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1화>
11화. 설총마
두 명의 여인이 조용히 잠룡세가의 내원을 빠져나왔다.
“비밀은 지키라고 했지?”
“그럼요. 아가씨 가는 길은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 말해 놨어요. 빨리 가서 설총마만 보고 돌아가시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잠룡세가의 경비란 거의 황궁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곳에서 담수련이나 추국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밖을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추국은 경비 책임자를 만나서는 아가씨께서 은밀하게 밖에 나갈 일이 있으니 길을 터 달라고 부탁한 뒤였다.
물론 아가씨의 뜻이니 가주님께서 모르게 해 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물론 추국이 떠난 후 일각도 안 돼서 그녀가 전한 말은 담무룡의 귀에 들어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대로 목이 달아날 일을 그저 아가씨의 전언이라는 하녀의 말 한마디에 행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어떻게 할까?”
“글쎄요. 사화(四花)도 상당한 고수이고, 악불군도 은밀히 따르니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아마 설총마가 왔다는 말에 보고 싶어서 그러시는 것 같은데, 굳이 지저분한 대성마장까지 가시게 하지 말고 설총마를 아가씨 처소로 데리고 오게 해서 편하게 보시게 하는 것이 어떨까요?”
“아직 조련이 다 안 된 모양이야. 그리고 수련이가 내가 알지 못하게 하란 것을 보니 자신이 선물로 받기 전에 설총마를 본 것을 내게 알리고 싶지 않은 모양인데, 굳이 그런 것까지 내가 막을 필요는 없겠지. 대신 호위는 따로 좀 더 붙여라.”
담무룡이 가등우를 슬쩍 보자 그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일 각 후 담무룡의 비밀 호위인 잠룡대 열 명이 잠룡세가를 벗어났다.
* * *
“오늘 사람이 정말 많네요?”
얼굴에 면사를 한 담수련과 사화가 같이 마차를 타고, 마차의 옆에는 죽립을 깊숙이 쓴 악불군이 말을 타고 따르고 있었다.
“오늘 장이 열렸나 봐요?”
창밖을 본 추국과 매향이 즐거운 듯 담수련에게 말했다.
담수련을 보호하기 위해 종리화가 특별히 수련시킨 사화였지만 아직은 어린 여인들인지라 나온 것이 무척 즐거운 듯했다.
“그래?”
담수련도 기분이 좋은지 대답을 하며 자신의 옆에 있는 창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악불군이 묵묵히 마차를 따라오는 모습을 보자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저거 하나 살까?”
담수련은 대나무 꼬치에 둥그런 것이 달려 있는 것을 보자 흑란에게 물었다.
“당과요? 저게 맛있긴 한데, 아가씨는 먹기 힘들 텐데요?”
“왜?”
“저게 혀로 계속 핥아 먹어야 하는데, 아가씨께서 그렇게 드실 수는 없잖아요?”
“조그맣게 쪼개서 먹으면 돼.”
“저거 보기보다 단단해요. 그리고 손으로 부수면 가루가 되고요.”
그러자 담수련은 걱정 말라는 듯 창밖을 향해 말했다.
“소군, 저 당과 먹고 싶은데 좀 잘라 줘.”
담수련의 말을 들은 악불군은 당과 수레로 가서 한 개를 사더니, 품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 당과를 잘랐다.
그 손놀림이 실로 어찌나 빠른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다섯 조각을 만든 당과를 악불군이 마차의 창으로 집어넣자, 사화와 담수련은 하나씩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뭐가 좋은지 웃음소리가 까르르 까르르 흘러나왔다.
악불군은 그저 담수련이 웃는 것이 좋은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 * *
“총관님, 나와 보십시오!”
대성마장(大成馬場)의 총관 오덕태는 마장의 조련사가 뛰어들어오자 놀라 물었다.
“무슨 일이냐?”
“잠룡세가에서 설총마를 보겠다고 사람이 왔습니다.”
“벌써? 아직 완전하게 길들이지 않았는데…….”
보통 명마라 하면 크기가 큰 대완구나 그 빠르기가 바람과 같고 달릴 때 붉은 땀을 흘린다는 한혈마, 그리고 작지만 힘이 센 고려마 등이 뽑혔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최고는 설총마였다.
한번 주인을 섬기면 절대로 다른 사람을 태우지 않고, 만약 주인이 위험에 처하면 목숨을 걸고 주인을 지킨다.
더구나 그 가죽이 대단히 질겨 여간한 무기로는 상처도 낼 수 없고, 지구력이 좋아 만 리를 달리고도 지치지 않는 명마 중의 명마가 바로 설총마였다.
하지만 설총마는 길들이기가 아주 고약한 말이었다.
커서는 절대로 주인을 바꾸지 않기 때문에 태어난 지 육 개월에서 일 년 사이에 길을 들여 주인을 맞게 해 주어야 하는데, 그게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대성마장에 설총마가 들어온 것은 약 넉 달 전이었다. 잠룡세가에서 최고 명마 사이에서 태어난 설총마라며 망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원래 오덕태는 설총마를 맡는 것을 반대했다.
중원에서는 알아주는 마장이었지만, 설총마 한 마리의 가격은 마장 전체의 말을 합친 것보다도 더 비쌌다.
만약 잘못해서 설총마가 죽기라도 한다면 수십 년 된 마장이 한순간에 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장의 주인인 서기원은 말과 함께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는 오덕태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설총마를 길들여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넉 달이 다 되어 가는 지금, 설총마는 누구에게도 등을 내 주지 않고 있었다.
“큰일이구나! 잠룡세가는 무서운 사람들인데……. 그래 누가 왔더냐?”
오덕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소저 다섯 분과 호위 무사 한 분이 왔는데, 지금 설총마가 있는 마구로 들어갔습니다.”
“뭐야? 아직 설총마가 길들여지지 않은 것을 알면서 마구 안으로 들여보내다니, 미쳤느냐?”
오덕태는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설총마가 다쳐도 문제고 왔다는 사람이 다쳐도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저도 말렸지만, 호위 무사가 시간이 많지 않다고 그냥 보고만 가겠다고 하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오신 소저 분들 중 한 분이 굉장히 귀하신 분 같았습니다.”
“빨리 가 보자.”
“그런데 총관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 같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좀 이상하긴 한데, 설총마가 너무 고분고분하게 안장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설총마에게 안장을 올렸다는 말이냐?”
“예.”
“어떤 조련사가 올린 것이냐?”
오덕태는 놀라 물었다.
이십 년을 말만 보살핀 자신과 어떤 말이든 손만 대면 길들인다는 서기원조차 안장을 올리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빨리 말하지 않고 뭐하느냐?”
“호위 무사가 올렸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조련사의 말에 오덕태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급히 마장으로 뛰어갔다.
마장에 도착한 오덕태는 너무나도 하얗고 아름다운 말의 등에 면사를 쓴 여인을 앉히고서 고삐를 잡고 있는 무사를 보자 어안이 벙벙했다.
‘설총마는 천하를 아우르는 영웅이나 천하를 흔들 경국지색의 미인이 아니면 절대로 첫 만남에 마음을 열지 않는다고 들었거늘……?’
일개 말이 정말 영웅이나 나라를 흔들 미인들을 알아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설총마의 주인이 영웅들이거나 그 영웅의 부인들인 경우가 많았으니 그런 말이 돌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 말이 맞건 틀리건, 지금 말고삐를 잡고 말을 끌고 있는 사람은 영웅이 아니라 호위 무사가 아닌가…….
“아주 길을 잘 들이셨군요. 말이 순해서 아가씨께서 굉장히 좋아하십니다.”
말을 몰고 온 악불군은 오덕태를 보며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
“아 그게…….”
오덕태는 악불군의 말에 대답을 못하고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그렇다고 길들이는 데 실패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가씨, 더 타시겠습니까?”
악불군은 말 등에서 계속 설총마의 갈기를 손으로 쓰다듬는 담수련을 보자 기분이 좋은 듯 미소를 지며 물었다.
‘내가 왜 이러지? 또 가슴이 뛰어…….’
고개를 든 담수련은 악불군과 눈이 마주치자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리자 이상한 듯 중얼거렸다.
그녀에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현상이 나타난 것은 악불군이 온 다음부터였다.
처음에는 자신의 지병 때문에 그런가 걱정도 했지만, 악불군을 볼 때와 생각할 때만 그러기 때문에 아직 의원에게는 말하지는 못했다.
“한번 달려 보고 싶어.”
“알겠습니다.”
악불군은 설총마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넌 착하니까 아가씨께서 떨어지게 하면 된다.”
악불군은 설총마가 마치 알아듣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그럼 한번 달려 보십시오.”
“호호호!”
설총마를 타고 마장을 달리는 담수련은 쉬지 않고 즐거운 듯이 웃었다.
맨날 방 안에서 갑갑하게 지내던 그녀였다.
거기다 악불군을 부르고 싶어도 세인의 눈이 두려워 보고 싶어도 부르지 못할 때도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날씨는 너무 청명했고 바람은 시원했다. 거기다 넓은 마장의 평원은 평화로웠다.
그러나 그녀를 가장 편하게 해 주는 것은, 악불군이 바로 옆을 따르며 그녀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즉시 받아 낼 차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행복한 웃음이 저절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께서 오늘 정말 즐거우신 모양이네?”
보고 있던 매향이 약간 의아한 듯이 추국에게 물었다.
“그러게? 아가씨께서 저렇게 웃는 것은 나도 처음 보는 것 같아.”
“아니야. 내가 보니까 악 무사가 옆에 있으면 저렇게 자주 웃으셔.”
“설마? 그 귀하신 화 공자님과 혼약까지 하신 분이 고작 호위 무사 때문에 저렇게 즐거울까? 설총마 때문일 거야.”
“솔직히 혼약이야, 아가씨께서 너무 어릴 때 해서 알기나 했나 뭐?”
흑란의 말에 추국이 깜짝 놀라 손가락을 입에 대며 말했다.
“쉿! 말조심해. 괜한 입방정 떨다가 가주님 귀에 들어가면 악 무사님만 죽는 게 아니라 우리까지 죽을 수 있어.”
순간 모두의 입이 닫혔다.
담수련의 명예에 조금이라도 흠이 나는 행동을 할 경우 담무룡이 절대 용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화는 입을 꼭 다물고는 말을 타는 담수련만 주시했다.
“더 타시겠습니까?”
“아니야. 좀 지쳐. 이만하면 됐어.”
마장을 크게 한 바퀴 돈 담수련은 힘든지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담수련이 말에서 내리려고 하자 악불군은 급히 말에서 내려 그녀의 발바닥을 손으로 받쳐 주었다.
“소군.”
“예.”
“이런 짓하지 마. 난 소군을 오빠 같이 생각하지, 수하로 생각하지 않아.”
담수련은 악불군의 손바닥에서 발을 치우며 정색을 했다. 그녀는 악불군이 자신에게 잘해 주는 것은 좋았지만 수하나 종처럼 행동하는 것은 너무 싫었다.
“아가씨께서 다치실까 봐 그러는 것뿐입니다.”
“아가씨, 즐거우셨어요?”
담수련이 말에서 내리자 사화가 급히 달려왔다.
“응, 좋았어. 백설아. 한 달 후에 보자.”
“아가씨, 얘 이름이 백설이에요?”
“그래. 방금 내가 지어 줬어.”
“이름 예쁘다. 백설아, 우리 친하게 지내자.”
“푸르르르!”
“어머! 얘가 왜 이래? 사람 차별하네!”
신기하다는 듯 백설의 등에 손을 대던 연화는, 백설이 머리로 받을 듯이 고개를 흔들자 깜짝 놀라 손을 뗐다.
“호호호호!”
“호호호~”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모두의 입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슨 배웅을 그리 오래 하십니까?”
대성마장을 빠져나가는 담수련 일행을 보며 서기원이 포권을 한 채 계속 서 있자, 오덕태가 이상한 듯이 물었다.
서기원을 모신 지 이십 년이 넘어가지만 그가 이렇게 공손하게 누구를 배웅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네는 못 봤지?”
“뭘 말입니까?”
“저 호위 무사가 떠나려 하자, 설총마가 스스로 다가와 얼굴을 그의 어깨에 비볐네.”
“설총마가 먼저 얼굴을 비볐다는 것은 그를 주인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 아닙니까?”
오덕태의 반문에 서기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설총마가 우리 인간들보다 더 사람을 잘 본다는 말이지. 내 장담하네만, 저 무인이 지금은 일개 호위 무사지만 후일 분명 천하영웅이 될 걸세.”
“정말입니까?”
“오 총관.”
“예.”
“우리 같은 사람은 입이 무거워야 오래 산다는 말을 잊지 마라.”
“당연하지요. 오늘 일은 평생 가슴에 묻고 살겠습니다.”
오덕태는 사라지는 악불군 일행의 뒤로 포권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