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9화>
9화. 인연(1)
“배운 무공도 십 성 익히지 못하는데 다른 무공을 보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런데 무고 안에서 심법에 관한 비급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것을 주로 읽은 것입니다.”
“소림내경일지선이 심법 책은 아닌데?”
“심법이 내공을 모으게 해 주는 원리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담무룡은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공배공으로 부족하더냐?”
“제게는 충분한 무공이었습니다. 다만 도환비류검결이 십 초가 넘어가면 진기가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유가 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내공이 뭐고 어떤 원리로 축척이 되는지도 궁금했습니다.”
담무룡의 얼굴이 살짝 변했다.
‘도환비류검결의 십 초가 넘어가면 진기가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이놈이 그 정도로 기재였나?’
담무룡은 상당히 놀란 듯했다.
도환비류검결은 담씨 종가의 가전 무공으로, 그 역시 그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담무룡이 그것을 느낀 것은 나이 거의 사십이 되어, 내공이 일 갑자를 넘긴 시점이었다.
잠시 악불군을 주시하던 담무룡은 우선 침착하게 넘어갔다.
“그런 배우려는 자세가 무공 증진에는 아주 중요하지. 그럼 계속 그것만 공부했느냐?”
“아닙니다. 표지에 제목이 없는 비급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특이해서 자주 보았습니다.”
악불군의 대답에 담무룡의 눈에 기광이 번뜩했다.
“제목이 없는 비급을 봤다고?”
“예.”
“내용도 보았느냐?”
“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비급이라고 하기는 좀 어려웠습니다. 그냥 각 장마다 글자는 한 자만 적혀 있고 그림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순간 담무룡의 얼굴에 이채가 나타났다.
‘그렇게 기다려도 안 나타나더니, 처음으로 그것을 읽은 놈이 드디어 나타났군…….’
담무룡은 의미 모를 소리를 속으로 중얼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그래……? 그럼 그런 것을 왜 보았느냐?”
“그림의 자세들이 아주 특이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세를 취하다 보니 피곤이 풀리는 듯한 느낌도 있었습니다.”
“피곤을 풀기에는 운기조식이 더 효과가 좋을 텐데?”
“그건 그렇습니다. 사실은 이상하게 그 책이 제 마음을 끌었습니다.”
“책이 마음을 끌어? 그게 말이 되나?”
“죄송합니다. 그냥 제 개인적인 느낌이었습니다.”
담무룡은 악불군의 눈을 주시하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그 그림의 자세들은 몇 개나 취해 보았느냐?”
“전부 다 취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완벽하게 익히지는 못해서, 최대한 자세를 외워서 나왔습니다.”
“그 자세들을 외웠다고?”
“예.”
담무룡의 악불군을 쳐다보는 눈빛이 점점 변해 갔다. 하지만 주위의 서 있는 수하들을 의식한 듯, 그는 곧 표정을 풀며 말했다.
“무고에서 얻은 무공은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거나, 수련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은 들었겠지?”
“예! 무고에 들어가기 전에 주의 받았습니다. 제가 죽을 때까지 혼자만 알 것입니다.”
“그래, 남자라면 약속을 천금같이 여겨야겠지.”
말하던 담무룡의 손이 갑자기 튀어나오며 악불군의 목을 잡았다.
악불군이 서 있는 곳과 담무룡이 앉아 있는 자리의 거리는 약 삼 장.
하지만 그는 마치 악불군의 앞에 원래부터 있는 듯, 순식간에 다가와 그의 목울대를 잡은 것이다.
“피하지 않은 거냐, 못한 거냐?”
담무룡은 악불군은 조금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목을 잡히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물었다.
“제가 어찌 가주님의 손속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피할 수 있었는데 그냥 있었다는 말이냐?”
“가주님의 무공의 너무 높아, 제 능력으로 피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소한 저항은 할 수 있었습니다.”
담무룡은 잡은 손을 떼더니 뒤에 있는 호위대장을 보았다.
“가등우.”
“예!”
“이 아이의 화우가 어느 정도인지 한번 싸워 봐라.”
가등우는 담무룡의 명이 떨어지자 악불군에게 그대로 짓쳐 들어갔다.
그런데 그의 공격은 단순히 화우를 알아보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 죽일 작정인 듯 조금의 사정도 봐주지 않았다.
악불군은 가등우의 권이 자신의 면상을 쳐오자 옆으로 몸을 피하며 조로 그의 팔을 잡아갔다.
순간 가등우의 무릎이 배를 쳐왔다.
악불군은 다른 손의 팔굽으로 그의 무릎을 찍어 내려갔다.
무릎과 팔굽의 격돌.
퍽!
둘은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누가 더 이득을 보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등우가 다시 몸을 날리려는 순간!
“그만! 그 정도면 됐다.”
담무룡은 만족한 미소를 지며 비무를 멈추게 했다.
호위대장을 맡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가등우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방증이었다. 거기다 가등우는 대단히 많은 실전을 겪은 백전노장이었다.
비록 삼 초에 불과했지만 그런 그와 대등하게 싸웠다는 것이 담무룡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 듯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가등우는 악불군이 공손히 포권을 하자, 같이 포권을 하더니 뒤로 물러섰다.
“대단하구나. 정말 많이 늘었어. 듬직해.”
여간해서는 칭찬을 하지 않는 담무룡이 칭찬을 하고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모두 가주님의 은덕입니다.”
“넌 수련이의 호위 무사로 키워졌다.”
“목숨을 바쳐 아가씨를 보호할 것입니다.”
“마음가짐은 마음에 드는구나. 그런데 나와 수련이가 다른 명령을 내린다면 누구의 명을 따를 것이냐?”
순간 주위에 있던 부하들의 시선이 악불군에게 향했다. 누구도 피해 나가지 못하는 담무룡 특유의 충성도 시험이었다.
수년을 힘들게 수련을 해서 고수를 만들었는데 충성도 시험에서 실수해 죽은 자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대답에서는 죽은 자가 한 명도 없었다. 너무 뻔한 질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가씨의 명을 따를 것입니다.”
순간 청 안의 공기가 냉랭해졌다. 심지어 몇 명은 속으로 혀를 차기까지 했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해도 이런 자리에서는 그렇게 답을 하면 안 되었다.
그런데 악불군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대답을 한 것이다.
담무룡의 성격을 아는 수하들은 악불군의 죽음을 의심치 않았다.
“네가 지금 감히 내 명을 어기겠다, 이 말이냐?”
누가 들어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담무룡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전 가주님의 명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따르기 위해 그런 것입니다.”
“내 명을 따라? 흥! 그래 어디 한번 변명을 해 봐라.”
“가주님께서 제게 말씀하시기를, 모든 것의 일 순위는 아가씨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제 목숨보다도 먼저입니다. 전 가주님의 명대로 아가씨를 일 순위로 생각할 뿐입니다.”
악불군의 대답에 담무룡은 심각한 표정으로 악불군을 주시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좋아, 아주 확실한 변명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수련이를 보호해라. 수련이를 위해서 한 행동이라면 어떤 행동도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도 악불군의 일에는 어떤 참견도 하지 마라.”
수하들에게까지 다짐을 보낸 담무룡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그의 마지막 시험까지 통과한 것이다.
* * *
“감히 주군의 명을 거역하겠다고 모두가 있는 앞에서 공언을 했습니다. 당연히 죄를 묻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담무룡과 둘만이 남자 문창현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내 명을 따르기 위해 그런다지 않느냐?”
“하지만 본 가는 하극상을 가장 큰 죄로 여겨 왔습니다. 악불군을 그냥 둔다면 기강이 해이해질 수도 있습니다. 가벼운 벌이라도 내리심이 어떻겠습니까?”
“세상일이란 누구도 알 수 없는 법. 어떤 상황이 되면 나조차도 수련이를 도울 수 없는 일이 생길 수 있다. 그렇다면 수련이에게도 목숨을 바쳐 자신을 보호하는 수하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악불군은 내 수하도, 본 가의 가신도 아닌 수련이의 심복 호위 무사라는 것을 너도 인정하도록 해라.”
* * *
“유모, 이거 어때요?”
담수련은 자신이 수놓은 손수건을 보여 주었다.
“정말 예쁘게 만드셨네요? 소군이 보면 좋아하겠습니다.”
종리화의 말에 담수련은 기분이 좋은 듯 활짝 웃음을 지었다. 그 순간 종리화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담수련이 활짝 웃는 모습은 여자인 종리화가 보아도 정말 아름다웠다.
그렇기 때문에, 담수련이 활짝 웃는 경우가 악불군에 대해 대화를 나눌 때뿐이라는 것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릴 때는 그냥 오빠 같아서 좋아한다 생각하려고 했지만, 십육 세면 더 이상 어린 나이도 아니고 여인이 되신 건데…… 정말 걱정이구나.’
만약 둘 사이에 조금이라도 주종 관계 이상의 관계가 생긴다면 악불군은 담무룡에게 즉시 죽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유모, 사화(四花)는 다 어디 갔어요?”
* * *
“야! 저 사람 누구지?”
종리화가 담수련을 위해 고르고 골라 키운 네 명의 시녀. 바로 사화(四花)였다.
그녀들은 담수련과 같이 무공 수련을 하며 마치 친자매처럼 지내 왔다. 지금 담수련의 최측근 호위라고 할 수 있었다.
매향의 말에 추국과 흑란 그리고 연화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눈이 동그래졌다.
“야아~ 멋있다. 정말 누구지?”
추국이 몽롱한 눈으로 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나타난 청년은 정말 멋있었다.
흑란이 후다닥 청년의 앞으로 달려가자 나머지 셋도 질세라 급히 그 뒤를 따랐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들어온 거지요?”
허리에 양손을 걸치고 당돌하게 묻는 흑란에게 청년은 공손하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저는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아가씨의 호위 무사입니다.”
순간 네 명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머머머머! 악 무사님이시구나? 전 추국이라고 합니다. 종리 단주님께서 악 무사님이 오실 수도 있다 했는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추국은 다른 삼화가 나서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저는 연화예요. 악 무사님을 이렇게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전 흑란이에요.”
“너희들! 아가씨의 최측근 심복으로서 자부심이 있지, 이게 무슨 짓이야!”
보고 있던 매향이 모두를 향해 질책하듯 소리치자, 삼화는 ‘뭐래?’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모두가 잠시 멈칫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매향이 악불군의 앞으로 달려가더니 공손하게 말했다.
“소녀가 악 무사님을 아가씨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저게!”
악불군을 안내하며 안으로 향하는 매향을 보며 삼화의 표정이 구겨졌지만, 곧 몽롱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산적 같이 생긴 무사가 오면 어쩌나 했는데, 너무 잘생겼지 않니?”
“난 아가씨를 모시게 된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오늘에야 알겠어.”
“난 이제 악 무사님을 오빠로 생각할 거야.”
셋은 각기 기대 섞인 말을 내뱉으며 급히 둘의 뒤를 따라 뛰어갔다.
* * *
방에서 나온 담수련은 사화가 보이지 않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그녀의 눈에, 사화에게 한 청년이 둘러싸여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곧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가 상상하던 악불군의 모습보다 더 멋있어 보인 것이다.
“소군! 소군 맞지!”
담수련은 기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다.
“아가씨, 악불군 이제야 모두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악불군은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 혹시나 담수련이 자신을 잊어버렸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었다.
하지만 담수련의 반가운 목소리에, 팔 년 전이나 지금이나 둘 사이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갔다,
“소군, 그러지 마! 이런 거 난 싫어.”
악불군이 절을 하려고 하자 담수련이 급히 그의 손을 잡았다.
담수련은 규중처녀로서 태어난 후, 남자의 손은 물론 피부조차도 담무룡 이외에는 닿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감히 남자의 손을 잡는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악불군만은 그녀에게 예외였다.
“아가씨, 그래도 인사는 받으셔야 합니다.”
“그럼 그냥 포권만 해. 내게 소군은 수하가 아니야.”
악불군은 그녀의 말에 지난 사 년간 겪은 육 관의 고생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