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7화 (17/472)

<천검지애 17화>

17화. 성인식(2)

그때 모두의 눈이 한쪽으로 향했다.

종리화가 요리를 든 십여 명의 시녀들과 함께 들어온 것이다.

시녀들은 재빨리 빈 접시들을 거두고 새 요리를 탁자에 깔았다.

“대단한 무공을 지닌 걸 보니 시녀는 아닌 것 같은데?”

철상아는 종리화를 보며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가 본 여인 중 가장 강한 것 같아서였다.

“철 소저께 인사드립니다. 전 종리화라고 합니다.”

“역시 다르다 했더니 혈의나찰 종리 단주셨군요. 여인 중 최고 고수라는 말에 언젠가 한번 비무해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네요.”

철상아는 종리화에게는 말을 놓지 못했다. 그만큼 그녀의 명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감히 철 소저와 어찌 비무를 하겠습니까? 오늘 이 자리는 가주님께서 아가씨의 성인식 전에, 다음 대 무림을 다스릴 오룡세가의 후계자들끼리 친분을 쌓을 자리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즐거운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화우성이 물었다.

“무슨 소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자객들이 잠룡세가의 바로 앞에까지 나타나 담 소저를 노렸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잘못된 소문입니다. 본 가의 하녀 한 명이 시장에 물건을 사러 갔다가 시장통의 왈패들과 시비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아마 그것이 와전이 된 모양입니다.”

종리화의 말을 모두는 믿지 않았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숨기려는 것을 굳이 알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담 소가주께서는 안 오십니까?”

“소가주님께서는 잠시 외유를 나가셨습니다. 곧 돌아오신다고 하셨으니 우선 담소를 나누고 계십시오.”

종리화가 인사를 하고 나가자 사도비류가 다시 화우성을 보며 말했다. 담수련의 바로 옆에 앉아 싱글벙글하는 그의 모습이 영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보니 진짜 화 형은 행운의 사나이 같소이다. 담 소저 같은 미인을 차지하게 되셨으니 말이오.”

화우성의 검미가 살짝 좁혀졌다. 농담으로 치부하며 심기를 건드린 것이 아직 반 각도 안 된 거 같은데 또다시 도발을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제게 연 매가 과분하니 행운아는 맞다고 봅니다.”

또다시 화우성이 가볍게 넘겨받자 사도비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곧 화제는 각 세가에 닥친 당금의 상황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담 소저는 너무 조용하십니다.”

삼 각쯤 대화가 이어졌지만 담수련이 한마디도 안 하자 철무정이 물었다.

“제가 무림의 상황이나 세가의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담수련의 말에 철무정의 눈이 흔들렸다.

원나라는 예전부터 모계사회의 전통이 있어서 여인의 발언권이 매우 컸다.

원나라 적통의 후인이 세운 철룡세가 역시 여인들의 발언권이 매우 커서 심지어 대외 정책까지 사사건건 참견했다. 패도적인 성격의 철무정은 그것이 대단히 불만스러웠다.

그에게 천상 여인인 담수련은 모든 면에서 자신이 원하던 이상형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사도비류와는 성격 자체가 달랐다. 계속 담수련을 몰래 보며 욕망을 감추지 못하는 사도비류와 다르게, 그는 담수련이 마음에 들수록 그녀를 더욱 보지 않고 있었다.

그때 담수련이 몸을 일으켰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내가 같이 나갈까?”

“아니에요.”

“그럼 다녀와.”

모임 중에 여인이 나간다고 할 경우 따라 나가는 것은 실례였다.

그러자 사도비류가 몸을 일으켰다.

“나도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설마 지금 담 소저 따라 나가는 거예요?”

철상아가 직설적으로 묻자 사도비류는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부정했다.

“생리적인 문제로 나가려는 것인데 철 소저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좀 당황스럽습니다. 제가 왜 담 소저를 따라 나가겠습니까?”

“아니면 됐고요. 그런데 조심하세요. 이 근처에 잠룡세가의 무사들이 이중 삼중으로 포위하고 있으니까요.”

철상아의 의미심장한 말에 사도비류는 코웃음을 치며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온 사도비류는 급히 주위를 살폈다.

철상아의 말대로 그는 담수련을 만나러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조그만 정자 안에 담수련이 서 있는 것을 보자 회심의 미소를 지며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에 약혼자인 화우성이 있고 주위에는 잠룡세가의 무사들이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보이는 행동은 실로 안하무인이었지만, 그는 담수련과 대화할 시간만 있으면 유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자신의 세력권에서는 어떤 여인도 자신의 말을 거역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자를 삼 장 정도 남기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뭐야? 또 너야!”

그의 앞을 막은 한 청년.

악불군이었다.

“아가씨께서 혼자 계실 때는 삼 장 안으로 다가가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네가 감히 내 앞을 막겠다는 거냐?”

오룡세가의 자제들인 그들 역시 악불군 같이 호위를 하는 비밀 시위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감히 앞에 나서지는 않았다.

“막는 것이 아니라 임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아까 한 대 맞은 것으로는 교육이 안 된 것 같구나!”

“소군! 막지 마.”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담수련이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화가 난 사도비류는 악불군의 가슴을 향해 장을 날렸다.

퍽!

“읍!”

“제법 참을성이 있군.”

사도비류는 악불군이 침음성을 내뱉으며 두 걸음 뒤로 물러서자, 씨익 웃더니 다시 말했다.

“그래, 다음 장에도 버티나 보자.”

담수련은 사도비류가 악불군을 치자 급히 그쪽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앞을 종리화가 막아섰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종리화의 전음이 들렸다.

[아가씨! 나서면 진짜 소군이 죽습니다. 절대 나서시면 안 됩니다.]

만약 이 일로 담수련과 사도비류 간에 언쟁이라도 벌어진다면 담무룡은 마룡세가와의 친분을 위해서라도 악불군을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었다.

‘아……. 내가 이렇게까지 무기력하단 말인가? 나의 가장 소중한 소군조차 보호할 힘이 없다니…….’

담수련은 악불군을 보며 안타까운 탄식을 터뜨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그녀는 끝까지 참아야 했다. 그녀가 만약 눈물을 보인다면 상황이 또 이상하게 변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지금 그녀 스스로, 악불군에게 ‘나의 가장 소중한 소군’이라고 생각한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높으신 공자님께서 아가씨를 호위하려는 무사를 이유 없이 죽이신다면 이후 명성에 큰 흠이 되실 겁니다.”

말하는 악불군의 입가에 실 같은 핏줄이 보였다. 사도비류의 장에 내상을 입은 것이다.

“하하하! 잠룡세가에서 우리 마룡세가를 얼마나 우습게 보았으면 일개 비밀시위 따위의 천한 놈이 내게 이렇게 뻣뻣한 거지?”

퍽!

강도가 더 세진 듯 아까보다 더 큰 소리가 울리더니 악불군이 반 걸음 뒤로 밀려났다.

그때 안에 있던 화우성 등이 후다닥 뛰어나왔다. 밖이 소란해지자 뭔가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사도 형! 이게 무슨 짓이오?”

화우성의 외침에 사도비류가 고개를 돌렸다.

“뭐 말이오?”

“축하를 해 주기 위해 오신 분이 이런 소란을 피우는 것이 정상이란 것이오?”

화우성은 종리화와 함께 슬픈 표정으로 서 있는 담수련을 보며 말했다.

“화 형, 말이 좀 이상하구려? 그럼 오룡세가의 소가주인 내가, 비천한 호위 무사 따위가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도 징치하지 못한다는 말이오?”

“사도 공자님, 이자가 어떤 무례한 행동을 했나요?”

악불군을 본 철상아가 미묘한 표정을 보이며 끼어들었다.

“감히 내 앞길을 막았소. 그 정도면 죽어도 할 말이 없는 대죄 아니오?”

“앞을 막은 이유가 뭐지?”

철상아는 악불군을 보며 물었다.

“전 아가씨의 호위 무사로, 아가씨의 곁으로 누구든 삼 장 이내 다가서는 것을 막아야합니다.”

“저 괘씸한 놈이 끝까지 입이라고 변명을 하는구나!”

사도비류는 화우성에게 가졌던 분노에 대한 화풀이 겸, 담수련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 주겠다는 의도로 억지를 부리고 있었지만 누구도 함부로 나설 수는 없었다.

사도비류가 잘했건 못했건 이미 화가 나 있는 상황에서 천한 호위 무사 하나 때문에 나서는 것은 득보다 실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철상아 역시 악불군이 아니었다면 그냥 재미있는 일이 생겼네 정도로 지나쳤을 것이었다.

“솔직히 그렇긴 하네요?”

“무슨 뜻이오?”

“저도 호위 무사가 있는데 누가 제 옆으로 삼 장 가까이 오면 막거든요. 전 그것보다 볼일을 보러 나가신 분께서 왜 담 소저에게 다가갔는지 그게 궁금하네요?”

순간 사도비류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리고 곧 화우성과 철무정이 그를 주시했다.

“담 소저께서 혼자 서 계시기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해서 물어보려고 한 것뿐이오.”

“그러니까 담 소저께서 바람 좀 쐰다고 이미 말하지 않았나요? 약혼자까지 있는 담 소저께 사도 공자님께서 가까이 가는 것은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철상아의 말에 순식간에 악불군이 화제에서 밀려났다. 그로서는 정말 다행히 아닐 수 없었다.

그때였다.

“본 공자가 너무 늦게 와서 사도 공자께서 화가 나신 모양인데, 제가 사과하는 의미로 벌주 세 잔을 마실 테니 그만 화를 푸시지요. 그리고 여러분이 오신 것은 수련이의 생일을 축하하러 오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피를 본다면 즐거운 생일이 어찌 되겠습니까?”

나타난 사람은 담수련의 오빠인 담수운이었다.

만약 사도비류가 계속 고집을 부려 악불군을 압박한다면 이번에는 마룡세가가 잠룡세가를 무시한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었다. 거기다 철상아의 말로 답이 곤궁했던 사도비류로서는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천한 놈이 목숨 줄은 길구나. 담 공자님 말대로 이번은 생일 축하를 위해 온 것이니 이만 참겠다. 하지만 또 같은 무례를 저지른다면 그땐 절대 오늘 같은 운은 없을 것이다.”

사도비류는 입에 피를 머금고 간신히 버티고 있는 악불군을 보고 한마디 하고는 담수운에게 포권을 했다.

“담 공자님의 부탁인데 당연히 풀어야지요.”

* * *

“네놈이 정말 죽으려고 환장을 했느냐?”

모두가 담수운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종리화는 악불군에게 다가와 질책하듯 말했다.

“제가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이런 고지식한 놈을 봤나? 지금 이 근처에 본 가의 무인들이 수십 명이나 포진하고 있어. 그리고 사도 공자는 마룡세가의 소가주다. 그런데 왜 막아?”

“사도 공자는 외부인입니다. 전 제가 믿을 사람이라고 확신이 든 사람 이외에는 누구도 아가씨 옆으로 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너, 내게 그랬지. 아가씨를 영원히 보호할 거라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시한 일로 네가 죽으면 아가씨는 어떻게 보호할래? 좀 사람이 융통성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

이번 말은 좀 설득력이 있었는지 악불군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시시한 일로 죽지 않도록 강해지겠습니다.”

“내가 말하는 의미를 이해 못하겠느냐?”

“이해합니다. 하지만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자가 아가씨의 곁으로 가까이 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는 제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종리화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말했다.

“여긴 내가 있을 것이니 넌 돌아가라.”

“아가씨를 보호해야 합니다.”

“성치도 않은 몸에 정면으로 장을 두 번이나 맞았다. 내상도 간단치 않은 것 같으니 가서 상처부터 치료해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지금 내 명령도 듣지 않겠다는 것이냐?”

“제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분은 아가씨 한 분뿐입니다.”

악불군은 칼같이 말하고는 몸을 훌쩍 날렸다.

‘도대체 저 미련은 뭐야? 정말 임무만을 위해 저럴 수 있는 것일까?’

종리화는 악불군의 모습을 보며 예전의 자신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예전 그녀도 사랑에 눈이 멀어 해서는 안 될 결정을 한 적이 있었다. 종리화는 너무 맹목적인 악불군의 모습에서 사랑이란 단어가 생각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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