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5화>
15화. 준비(2)
가볍게 사화를 밀어버린 청년은 뒷짐을 지며 담수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가씨라고 하는 것을 보니, 소저께서 그 소문난 잠룡세가의 천금이신 모양이구려?”
말하던 청년은 자신에게 얼굴을 돌리는 담수련을 보자 순간 얼어붙은 듯 멈칫하고 말았다.
“여기까지 들어오실 정도면 대단한 지위를 가지신 분 같은데, 무례하시군요.”
담수련은 청년이 대단한 지위를 가진 자라고 직감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잠룡세가의 중지에 들어와서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담수련의 말에 청년은 정신이 든 듯 크게 웃으며 말했다.
“담 소저의 아름다움이 경국지색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나의 넋을 잠시 나가게 할 정도일 줄은 몰랐소이다. 전 마룡세가의 소가주인 사도비류라고 하오.”
사도비류는 약간 음침한 눈으로 담수련을 보며 포권을 했다.
“사도 공자님이시군요. 마룡세가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다음부터는 좀 예의를 갖추셨으면 좋겠네요. 가자.”
담수련은 냉정하게 말하고는 그의 옆을 지나려 했다.
“잠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
담수련의 팔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던 사도비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와 담수련 사이에 한 청년이 나타나 그의 손을 막은 것이다.
“넌 뭐냐?”
“아가씨의 호위 무사입니다.”
사도비류의 얼굴에 살기가 떠올랐다.
“호위 무사 놈이 감히 내 손을 막았다는 것이냐?”
“아가씨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누구라도 용납이 안 됩니다.”
“이놈이 감히!”
짝!
사도비류의 손이 악불군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악불군이 맞는 것을 본 담수련이 경악한 눈으로 소리쳤다. 그녀의 외침에 사화가 더 놀란 듯했다. 그녀가 소리를 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천한 놈이 감히 마룡세가의 소가주를 막았소이다. 담 소저의 호위가 아니었다면 뺨이 아니라 목을 잘랐을 거요.”
오히려 자신이 자비라도 베푼 듯 말하는 사도비류를 담수련은 경멸하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대 마룡세가의 공자님께서 이렇듯 치졸한 심성을 가지고 계실 줄은 몰랐네요. 비키세요. 만약 또다시 내 앞을 막는다면 제가 아닌 잠룡세가를 무시한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사도비류의 눈가가 꿈틀했다. 마룡세가의 세력권에서 누가 있어 그에게 이런 말을 했던가…….
특히 여인들에게 그는 최고의 인기남이자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잠룡세가였다.
“하하하! 담 소저께서 좀 화가 나신 모양이구려? 이제 자주 보게 될지도 모르는데 이러시면 곤란하지요!”
사도비류는 능글맞게 말하며 옆으로 비켰다.
담수련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모두의 호위를 받으며 그곳을 벗어났다.
“청순하면서도 성깔은 좀 있다? 하하하! 완전 내 취향인데?”
사라지는 담수련을 보며 크게 웃어젖힌 사도비류는 싸늘하게 표정을 바꾸며 중얼거렸다.
“정말 오기를 잘했군! 저런 우물을 화우성 같은 찌질이에게 넘길 수는 없지. 담수련, 곧 나 보고 사랑해 달라고 질질 짜게 해 주마.”
사도비류의 눈에는 담수련을 꼭 갖고 싶다는 비틀어진 욕망이 이글거렸다.
* * *
“얼굴 괜찮아?”
아무 말 없이 걸어가던 담수련은 화우성이 기다리고 있는 전각에 도착하자 악불군을 보며 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거렸다.
괜히 자신 때문에 악불군이 맞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픈 그녀였다.
“괜찮습니다.”
“소군도 같이 공격하지, 왜 맞아!”
“저로서는 당할 수 없는 고수입니다. 그리고 제가 피하거나 저항했다면 일이 더 복잡해질 수 있었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더 이상 위로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악불군이 저항했다면, 누구의 잘못인지는 차치하고 악불군이 죽었을 확률이 많았다.
무엇보다 사도비류는 마룡세가의 소가주이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내가 힘이 없어서 소군도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하고…….”
‘아가씨는 제가 보호해야 합니다. 다시는 아가씨 눈에 눈물이 보이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악불군은 말없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아가씨, 들어가셔야지요?”
추국은 전각 안을 슬쩍 보더니 말했다.
“알았어. 소군은 여기서 기다려.”
“전 아가씨 주위 십 장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 안은 안전하니까 걱정 말고 나 나올 때까지 들어오지 마.”
악불군은 담수련이 약혼자와 오붓한 시간을 가지려고 하나보다 생각하며 더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혹시 제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크게 부르시면 달려가겠습니다.”
담수련이 악불군을 놔두고 들어가려고 한 것은 악불군의 생각처럼 화우성과 오붓한 시간을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악불군이 또다시 치욕적인 꼴을 당할까 걱정이 돼서였다.
그리고…….
그녀는 화우성과 자신, 둘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악불군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 * *
“연매!”
담수련이 온다는 보고를 받았는지 이미 밖에 나와 기다리던 화우성은 담수련을 보자 반가운 듯 부르며 달려왔다.
“성 오라버니.”
담수련은 화우성을 보자 미소를 지며 인사를 했다.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화우성의 말에 담수련은 옅은 미소로 답했다.
“차를 준비해 놨어.”
화우성이 담수련을 연못 중앙에 만들어진 정자로 안내하자 사화는 연못 주위에 섰다.
“좀 이상하지 않아?”
추국은 둘의 모습을 보며 다른 삼화를 보며 물었다.
“뭐가?”
“저번 화 공자님 오셨을 때는 아가씨께서 굉장히 반가워하시면서 좋아했잖아?”
“지금도 미소를 지으시잖아? 내가 보기에는 화기애애한데?”
“아니야, 분명 그때보다 뭔가 분위기가 어색해.”
“그때는 나이가 어리셨잖아. 이제 나이가 드셨으니까 더욱 조신해지셔서 그런 거 아니겠어?”
“그런가?”
모두가 아니라고 하자 어쩔 수 없이 수긍을 하기는 했지만, 추국은 분명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 * *
“가주님, 아가씨께서 화룡세가가 묵는 화룡전에 가셨습니다.”
가등우의 보고에 담무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상보다는 좀 늦게 갔군. 이제 어린 나이도 아니니 조금은 그래도 되겠지.”
“그런데 마룡세가의 사도 소가주가 아가씨께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뭐야? 무슨 일인지 말해 봐라.”
“아가씨께서 화룡전으로 가는 길목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아가씨 앞을 막은 모양입니다.”
“이놈이 미쳤나? 그걸 그냥 보고 있었다는 거냐?”
“아가씨의 신체에 직접적으로 해를 끼친 것은 아니라 관여는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룡세가의 소가주들은 몇몇 중지(重地)를 빼고는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도록 허가를 한 상황이었다. 수하들에게도 그들의 행동은 급박한 상황이 아니면 모른 척하라는 명까지 내린 터였다.
“그래서?”
“악불군이 아가씨를 보호한 모양인데, 뺨을 때려서 아가씨께서 대단히 화를 냈다는 보고입니다.”
“악불군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뺨을 맞았다는 거냐?”
“예.”
‘그 상황에서 다음 일까지 생각했다는 말인데……. 보면 볼수록 대단한 놈이군. 수련이의 호위 무사만 시키기에는 아까울 정도야…….’
분명 악불군의 무공은 사도비류를 이기기는 힘들다. 하지만 아무 저항도 못하고 그대로 뺨을 맞을 정도는 아니었다.
“연회를 열 테니 모두에게 모이라고 해라. 자꾸 돌아다니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알겠습니다.”
* * *
까무잡잡한 얼굴, 큰 키. 특이해 보이는 옷.
남자라면 누구라도 한 번 다시 쳐다볼 것 같은 매력적인 미모의 여인이 마치 관광이라도 하듯 주위를 흥미롭다는 듯 둘러보며 걷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곳과 확실히 다르네.”
그녀가 사는 하북과 절강은 기후도 생활 양식도 많이 달랐다.
그녀는 슬쩍 뒤쪽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어딜 가나 감시는…….’
잠룡세가의 눈이 자신의 뒤를 멀찌감치 따르며 감시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시야에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나무에 기댄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 남자. 그녀는 자신이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지나갈 뻔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넌 누구야?”
남자가 마치 죽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자 여인은 흥미롭다는 듯 그의 앞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악불군이었다. 지금 그의 신경은 온통 전각 안으로 들어간 담수련에 쏠려 있었다.
“내 말 안 들려?”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져도 대처를 하기 위해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을 하고 있던 악불군은, 그녀가 계속 방해를 하자 결국 고개를 들고 말았다.
“무슨 일입니까?”
악불군의 얼굴을 본 여인의 눈이 흔들렸다. 얼굴을 보지 못한 상황에서도 서 있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인다는 생각에 말을 걸었는데, 얼굴까지 완전히 자신의 취향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날 감시하는 거야?”
“제가 소저를 왜 감시하겠습니까? 전 다른 임무 수행중이니 그냥 가십시오.”
악불군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답하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너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냐?”
다시 고개를 든 악불군은 여인의 얼굴을 잠시 보더니 조용하게 말했다.
“전 오늘 소저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소저를 무시하겠습니까?”
“그럼 왜 내 말에 답을 안 해?”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내가 누구냐고 물었잖아?”
악불군은 그녀의 억지에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투나 복색에서 상당히 지위가 높은 여인이라는 것을 느끼고는 다시 말했다.
“손님이신 것 같은데, 전 소저의 수하가 아니라 잠룡세가의 소속입니다. 누구냐는 질문에 답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잠룡세가에서는 손님에 대한 예의가 없나 보네? 넌 내가 누군 줄 알아?”
“제가 알아야 합니까?”
“당연히 알아야지.”
“그럼 말해 주시지요.”
“내가 철룡세가의 천금인 철상아야.”
“그러시군요. 이제 알았으니 됐습니까?”
악불군의 대답을 들은 철상아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나타났다. 누구든 자신의 정체를 알면 당장 허리를 굽히고 떠는 것을 당연한 듯 보아 왔기 때문이었다.
“너 혹시 철룡세가가 어떤 곳인지 모르는 거 아냐?”
“오룡세가의 한 곳이라는 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알긴 아네? 그럼 천금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
“가주님의 외동 따님이라는 것 정도는 압니다.”
“그러니까 내가 철룡세가의 천금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건방을 떤다 이거지?”
“전 소저처럼 귀하신 분이 제게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전 지금 임무 수행 중입니다. 그러니 이만 가시지요.”
철상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다시 물었다.
“혹시 잠룡세가에서 네 지위가 높아?”
“호위 무사입니다.”
“호위 무사? 지금 호위 무사 따위가 내게 이런 행동을 했다는 거야? 너 지금 나하고 장난치니?”
“다시 말하지만 전 지금 임무 수행 중입니다. 그러니 이만 가시지요.”
“호호호호~ 너 아주 매력 있네? 지금까지 내가 누군 줄 알고도 너 같이 행동한 남자는 아무도 없었는데? 이름 뭐야?”
“호위 무사는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보아하니 무공도 쓸 만하고, 어때 네가 원하면 내가 철룡세가로 데려가 높은 지위를 줄 수도 있는데?”
“전 호위 무사가 적성에 맞습니다.”
“그럼 내 호위 무사해. 돈은 여기서 받는 것의 열 배 줄게.”
“이러시는 의도는 모르겠지만 거절하겠습니다.”
“거절? 호호호~ 내 소문을 못 들었나 보네? 난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은 반드시 가져. 만약 못 가지게 되면 어떻게 할까?”
“죽이시는 모양이군요?”
“머리도 좋네? 척 알아듣는 거 보니까. 그냥 죽이는 게 아니라 완전히 부숴 버리지.”
“알았습니다. 전 지금 임무 수행 중이니 이만 가 주십시오.”
철상아의 한쪽 눈썹이 확 치켜 올라갔다.
“너 지금 내 말이 농담 같아? 아니면 잠룡세가를 믿고 까부는 거야?”
“신분 낮은 호위무사가 철룡세가의 천금께 제대로 된 예를 갖추지 않아 화가 나신 것은 알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누누이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임무 수행중입니다. 전 임무수행 중에는 제가 맡은 일에만 집중을 할 뿐입니다.”
여전히 예의는 차리지만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은 악불군의 모습에 철상아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