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7화>
7화. 노력(1)
“육 관을 통과한 무사에게는 잠룡 무고에 들어가 비급을 읽을 권한이 있습니다. 소군에게는 다시없는 절호의 기회이니, 하루라도 헛되이 허비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래도…….”
“참! 아가씨 약혼자인 화 공자께서 이번 여름에 한번 놀러 오실 거라고 하셨다는군요.”
“화 공자께서요?”
담수련의 얼굴에 반가움이 나타났다.
화우성은 자신의 세가로 돌아간 후 한 달에 한 번은 꼭 서찰을 보내왔다. 처음에는 그저 안부 인사였지만, 혼약을 한 후에는 담수련에 대한 애정과 보고 싶은 안타까운 마음을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담수련은 그의 서찰을 읽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분이 이곳에 마지막으로 왔다간 것이…… 벌써 이 년이 지났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처음 오셨을 때는 아이 티를 못 벗으셨는데, 저번에 오셨을 때는 완연한 대장부의 기상이 보이셨지요. 아마 이번에 오실 때는 완전히 어른이 되어서 오실 것입니다.”
종리화의 말을 들으며 담수련은 화우성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다,
관옥 같은 얼굴에 무림인이라기보다 학사라 해도 좋을 정도로 해박한 지식, 거기다 자상함까지 갖추고 있는 그는 세상에 다시없는 신랑감이었다.
그래서 담무룡이 담수련을 불러 화우성과 혼약을 할 예정이라고 할 때도 그녀는 그리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문제는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정확히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화우성은 벌써 여러 번 혼인을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담무룡은 혼약을 했으니 우선 기다리다 담수련이 열여덟이 넘으면 그때 생각해 보자고 했다.
그 이유는 담무룡이 담수련을 일찍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그가 보기에 화우성이 더 담수련에게 빠져 있는 것 같았기에 혼인 전에 자신이 챙길 수 있는 이익은 다 챙길 생각이기도 했다.
“유모, 그런데 혼인은 꼭 해야 하나요?”
갑작스런 담수련의 물음에 종리화는 의아한 눈으로 담수련을 쳐다보았다.
“왜요? 화 공자님이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그건 아니에요. 그런 분을 어찌 마음에 안 들어 할 수가 있겠어요. 다만 아버님을 놔두고 떠나는 것도 그렇고…….”
담수련의 말에 종리화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아기씨의 착한 효심을 어찌 제가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여인은 나이가 차면 혼인을 해야 하는 법이랍니다.”
“유모는 혼인을 하지 않았잖아요?”
“저요? 호호호~ 저 같은 여자와 누가 혼인을 하려고 하겠어요.”
“유모는 제가 봐도 아름다우신데, 뭐가 문제인데요?”
“제 별호가 혈의나찰이에요. 제가 얼마나 무서운 여자였는데요.”
“피! 무림인이 무서운 거야 당연한 거지요. 솔직히 말해 보세요. 왜 시집 안 가셨어요?”
담수련이 다시 조르자 종리화는 뭔가를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눈에 뭔가 아련한 느낌이 나타났다.
“제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사랑의 열풍이란 너무 무서워서, 한번 거기에 휩쓸렸더니 빠져나올 방법이 없더군요. 하지만 그와 인연이 없었는지, 결국 모든 게 끝나 버렸습니다. 이후 남자에 대한 관심이 없어져 버리더군요.”
종리화의 말을 들은 담수련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랑이 뭐예요?”
“예?”
“추국이 빌려 온 소설을 한번 본 적이 있어요. 그리 재미가 있지는 않았지만 사랑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던데, 그 감정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하더라고요.”
“호호호, 아기씨께서도 드디어 사랑이란 말에 관심을 보이실 나이가 되셨나 보네요.”
담수련의 나이 열여섯, 이미 일 년 전에 여인의 몸이 되기는 했지만, 남녀 간의 문제에 대해서는 약간 늦은 담수련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남녀 간의 문제는 어머니에게 배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담무룡이 아무리 담수련에게 모든 것을 다해 주었지만 딸에게 해 줄 수 있는 말과 없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남녀 간의 문제는 그로서도 설명해 줄 수 없는 문제였다.
“사랑이라……? 글쎄요. 저도 그런 방면에는 경험이 많지 않아요. 사랑도 거의 일방적인 저의 짝사랑이다시피 했으니,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빴는지도 설명이 쉽지가 않네요. 다만 이거 하나는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여인들에게는 큰 행복이기도 하지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일이기도 해요.”
“어떻게 한 가지 일이 행복과 괴로움을 동시에 수반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돼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모든 생각과 관심이 오로지 그 사람에게만 집중된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전혀 짐작을 할 수가 없게 되지요, 사랑의 열풍이 지나간 후 생각해 보면 그저 내가 미쳤었구나 라는 말 이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더군요.”
담수련은 종리화가 자신의 경험담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눈이 커졌다.
자신이 아는 종리화의 성정상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됐기 때문이었다.
“사랑이란 것이 굉장히 무서운 건가 봐요?”
담수련의 말에 종리화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무서워할 필요는 없어요. 행복도 같이 주니까요. 물론 괴로운 순간도 있지만, 같이 사랑한다면 행복이 더 크니까요.”
“정말 이상한 것이 사랑이네요? 그럼…… 사랑하는지는 어떻게 알아요?”
“글쎄요?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저는 그분을 볼 때마다 심장이 쿵쿵쿵 뛰더라고요. 그리고 안 보면 보고 싶고 계속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담수련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심장에 갖다 대며 물었다.
“심장이 쿵쿵 뛴다고? 그럼 난 누구를 사랑해야 할까?”
“호호호~ 사랑이란 것이 내가 누구를 사랑해야겠구나 해서 사랑해지는 것이 아니랍니다. 정말 너무 어이없게, 이게 사랑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사랑이 찾아온답니다. 그리고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구나 느끼기 시작하면 이미 그 속에 빠져 버린 후가 되어서, 여간해서는 그 속에서 허우적거릴 뿐 빠져나온다는 것은 정말 어렵답니다.”
“와! 정말 신기하다. 나도 사랑이라는 거 해 봤으면 좋겠어요.”
“막상 해 보면 마냥 좋지만은 않습니다. 사람의 가슴을 너무 저려 오게 하거든요, 하지만 아기씨는 걱정 마세요. 세상의 누구라도 아기씨를 보면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예요. 당연히 아기씨께서 사랑하는 사람이 아기씨의 정인이 될 것이니, 아마 행복한 사랑만이 남을 것입니다.”
‘사랑……. 화 공자님과 내가 혼약을 했는데, 나는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 걸까……?’
담수련은 갑자기 자신의 낭군이 될 화우성이 생각났다.
이미 몇 년 전부터 화우성이 자신의 남편이 될 거라는 것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거기다 화우성과 만나면 즐거웠고, 스스로 생각해도 그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종리화의 말을 들어 보니 사랑은 좋아한다는 감정과는 분명 다른 것 같았다.
“그런데 난 화 공자님을 좋아하는데 왜 가슴이 뛰지도 않고, 연락이 없으면 궁금하지도 않을까?”
“때가 되면 저절로 아기씨도 아시게 될 거예요. 호호호~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오늘은 좀 이상한 날 같네요.”
“유모, 그럼…….”
“아기씨, 사랑 얘기는 이제 그만. 수련하러 가시지요.”
“더 듣고 싶은데……?”
담수련은 입술을 내밀었지만 그래도 수련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일으켰다.
***
“주군! 긴급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무슨 일이냐?”
담무룡은 문창현의 말에 검미를 찌푸렸다. 그가 긴급하다고 할 경우 좋은 보고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쪽에서 백련교의 교세가 생각보다 대단한 모양입니다.”
“원나라에서 진압군을 보내지 않았더냐?”
“운남에 주둔하고 있던 오천여 원나라 병사들이 출동했는데, 오히려 전멸을 당한 모양입니다.”
“전멸?”
“예.”
“대원 제국의 군단이 일개 반란군에게 전멸을 당했다니, 대원도 점점 무너져 가는 것 아니냐?”
“아직 북방에 사십만에 달하는 정예군이 있는데 쉽게 무너지기야 하겠습니까? 지금 호남의 다루가치가 다시 정벌군을 보내면서, 화룡세가에서 무사를 보내 달라고 청한 모양입니다.”
담무룡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군이 움직이는데 무림 세가의 무사까지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분명 좋은 징조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화룡세가에서 고심이 크겠군. 그래, 몇 명이나 보냈다고 하더냐?”
“이백여 명 정도의 세가 무사들을 보낸 모양입니다.”
“딱 체면치레할 만큼 보냈군…….”
“그것도 그것이지만, 무림 세력도 아닌 일개 사교 집단 하나를 제압하지 못하고 대원의 군사들이 전멸을 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사방에서 우후죽순처럼 불만 세력들이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중원을 정복할 당시의 대원제국은 누구의 반항도 용납지 않는 무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대원은 예전과는 달랐다.
대원은 원래 여덟 부족의 연합체였다.
칭기즈 칸이라고 불리는 철무진이 모든 부족을 통일하고 자신의 직계로 하여금 황위를 잇게 했다.
그리고 얼마간은 철무진의 후광에 힘입어 거대한 제국을 일사불란하게 통치해 나갔다.
하지만 갈수록 부족장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철씨 가문에서만 황제가 나오느냐는 불만이었다.
이들을 제압할 힘을 잃은 황제는 결국 타협을 하고 만다.
점점 심해지는 권력 다툼에 황제의 권위는 떨어져 갔고,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은 대원의 국력을 계속 소모시켰다.
그리고 최근에는 절강의 방국진의 반란을 시작으로 새외 곳곳에서 반란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중 백련교 한산동에 의해 만들어진 홍건당의 발호는 그렇지 않아도 권위를 잃고 있던 대원을 뿌리째 흔들고 말았다.
“갈수록 태산이구나……. 그렇지 않아도 그동안 납작 엎드려 있던 무림 문파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계속 올라오고 있거늘!”
“본 가에도 뭔가 요구를 하지 않겠습니까?”
“방국진을 제거할 때도 본 가의 수하들이 백 명 가까이 희생됐는데, 설마 또 요구하겠느냐?”
말하는 담무룡의 표정은 그리 밝지는 않았다. 바야흐로 혼란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혼란의 태풍이 잠룡세가를 비켜 간다는 보장이 없었다.
***
수많은 책들이 꽂혀 있는 서가, 한 청년이 그 사이를 걷고 있었다.
악불군이었다.
육 관에서의 수련을 통과한 그는 가볍게 식사를 한 후 곧장 무고로 안내되었다.
훌쩍 큰 키, 하지만 하관이 빠져 있고 말랐다 싶을 정도로 날씬한 몸매는 육 관에서의 수련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반안과 송옥이 울고 갈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누구라도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릴 정도로 아주 매력적으로 변해 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비급이란 것인가?”
악불군은 서가에 빼곡히 꽂혀있는 여러 책자들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비급들은 무공종류별로 잘 정리가 되어 있었다.
악불군은 책 하나를 빼더니 표지를 보았다.
‘한령신조(寒靈神爪)’
한령신조는 원래 남궁세가의 무공으로, 일 갑자 전 남궁세가가 몰락하면서 지하로 숨어들 때 미처 숨기지 못한 것이었다. 담무룡은 원나라로부터 공을 인정받아 이 무공을 하사받았다.
엄청난 절기는 아니어도 근접전에는 아주 유효한 수법이었다. 하지만 악불군은 몇 장 넘기더니 다시 꽂았다.
육 관을 끝낸 그에게 무고가 한 달 간 개방되었지만 반드시 안에서만 읽을 수 있을 뿐, 비급을 가지고 나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수백 권이 넘는 비급 중에서 뭔가를 골라 한 달 안에 익힌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무고에 들어온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주무공과 비슷한 비급을 골라 읽었다.
하지만 악불군은 벌써 오 일째 순서대로 계속 책을 빼서 읽고 다시 꽂기만 계속했다.
‘내가 익힌 무공보다 특별히 나은 것이 없어…….’
무고라고는 하지만 담무룡이 수하들에게 대단한 절기를 보여 줄 리는 없었다.
무고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한 달. 그 귀중한 시간의 삼분지 일에 가까운 열흘이나 소비하여 그가 고른 비급은 겨우 두 권이었다.
하나는 ‘소림내경일지선’이었고, 다른 하나는 제목이 없이 아주 세밀한 그림만 그려져 있는 이름 없는 비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