸이 좀 약해서 무공은 그리 많이 익히지 못했지만 아는 것은 정말 많다네.”
“가주님의 마음 씀씀이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버님께서 예물로 드리는 것이라고, 받아주셨으면 하신다고 말씀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화우성이 자신의 옆에 놓인 큰 상자를 가리키며 말하자 담무룡이 눈짓을 했다. 그러자 두 명의 장한이 나타나더니 상자를 들어서는 담무룡의 앞에 놓고는 뚜껑을 열었다.
“호오! 화가주께서 신경을 많이 쓰셨군! 이 정도의 물건들이면 황금 만 관의 가치는 될 것인데……. 고맙게 받겠다고 전해 드리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문 학사.”
“예!”
“화 공자를 귀빈청으로 모시고 푹 쉬게 하게.”
“알겠습니다.”
“화 공자, 연회는 이따 저녁때 하세.”
“연회까지 해 주신다니 저로서는 감복할 따름입니다. 감사합니다.”
* * *
“아기씨! 뭐하세요?”
종리화는 담수련이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자 다가와서는 물었다.
“벌써 낙엽이 지네……. 그런데 소군은 아직도 안 오고…….”
담수련은 창밖을 보며 시무룩하게 있었다. 그녀는 지금 악불군과 헤어지던 당시를 생각하고 있었다. 벌써 악불군이 육 관에 들어간 지 이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거 참! 갈수록 불안하게 만드시네? 이렇게 소군 생각만 하시는 것을 가주님께서 아시면 위험한데…….’
담수련을 보며 속으로 살짝 한숨을 내쉰 종리화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웃으며 말했다.
“아기씨! 오늘 아주 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예쁘신 아기씨께서 환한 얼굴로 손님을 맞아야지, 이렇게 시무룩한 얼굴로 손님을 맞으면 주군께서 무척 걱정하실 거예요.”
“손님? 누군데……?”
“호호호, 만나 보시면 알 거예요. 정말 귀하신 분이니까 보시면 예쁘게 웃어 주세요. 아기씨는 웃을 때 가장 예쁘세요.”
“정말 귀하신 분?”
담수련은 의아한 듯 반문했다.
* * *
“자네가 본 걸로는 어떤가?”
담무룡은 문창현이 돌아오자 의견을 물었다.
“저는 소문은 그리 믿지 않는 편인데, 화 공자님에 대한 소문은 오히려 축소된 것 같습니다. 정말 보기 드문 기재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자네도 그렇게 보았나? 나도 그렇게 보았어. 흠! 인물됨은 마음에 드는데……. 화정무가 부럽기는 처음이군.”
담무룡은 화우성에 대한 첫인상이 아주 좋았던 듯했다.
“가면서 대화를 해 보았는데, 지식도 상당하고 화 가주와는 달리 품성도 부드러운 것 같았습니다.”
“화정무도 다른 놈들보다는 그래도 믿을 만하지. 그런데 여자 문제는 없을까?”
담수련은 그가 눈에 넣어도 아파하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는 딸이었다.
영웅을 지아비로 두는 것도 좋지만, 남자가 호색하여 여자관계가 복잡하거나 바깥일에 매달려 가정을 등한시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호색은 하지 않았지만, 너무 일에 치여 아내의 임종도 못 보고 아들인 담수운과도 사이가 극도로 나빠진 것은 지금도 그가 가장 후회하는 일이었으니깐.
그가 본 화우성은 분명 아들이었다면 최고였겠지만 사위라면 기재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딸을 둔 아비의 마음이었다.
* * *
연회는 상당히 성대했다.
잠룡세가의 간부들이 주욱 앉아 있는 상황에서 담무룡은 화우성을 자신의 옆자리에 앉히는 파격까지 보였다.
술잔이 몇 차례 돌고 춤을 추던 무희들이 퇴장을 하자 담무룡이 가등우를 보며 물었다.
“수련이는 왜 아직 안 오느냐?”
“지금 오시고 계십니다.”
가등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종리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드십니다.”
그리고 얼굴을 엷은 면사로 가린 궁장 차림의 여인이 종리화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담수련은 조심조심 걸어오더니 담무룡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어서 오너라. 이 아이가 내 여식이라네. 수련아, 이쪽은 화룡세가의 화우성 공자다.”
면사로 가린 담수련의 얼굴은 신비롭게 보였다.
“소녀, 담수련 화 공자님께 인사드립니다.”
“아! 예! 화우성입니다!”
화우성은 다급히 일어서며 포권을 했다.
한눈에 담수련에게 반한 것이다.
여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지아비를 만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후일 그녀의 남편이 될지도 모를 화우성을 만난 그날은 담수련에게는 운명의 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열네 살의 어린 담수련의 눈에도 화우성은 참 잘생긴 남자로 각인되었다.
그러나 놀라기는 화우성이 더 했다. 그가 태어나서 정말 많은 미인을 보아 왔지만, 담수련은 그의 눈에 정말 예뻐 보였다.
거기다 겨우 열네 살이라는데 어찌나 조신하고 온몸에서 고아함이 풍겨 나오는지, 처음으로 화우성이 바보 같은 표정을 지은 날이기도 했다.
그런 그를 보며 담수련은 재미있다는 듯 살포시 웃었다. 그리고 화우성은 그녀를 꼭 자신의 아내로 맞겠다고 결심을 했다.
아직은 열네 살과 열여섯 살로 남녀 간의 사랑이나 육체적인 관계에 대해서 알기에는 이른 나이였지만 서로 간의 첫 만남은 정말 화기애애했다.
천하제일의 가문 중의 하나인 화룡세가의 자식답게 화우성은 정말 점잖았고 예의가 발랐다.
그리고 그렇게 따진다면 담수련 역시 화우성에게 꿀릴게 전혀 없었다.
* * *
“정말 오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연회를 끝내고 잠룡세가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담룡호(潛龍湖)의 가운데에 자리 잡은 정자에 앉은 둘은 정다운 오누이 같았다. 그리고 화우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도 화 공자님을 보니 참 좋네요.”
“담 소저님께서 좋다고 하시니 저도 아주 좋습니다.”
“오실 때 힘들지는 않으셨어요?”
“오랜만의 외유였고, 담 소저를 본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저도 외유 좀 했으면 좋겠는데…… 나가지를 못하게 하네요?”
“외로우셨던 모양입니다.”
화우성의 뜻밖의 말에 담수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다 저를 아기 취급만 하고, 같이 놀아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아무리 조신해도 이제 겨우 열네 살이었다. 담수련의 입에서 처음으로 어린애다운 말이 튀어나왔다. 잠깐 사이였지만 상당히 친해진 듯싶었다.
“하하하! 저도 그렇습니다. 열여섯이면 이미 대장부이거늘, 아버님께서 아직도 저를 어린애 취급만 해서 화날 때가 종종 있으니까요.”
“풋!”
무게를 잡으며 말하는 화우성의 모습에 담수련이 웃고 말았다.
담수련이 웃자, 화우성은 내가 웃기는 말을 했나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솔직히 열여섯 살이면 아직 대장부는 아니지요.”
“그런가요? 대신 다음에 올 때는 담 소저께서 대장부로 볼 정도로 커서 오겠습니다.”
그제야 담수련이 웃은 이유를 안 화우성이 머리를 긁으며 다짐하듯 대답했다. 만약 화룡세가의 사람들이 보았다면 모두 놀랄 일이었다.
화우성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가에서는 조금도 흐트러짐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화우성이 어린애처럼 머리를 긁으며 대답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