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6화>
6화. 아이들(3)
“둘이 사이가 좋은 것 같지?”
멀리서 둘이 얘기하는 모습을 보며 담무룡이 종리화에게 물었다.
“예, 아기씨께서 낯을 가리지는 않지만 쉽게 친해지지도 않는 편인데…… 신기하게 금방 친해지시네요.”
“좋은 일이다. 집안이 아무리 좋고 기재가 출중하다 해도 수련이가 싫어한다면 나 역시 억지로 밀어붙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이대로 결정해도 될 것 같구나.”
담무룡의 말을 들은 종리화가 뭔가 말할 듯이 하다가는 그만둔다.
“왜 할 말이라도 있느냐?”
“주군, 노파심이지만 혼인 약속은 조금 더 있다가 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왜? 넌 화우성이 마음에 안 드느냐?”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아기씨 나이는 이제 겨우 열네 살입니다. 지금 보기에는 친해졌지만 사실 화 공자님과 만난 지 며칠밖에 안됐습니다. 어린 마음으로 비슷한 나이의 친구가 하나 생겼다는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종리화의 담수련의 사랑은 친엄마 못지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담수련이 사랑하는 사람과 혼인을 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 수련이가 화우성이를 진정으로 좋아해서 혼인을 한다면 금상첨화겠지……. 하지만 지금 상황이 그때까지 기다리기는 좀 어렵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종리화는 의아한 듯 반문했다. 담무룡에게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았다.
종리화의 반문에 담무룡이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화야.”
“예!”
“정략혼인이 나쁘다고 생각하느냐?”
“지금 무림의 구도상 정략혼인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아기씨가 성인된 후 해도…….”
“혼인이 아니라 혼약이다. 어차피 나도 혼인은 일찍 시키고 싶은 생각이 없다.”
“…….”
종리화가 대답이 없자 담무룡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수련이가 보통 아이들과는 다르지 않느냐? 난 수련이가 혼인도 하고 애도 낳으며 여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행복은 다 경험하게 해 주고 싶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니다. 그래도 너니까 정치보다는 수련이를 더 생각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담무룡은 거대 문파의 수장이었다. 아무리 담수련을 사랑한다 해도 어느 정도 정치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화룡세가 정도의 집안이 아니면 수련이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 수 없다…….’
담무룡은 화우성과 대화를 나누며 웃고 있는 담수련을 보며 의미 모를 소리를 속으로 중얼거렸다.
* * *
“아기씨! 요새 기분이 좋으신 것 같네요?”
“예, 기분 좋아요.”
오랜만에 자신과 같은 또래에 신분까지 비슷해서 스스럼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화우성을 만난 담수련은 기분이 좋았다.
거기다 천하의 기재답게 화우성은 모르는 게 없었다. 학문과 지식이라면 담수련 역시 누구에게도 꿇리지 않을 만큼 익힌 터였다. 당연히 둘의 대화는 끝이 없었다.
화우성 역시 담수련과의 만남이 너무 좋았다. 아직 약관도 안 된 열여섯 살이었지만 담수련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더 정확하게 느낄 수 있는 나이였다.
그리고 화우성의 가슴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깃들고 있었다.
* * *
“저 내일 떠납니다.”
“저도 들었어요.”
시무룩하게 말하는 담수련의 얼굴을 보며 화우성의 얼굴도 밝지 못했다. 자신의 위치만 아니라면 그냥 이곳에서 담수련과 매일 대화를 나누고 같이 놀러 다니며 살고 싶었다.
화룡세가의 소가주의 신분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한번 호남에 놀러 오세요. 이곳 절강도 아름다운 곳이 많지만, 호남은 호남대로 풍광이 색달라서 담 소저께서 보시면 좋아할 곳이 여럿 있습니다.”
화우성은 담수련을 다시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다.
“화 공자님 말씀을 들으니 저도 가 보고는 싶어요. 하지만 아버님께서…….”
어려울 것 같다는 듯이 말하던 담수련이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했다.
“화 공자님께서 아버님께 직접 청해 보세요. 그러면 혹시 승낙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한번 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대답하는 화우성도 그것은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나마 무림의 자녀이고 어느 정도는 정략결혼의 의미가 있는 두 가문이기에 이런 식으로라도 둘의 만남이 허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가 남자의 집에 놀러 간다는 것은 아무리 무림세가의 여식이라 하여도 용납되기 힘든 일이었다.
거기다 화룡세가가 위치한 호남은 남송 중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원에 저항하던 곳으로, 아직도 사방에서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었다.
담무룡이 그런 곳에 담수련만을 보낼 가능성은 희박했다.
* * *
“가주님의 세세한 보살핌에 큰 고마움을 느끼고 돌아갑니다.”
의젓하게 예를 갖추는 화우성을 보며 담무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나도 자네를 보기를 아주 잘한 것 같네. 요즘 천하가 원체 뒤숭숭하니 조심해서 돌아가게. 그리고 자네 아버님께도 내가 조만간 연락을 할 것이라고 전해 드리고.”
“감사합니다.”
담무룡이 뒤에 한 말의 의미를 화우성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기쁜 웃음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담무룡이 화정무에게 보내는 답례품을 가득 실은 마차가 화우성과 함께 떠났다.
“결정하셨습니까?”
문창현의 물음에 담무룡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서찰을 준비할까요?”
“아니, 좀 더 기다리게. 수련이 이제 겨우 열네 살이야. 그 애 생각도 좀 알아봐야 하고.”
“약혼일 뿐입니다. 빨리 진행하지 않는다면 다른 세가에서 방해를 할지도 모릅니다.”
“다른 놈들이 방해해서 깨질 약혼이라면 더욱 할 필요가 없겠지.”
“……알겠습니다.”
담무룡에게는 담수련과는 열 살 터울의 아들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아들이 태어날 당시 무림은 극도의 혼란의 와중에 있었다.
계속적으로 저항하는 무림 정파의 잔여 세력들이 수시로 오룡세가의 분타를 습격했고, 그들의 재정 기반이라고할 수 있는 사업체에도 타격을 가해 왔다.
그러다 보니 담무룡이 세가 내에 머무는 날이 거의 없었다. 거기다 어쩌다 세가에 돌아와도 아들을 한번 안아 주는 경우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혼을 내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자신의 아들이 범재라는 데에 있었다.
사실 담수운은 보통 무림인들이 보았다면 기재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러나 담무룡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스스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아들만 보면 짜증이 났던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무림이 평정되고 세가에 안착한 담무룡과 그의 아들 담수운과의 사이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당시 열 살도 안 된 담수운은 아버지인 담무룡을 보기만 해도 벌벌 떨었고, 담무룡은 그런 그가 더욱 못마땅했다.
완벽하게 익힌 무공조차도 담무룡만 앞에 있으면 제대로 펼치지 못하여 그 골은 더 깊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담무룡에게 혼이 나던 담수운이 오줌을 지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열 살이 다 된 나이에 혼 좀 났다고 오줌을 지린 것을 보고, 담무룡은 자신도 모르게 담수운 뺨을 호되게 후려쳤다.
이후 담수운은 아예 방 밖으로도 나오려고 하지를 않았다. 억지로 끌고 나오려고 하면 고함을 지르고 미친 듯이 반항을 하는 그를, 담무룡은 자신의 선조들이 처음 세가를 세웠던 태산의 종가로 보내 극한의 수련을 받도록 했다.
삼, 사 년에 한 번씩 세가에 들르기는 하지만 둘의 사이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더 사이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담수련에게만은 진짜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다 쏟아붓고 있었으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담수련을 낳고 이 년 가까이 아프던 어머니가 결국 죽고 만 것에는, 아들인 담수운과 담무룡의 갈등 때문에 한 가슴앓이도 영향을 미쳤다.
천하에서 가장 차가운 사람 중의 하나인 담무룡도 자신의 아내의 죽음에는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그리고 아내의 수련이를 부탁한다는 마지막 유언만은 지켜 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키워 보니 그 재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옹알이에서 시작한 담수련의 재롱은 갈수록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겨우 두 살에 천자문을 읽는 재지를 보고서는 천하에 군림하기 시작했던 때와 같은 기쁨을 느꼈다.
거기다 자랄수록 예뻐지는 그녀의 모습은 그의 가장 즐거운 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바로 그녀가 오음절맥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이후 담무룡은 담수련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 주기 시작했다. 오래 살기 어렵다는 의원의 말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음절맥을 고칠 수 있다는 약과 천하기이영초는 만금을 주고라도 사서 그녀에게 먹였다.
그 덕인지 담수련은 자신의 몸을 호신할 정도의 무공을 익히는 데 성공했고, 몸도 많이 건강해졌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완치가 된 것이 아니다 보니 안심을 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아픈 손가락 같은 딸이었으니, 남에게 준다는 생각을 하면 담무룡은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문창현.”
“예.”
“태산의 종가에 연락해서 수운이를 오라고 하게.”
“예에? 잘 생각하셨습니다. 공자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갑작스런 담수운의 귀가 결정에, 문창현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서 뛰어나갔다.
담수운이 자랄 때 그를 곁에서 보필하고 글을 가르친 장본인이 바로 문창현이었다. 그에게도 담수운의 일은 가장 가슴 아픈 일 중의 하나였다.
“그래…….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했는데, 내가 그놈에게 너무 무심했어.”
담무룡은 갑자기 담수운의 생각이 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 * *
“아가씨, 무공 수련할 시간입니다.”
종리화는 방 안에 앉아서 수를 놓고 있는 담수련을 보며 소리쳤다.
“오늘 꼭 해야 하나요?”
“호호호! 무공 수련에 오늘이 어디 있고 내일이 어디 있겠어요? 무조건 매일 해야 하는 것이 무공 수련이랍니다. 왜요? 하고 싶지 않으세요?”
“그게…… 아니라, 놓던 수는 빨리 다 놓고 싶어서요.”
종리화는 담수련의 말에 곁으로 다가와서는 그녀가 놓고 있는 수를 쳐다보았다.
“손수건이네요. 그런데…… 이게 비상하는 독수리인가요?”
“독수리 같아요? 어떡하지, 천붕(天鵬)인데.”
걱정스레 말하는 담수련을 보며 종리화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천붕 같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그림이 여자용은 아닌 것 같은데, 누구 주시려고요?”
“소군이 두 달 안에 나온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나오면 축하 선물로 주려고요.”
악불군이 육 관에 들어간 지 이미 사 년이 흘렀다.
같은 시기에 여러 명의 아이들이 악불군과 같이 육 관에 도전했지만 이미 다 실패해서 나왔고, 악불군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러던 중 악불군이 드디어 육 관을 통과했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소군이 나온다는 것이 그렇게 좋으세요?”
“그럼요. 제가 얼마나 소군 나오기를 기다렸는데요? 우리 소군, 정말 멋있어졌을 거예요.”
‘우리 소군?’
종리화는 담수련의 말에 뭔가 불안한 듯 되뇌었다.
관을 통과하기 전에는 아예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조차 알아볼 수 없는 것이 육 관이었다. 하지만 관을 통과하는 순간 그에 대한 대접은 천양지차가 된다.
순식간에 잠룡세가 내에서의 지위가 상승하는 것이었다.
“유모, 무슨 생각하세요?”
웃으며 대화하던 종리화가 갑자기 얼굴을 굳히며 답이 없자 담수련이 의아한 듯 물었다.
“아닙니다. 제가 교관에게 물어봤더니, 육 관을 그렇게 빨리 통과한 예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통과를 했으면 당연히 나부터 만나러 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담수련이 약간은 불평조로 얘기하자 종리화가 미소를 지었다.
담수련은 누구보다도 섬세한 사람이었다.
천금의 지위를 가지고도 하녀에게 듣기 싫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일개 경비 무사에게조차 친절하게 대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보이는 사람은 악불군이 유일했다.
절대로 불평 같은 것을 하지 않는 그녀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그녀가 얼마나 악불군을 생각하고 기다려 왔는지를 알려 주는 방증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