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6화>
16화. 성인식(1)
“난 너 같은 부류의 남자들을 잘 알지. 신분도 낮고 능력도 없으면서 남자입네 하고 자존심은 세지. 하지만 죽음 앞에서도 그렇게 뻣뻣하게 굴 수 있을까? 지금 넌 내가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죽일 수 있거든!”
“소저의 말이 맞는지 틀린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귀하신 분께서 임무 수행 중인 일개 호위 무사를 기분이 나쁘다고 죽이신다면 명예에 흠이 될 것입니다.”
철상아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그녀는 건방진 상대를 길들일 때 고통을 주는 것만큼 특효약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악불군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그의 눈에는 진짜 고통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뭔 놈의 눈이 이렇게 사람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거야?’
보고 있던 철상아는 갈등하듯 악불군의 눈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환한 미소를 지며 말했다.
“좋아. 기개가 기특해 한번 봐주지. 너 정말 운이 좋았어.”
그때 몇 명의 무사가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악불군은 중앙에 선 중년 무인에게 급히 자세를 잡으며 포권을 했다.
“국 당주님을 뵙습니다.”
그는 잠룡세가의 내당 당주인 국대광이었다.
“악불군, 네가 왜 여기에 있느냐?”
“아가씨께서 여기서 대기하라고 하셨습니다.”
국대광은 악불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철상아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며 말했다.
“아가씨, 가주님께서 연회를 준비하셨다고 지금 모두 오시라고 하셨습니다.”
철상아는 국대광은 쳐다보지도 않고 악불군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가씨께서 대기하라고 했다? 그럼 담수련의 호위란 말인가? 어쨌든 이름은 알았네.’
* * *
철상아가 국대광과 함께 떠나자 악불군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대로는 안 돼!’
악불군은 입술을 잘근 씹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육 관을 통과한 후, 그는 나름 담수련을 보호할 힘이 생겼다고 믿었다.
하지만 첫 싸움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자에게 밀리면서 자신의 무공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분명 온몸으로 적의 암기를 받아 내며 담수련을 보호하는 데 성공은 했다.
하나 만약 누구의 도움도 없는 한적한 장소에서 그자를 만났다면 담수련을 보호하기는커녕 그조차 목숨을 담보할 수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오늘 사도비류와 철상아를 만나면서 그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그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사도비류나 더 어려 보이는 철상아의 무공이 그가 성 밖에서 싸운 자보다 더 강했던 것이다.
‘내가 익힌 무공으로는 원천적으로 이길 수 없어. 왜 같은 무공인데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거지?’
악불군은 사도비류나 철상아와 직접 싸우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무공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악불군은 그렇다고 의기소침해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니 더욱 강해져야겠다는 의지가 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악불군은 지금 자신의 무공 정도로는 담수련을 어떤 적으로부터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노력만으로 차이를 좁히기에는, 알고 있는 무공부터 너무 딸렸다.
하지만 자신에게 그들을 이길 정도로 강한 무공을 가르쳐 줄 사람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악불군은 뭔가 결심한 듯 중얼거렸다.
‘그래! 안 되면 되게 하면 되지 뭐!’
주먹을 꽉 쥐며 뭔가를 결심한 듯 중얼거리는 그의 귀로 매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 무사님!”
악불군은 급히 몸을 돌렸다. 그가 급해지는 경우는 담수련이 연관이 되었을 때뿐이었다.
“아가씨께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어?”
“그건 아니고요. 아가씨께서 화 공자님과 대연회장으로 가신다고, 악 무사님께 그쪽으로 오시라고 하시네요.”
“대연회장?”
“가주전 옆에 있는 귀빈청에 있어요.”
“알았다. 그럼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린다고 말씀드려라.”
“예.”
대답을 한 매향이 안으로 사라지자 악불군은 귀빈청 쪽으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사방에서 일어난 반란과 몇 년째 이은 한발(旱魃)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었지만, 잠룡세가의 연회석에는 산해진미로 상이 부러질 정도였다.
“유 총관!”
“예~ 공자님!”
한 청년의 부름에 유영필이 크게 대답을 하며 뛰어갔다. 천하의 잠룡세가의 총관인 그를 강아지 부르듯 부른 자는 사도비류였다.
“아무리 우리가 별 볼 일 없다 해도 이렇게까지 푸대접을 하면 되겠소?”
“공자님들을 푸대접하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우린 아직 잠룡세가의 담 공자와 담 소저를 보지 못했소이다.”
“그게…… 소문은 들으셨겠지만 본 가의 소가주님께서는 원체 낯을 가리십니다.”
“내가 듣기로 담 공자님께서는 잠룡세가에 거의 없다고 하시던데? 지금 있기는 있는 거요?”
“그게…….”
“그건 됐고 담 소저나 빨리 오라고 하시오.”
“아가씨께서는 지금 화 공자님과 함께 곧 오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가무를 보시면서 잠깐 즐기고 계십시오.”
유영필은 곤혹스런 표정으로 급히 변명을 했지만 분명 담수운이 먼저 와 있어야 하는 것이 예의이긴 했다.
‘담수련이 화우성과 같이 온다고? 흥! 미녀는 나 같은 영웅이 취하는 것이 맞지. 화우성, 네게 줄 수는 없어.’
그 아름다운 담수련과 화우성이 혼약을 했다는 현실을 자각하자 기분이 확 상한 사도비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비스듬히 누웠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무녀들의 춤을 보고 있는 한 청년을 쳐다보았다.
‘재수 없는 놈!’
그는 철룡세가의 소가주인 철무정으로, 사도비류가 가장 꺼려하는 인물이었다. 오룡세가 중 마룡세가가 한 수 접어주는 곳이 바로 철룡세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철무정의 옆으로 눈에 확 들어오는 미녀가 다가간 것이다.
‘누구지? 담수련보다는 좀 못해도 색다른 매력이 있는 계집인데…….’
“넌 어딜 혼자 그렇게 다니는 거냐?”
“오룡세가에서 가장 부자라는 잠룡세가는 어떻게 생겼나 구경 좀 했어요.”
음흉한 눈으로 그녀를 훑어보던 사도비류는 철무정과 그녀의 대화를 듣자 급히 표정을 바꾸며 몸을 일으켰다.
“철 형과는 이미 인사를 했는데 철 소저께서도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전 마룡세가의 사도비류입니다.”
사도비류는 미소를 지며 포권을 했다.
“어머! 소문이 자자하신 사도 공자님이시군요?”
“제 소문이 철 소저에게까지 퍼졌을 줄은 몰랐습니다.”
“네, 대단한 호색한으로 예쁜 여자는 모두 건드린다고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사도비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곧 표정 관리를 하며 말했다.
“누가 저에 대해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린 모양이군요. 전 절대 호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쁜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닌데? 전 호색하는 남자를 좋아해요. 영웅은 호색한다는 말도 있잖아요?”
‘천방지축 무서운 것 없이 까분다더니, 말을 아주 귀엽게 하는군.’
사도비류는 마음에 드는지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성격이 아주 호탕하시군요! 제가 솔직히 호색은 안 하지만 영웅 소리는 들을 정도의 능력은 있다고 자부합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저와 술이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처음 보는 여인한테 술을 권하시는 거 보니까 여인 꼬드기는 재주가 탁월하신 것 같네요?”
“상아야! 사도 공자에게 자꾸 무례하게 굴 거냐?”
듣고 있던 철무정이 질책하듯 한마디 하자 철상아는 입을 삐죽거렸다.
“아닙니다. 전 여동생이 없어서, 철 소저를 보니까 정말 귀엽기만 합니다.”
사도비류의 말에 철무정은 무심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사도 공자께서 상아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입니다.”
“오라버니! 난 사도 공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이상하게 엮지 마세요!”
이어 튀어나온 철상아의 말에 사도비류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담수련에게 대하듯 할 수는 없었다.
“철 형! 오랜만입니다.”
그때 화우성이 미소를 지며 안으로 들어섰다.
오룡세가의 소가주들은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화 형께서 혼약을 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아직까지 축하를 못해서 죄송합니다.”
일어서던 철무정이 몸이 얼기라도 한 듯 잠깐 멈칫했다. 화우성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한 여인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무심하던 그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쪽은 잠룡세가의 천금이자 제 약혼녀인 담수련 소저입니다.”
화우성은 철무정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 듯 뒤따라온 담수련을 모두에게 소개했다.
“소녀 담수련입니다. 귀하신 공자님들께서 힘든 걸음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담수련이 조신하게 인사를 하자 철무정의 눈은 더욱 흔들렸다. 어떤 여인들에게도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던 그가 담수련에게 첫눈에 반해 버린 것이다.
“호호, 전 철상아라고 해요. 나도 제법 예쁘다는 말은 들었지만 담 소저는 차원이 다르게 예쁘네요. 몇 년 더 지나면 온 세상의 남자들이 전부 담 소저를 천하제일미로 추켜세우길 주저 않겠는데요?”
철상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덕담을 건넸지만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천하제일미는 오로지 자신 하나면 족하기 때문이었다.
“과찬이십니다. 철 소저의 아름다움은 집 안에만 있는 저의 귀에까지 들려올 정도로 소문이 자자하던데, 제가 어찌 비교가 되겠습니까?”
직설적으로 말하는 철상아와 너무나도 조용조용 말하는 담수련은 대조적이었다.
‘얘는 내가 싫어하는 것은 다 가지고 있네…….’
담수련이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행동에는 그녀가 보지 못했던 기품이 있었고 말에는 고아한 품격이 보이자, 철상아는 더욱 짜증이 나는 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화우성은 왠지 모를 자부심을 느낀 듯 커다랗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님께서 오룡세가는 혈맹으로 이어진 형제들이라고 했는데 우리들의 이런 만남이 너무 늦은 것 같습니다. 연매의 성인식에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룡세가까지 왔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담 소저의 성인식인데 화 형께서 감사를 하니, 너무 나가는 것 아니시오?”
사도비류는 비소(非笑)를 입가에 그리며 말했다. 자신도 모르게 올라오는 질투를 숨기지 못한 것이다.
“혼약을 한 사이이니 당연한 것 아니겠소?”
“혼약이지 혼인은 아니지 않소이까? 세상에는 천지개벽하는 일이 수시로 벌어지니 말이오.”
사도비류의 말에 화우성의 얼굴이 살짝 변했지만 곧 담담한 말투로 다시 말했다.
“어떤 천지개벽도 연 매와 나의 혼인을 막지는 못할 것입니다.”
사도비류와 철무정은 화우성의 연 매라는 말이 이상하게 귀에 거슬렸다.
“담 소저께서 예쁘시기는 한 모양이네요? 나타나자마자 남자들 싸움을 유발시키니 말이에요.”
철상아의 말에 사도비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화 형, 제 농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신 모양이구려. 설마 농담에 화나신 것은 아니겠지요?”
“사도 형께서 그런 말을 하신 이유가 짐작이 가는데 제가 화 낼 상황은 아니지요.”
‘짐작이 가? 이자식이!’
사도비류는 태연한 척 미소를 짓고는 있지만,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고 있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질투와 담수련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다행입니다. 담 소저, 우리 아까 만났지요?”
사도비류는 이번에는 담수련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담수련은 사도비류와는 대화를 섞고 싶지 않은 듯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도비류의 가슴에는 더욱 뜨거운 욕망이 치솟았다. 청순하기만 한 담수련에게서 강한 성적 욕망을 느낀 것이다.
‘이 계집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내가 차지한다.’
사도비류는 주먹을 꾹 쥐며 담수련을 자리에 앉히는 화우성을 노려봤다.
‘이것 봐라? 저거 분명 특별한 의미를 지닌 눈빛인데……? 좋았어!’
사도비류를 보며 비소를 짓던 철상아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여자라면 돌처럼 보는 철무정이 담수련을 보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철상아는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잘하면 완벽해 보이는 철무정에게 약점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언뜻 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