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0화>
10화. 인연(2)
악불군이 공손하게 포권을 하자 담수련도 같이 목례를 했다.
둘은 동등하다는 그녀의 배려였다. 담무룡이 보았다면 크게 노할 일이었지만, 다행히 담무룡은 이곳에 잘 오지 않았다.
“이제 다 끝났어?”
“아닙니다. 무공 수련에는 끝이 없지요. 하지만 이제 아가씨 곁을 떠나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말하는 악불군의 얼굴을 보던 담수련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나타났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야.”
‘왜 이러지? 그렇게 기다리던 소군이 왔는데 왜 내 가슴이 이렇게 뛰는 거야?’
자신에게는 생명의 은인이요, 너무 좋은 오빠였다. 거기다 자신의 든든한 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냥 영원히 옆에서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악불군을 보던 그녀는 자신의 가슴이 쾅쾅 뛰자 당황하고 말았다.
숨을 들이 쉰 담수련은 악불군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강해졌어? 아버지의 호위들은 전부 몸이 우람하던데, 소군은 오히려 홀쭉해진 것 같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가씨를 지키는 것의 저의 소명입니다. 당연히 강해져야 했습니다.’
악불군은 너무 귀엽게 말하는 담수련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그가 겪은 수련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스스로가 강해져야 한다며 더욱 강한 수련을 시켜 달라는 그에게 가르치던 교관들이 손사래를 칠 정도였다.
“그런데…… 아가씨,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담수련이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며 그를 빤히 보자 의아한 듯 물었다.
“어? 아니야, 난 괜찮아. 그냥 소군을 보니까 좋아서 그런 것 같아.”
“그럼 다행이구요.”
“나 곧 열여섯 된다.”
“알고 있습니다.”
악불군은 자신의 소식을 밖으로는 알리진 못했어도 세가 내의 소식은 교관들로부터 간간이 듣고 있었다.
그가 이번 일 년간 정말 잠을 자지 않고 수련에 수련을 거듭한 이유도 바로 담수련의 십육 세 생일은 꼭 함께하고 싶다는 소망 때문이었다.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나와 놓고도 금방 안 왔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알고 있었다는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알면서도 자신을 기다리게 한 것에 삐친 듯 입술을 내밀었다.
순간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엽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다는 죄책감에 악불군은 당황하여 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가주님께서 제가 너무 지저분하다고 때 빼고 광 좀 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도 아가씨께 잘 보여야지요.”
“호호호호~ 소군은 내가 보기에 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어. 그러니까 너무 때 빼고 광내지 마.”
“왜요?”
“다른 여자들이 좋아하면 안 되잖아.”
“예?”
“호호호~ 농담이야.”
담수련은 자신이 말해 놓고도 이상한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것을 보는 사화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담수련이 이렇게 웃는 것도 보기 어려웠지만, 그녀는 평소에 이런 농담은 절대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둘의 해후를 보며 가장 마음에 안 든 사람이 있었다. 바로 종리화였다.
“아기씨, 운기조식하실 시간이 됐습니다.”
방 안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종리화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밖으로 나와 말했다.
“소군이 왔어. 조금만 더 대화를 나누다 올게.”
“아기씨. 이제 소군은 언제든지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운기조식 시간은 지키셔야 합니다.”
“그래도 소군과 오랜만에…….”
“아가씨, 종리 단주님 말씀이 맞습니다. 언제든지 아가씨께서 부르시면 달려올 것이니 운기조식하십시오.”
“정말이야?”
“이제 아가씨 옆에서 영원히 안 떠날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화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너희들은 왜 소군 옆에 붙어 있어?”
“예?”
“아! 같이 아가씨를 보호하는 입장이라 친해지려고요.”
담수련은 사화가 악불군의 얼굴을 보며 옆에 바짝 붙어 생글거리는 것이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나를 보호한다면 내 옆에 있어야지 않나?”
사화는 서로를 보더니 급히 담수련의 옆으로 가며 말했다.
“저희도 들어가려고 했어요.”
‘난 아직 더 얘기하고 싶은데…….’
시무룩하게 중얼거린 담수련은 종리화를 아쉽다는 듯이 슬쩍 보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단주님께 인사가 늦었습니다.”
담수련과 사화가 안으로 들어가자 악불군은 종리화에게 포권을 했다.
“그동안 수고했다. 아주 늠름하게 자랐구나.”
“단주님 덕입니다.”
“내가 한 것이 뭐가 있다고? 그래, 이제 어떤 식으로 아가씨의 경호를 할 생각이냐?”
“아가씨의 거처 십 장 밖에 제가 대기할 수 있는 장소를 여럿 만들 생각입니다.”
종리화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아가씨를 근접 경호하는 남자 무사는 너밖에 없다. 그만큼 가주님께서 너를 신임한다고 봐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비상이 아닌 경우를 제외하면 아가씨의 방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
“알고 있습니다. 아가씨와는 언제나 십 장 정도의 거리를 둘 것입니다.”
“그래, 그리고 아가씨께서 네게 유독 잘 대해 주신다. 그것은 주종간의 믿음일 뿐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헛된 생각을 하면 안 될 것이다.”
“제게 아가씨는 제 목숨보다 소중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헛된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래 그럼 이제부터 나도 좀 편해지겠구나? 그럼 가 봐라.”
“예!”
‘소군은 믿을 만한데…… 아가씨가 더 문제인 것 같단 말이야.’
악불군이 사라지자 종리화는 고개를 살래살래 젓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 * *
“아가씨!”
“추국이냐?”
“예.”
“들어오너라.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이냐?”
수를 놓고 있던 담수련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 다른 데 신경을 잘 안 쓰는 그녀였다.
“아가씨! 가주님께서 아가씨 십육 세 생신 선물로 설총마를 가져오셨대요.”
“설총마?”
이제 겨우 열여섯이었지만 정말 조신하게 자란 담수련은 여간한 일에는 그리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설총마라는 말에는 자신도 모르게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며 반문했다.
“예, 들은 말로는 아직 어린 망아지인데도 성인 말처럼 덩치가 크고, 털이 얼마나 고운지 마치 하얀 눈이 내린 것 같답니다.”
담수련의 얼굴에 흥미가 가득해졌다. 상당히 많은 공부를 한 그녀는 설총마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심지어 어렸을 적에 설총마를 사달라고 아버지인 담무룡에게 조른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 당시 담무룡이 답을 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그로서도 설총마를 구할 수 있을지 자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담무룡은 구해 준다고 하고 못 구해서 실망을 주기 싫어 확답을 하지 않고 십 년 가까이 천하를 뒤지며 계속 설총마를 찾아온 것이었다.
담수련은 담무룡의 자신에 대한 사랑을 다시 느끼며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천하에서 가장 무섭고 잔인한 사람 중의 한 명인 담무룡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단 한 사람, 그것이 담수련이었다.
“추국아! 설총마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니?”
“대성마장에서 길들이고 있다고 하던데요?”
그녀라면 얼마든지 말 한마디면 설총마를 당장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담무룡이 아직 말을 하지 않았는데 먼저 보는 것은, 선물을 주려고 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열여섯, 궁금하고 보고 싶은 것은 꼭 봐야 하는 나이가 아니었던가…….
“유모 언제 오신다고 했지?”
“천화궁주님과 함께 오신다고 하셨으니까 아가씨 생일 때나 오실 거예요.”
천화궁의 궁주는 무림에서 종리화와 함께 여인 중 가장 무공이 높다고 알려져 있었다.
오래전부터 종리화와는 언니 동생 하는 사이로, 종리화가 담수련의 유모가 된 이후 전혀 바깥출입을 못하자 담수련의 생일을 기회로 삼아 종리화를 보내달라고 직접 청을 했고 담무룡이 허락을 한 것이다.
‘그래, 소군이 온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났는데 내가 너무 안에만 있으면 소군도 심심할 거야.’
대성마장이면 꽤 먼 거리였다.
그리고 그녀는 어릴 적 외출을 나갔다가 죽을 고비를 넘긴 이후로는 밖에 나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악불군이 온 후, 그녀는 자꾸 악불군과 함께 바깥 구경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그 핑계가 생겼다.
“우리 나가 보자.”
“예! 정말이요?”
“그래, 오랜만에 나도 바깥 구경 좀 해 봐야겠다.”
“오랜만이 아니라 거의 일 년 만이에요. 작년 아가씨 생신날 가주님과 잠깐 시장에 가시고 처음이에요.”
“그렇게 됐나?”
“가주님께 알리고 오겠습니다.”
추국도 나가는 것이 좋은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아니다. 아버님께는 말하지 말고 우리만 나가자.”
“우리만이요? 위험하다고 허락 안 하실 텐데요?”
담무룡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추국이 어렵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위험할 게 뭐가 있어? 그냥 설총마만 보고 올 건데?”
“그러다 아가씨 신변에 조금이라도 이상 생기면 저희들은 다 죽어요.”
“다 죽어? 무슨 일인데 나의 사랑하는 누이의 방에서 그런 살벌한 단어가 나오는 거지?”
그때 문이 열리며 한 청년이 들어섰다.
잠룡세가에서 담무룡을 제외하고 담수련의 방에 들어올 수 있는 단 한 명의 남자.
담수운이었다.
갑자기 들어온 담수운을 본 담수련은 급히 일어서며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담수련의 친오빠인 담수운은 담무룡의 부름에 세가로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아직도 겉돌기만 할 뿐 담무룡과의 사이가 나아지지 않았다.
더구나 담무룡조차 담수운에게 어떤 직책도 주지 않았고 만남도 자주 갖지 않았다.
모두 소가주님이라고 부르며 존중은 했지만, 그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사람은 문창현 한 명에 불과했다.
심지어 작년에는 다시 종가로 돌아가고 싶다고 청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결국 그는 툭하면 외유를 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거의 한 달이나 되어 돌아온 터였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왔다.”
“이번은 좀 오래 계셨네요?”
“하하하! 솔직히 여기보다는 서호가 더 내게 잘해 주더구나. 어찌나 예쁜 여자들이 많고, 거기다 내 인기가 얼마나 좋은지 정말 오기 싫었다. 사랑하는 누이의 생일만 아니었다면 더 있으려고 했었다.”
“피! 저보다 예쁜 여자가 많았나 보지요?”
“그럴 리가……! 세상에 내 누이보다 예쁜 여자는 없는 것 같더라.”
“입에 발린 소리는 그만 하시고요. 그리고 아버지도 좀 자주 가서 뵙고 그러세요. 오라버니 생각을 얼마나 하시는데요.”
“하하하! 빈말인 것은 알지만 그래도 고맙구나. 내게 그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그런데 어디 가려고 그러냐?”
파안대소를 터트린 담수운은 담수련의 옷차림을 보더니 슬쩍 물었다.
“사실은요, 아버지께서 저를 위해 설총마를 구하셨다고 해서 살짝 가서 보고 오려고요.”
“너만? 안 될 텐데?”
“사화가 같이 갈 거예요. 그리고 저를 보호하는 소군이 있어서 걱정할 거 없어요.”
“소군? 아~ 너를 호위하도록 어려서부터 수련을 받았다는 그 친구 말이냐?”
“예.”
“내가 여기 오는 동안 못 봤는데? 네 호위면 당연히 나를 막았어야 하는 거 아니냐?”
“아버지하고 오빠 그리고 유모는 막지 않아요.”
“날 안다는 말이구나? 그런데 소군, 그 친구는 어디 있냐?”
“어딘가 있을 거예요. 제가 부르면 그때 나타나요.”
“그래? 그거 은근히 고문인데?”
“고문이요?”
“네 근처에만 있으려면 꼼짝도 못하고 어딘가 숨어 있다는 말 아니냐? 나 같으면 백만 냥을 줘도 못할 일이지.”
“소군은 계속 수련을 하기 때문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른대요.”
“아버님께서 그렇게 아끼는 수련 누이에게 남자를 붙일 정도면 진짜 믿을 만한 친구라는 말인데, 다음에 시간 나면 한번 인사나 시켜 줘라.”
“지금 불러 줄까요?”
“아니다. 지금은 내가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까 다음에 하자. 그리고 조심해라. 네 몸에 상처라도 나면 아버님께서 당신 성격을 참지 못하고 또 여러 명 죽일지도 모른다.”
“조심할게요.”
“그럼 잘 다녀와라, 설총마에게 내 인사도 좀 해 주고. 난 가서 잠이나 자야겠다.”
담수운이 보기 좋은 미소를 보이더니 사라졌다.
‘휴유~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사이가 좋으면 참 좋을 텐데…….’
담수련은 다시 나가는 담수운의 뒷모습을 보며 살짝 한숨을 쉬었다. 뒷모습이 너무 외로워 보여서였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어렸을 때는 그렇게 소심하고 폐쇄적이던 담수운의 성격이 최근엔 쾌활하고 호방하게 바뀌었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