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8화>
18화. 성인식(3)
“사도비류 그놈이 수련이 앞에서 악불군을 죽이려고 했다 이 말이냐?”
“예, 사도 공자가 아가씨의 옆으로 다가간 모양입니다.”
“그래서 악불군이 막았겠군.”
“예, 만약 대공자님께서 적시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십중팔구는 죽었을 것입니다.”
“수련이는 왜 혼자 나온 것이냐?”
“대화가 대부분 무림 얘기라 아가씨께서 대화에 끼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문창현의 해석에 담무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수련이가 무림 얘기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 그런데 화우성은 어디에 있었더냐?”
“화 공자님은 안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밖이 소란해지자 철 공자와 철 소저와 함께 나온 모양입니다.”
문창현은 당시 상황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철상아, 그 애가 악불군을 위해 나서 줄 아이가 아닌데?”
“저도 그게 의외였습니다.”
담무룡은 잠시 생각하더니 뭔가 생각이 난 듯 다시 물었다.
“악불군이 첫 장에 맞고 두 걸음을 물러났다고 했지?”
“예. 내상까지 입었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장은 더 강했겠지?”
“보고로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반걸음을 물러섰다고 했다.”
담무룡의 말에 문창현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군요?”
“악불군이 수련이의 호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죽이려고 하고, 거기다 혼약한 화우성이 방 안에 있는 상황에서 겁 없이 수련이에게 수작을 부리려 했다는 건데…….”
문창현의 반문에 담무룡은 대답 없이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사도 공자님께 책임을 묻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겠지……. 가서 이만 연회를 끝내라고 해라.”
“예!”
문창현이 나가자 담무룡의 얼굴이 굳어졌다.
‘새외의 천한 놈들이 원나라 덕에 중원에 자리를 잡고 사도 성까지 받더니, 점점 안하무인으로 행동을 하는군.’
마룡세가는 지금은 원나라에 속하지만 예전에는 새외로 불리던 서장과 서역의 무인들이 만든 세력이었다.
사도비류의 행동은 무서운 것이 없는 오룡세가의 후계자가 할 수 있는 치기 어린 행동으로 치부할 수 있었다.하지만 담무룡은 그의 행동에서 어떤 불안감을 느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제룡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담무룡은 태사의의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중얼거렸다.
* * *
연회가 끝난 후, 사화의 호위를 받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담수련은 계속 말이 없었다.
“아가씨, 기분이 안 좋으신가 봐요? 혹시 사도 공자님 때문에 그러세요?”
매향이 의아한 듯 물었다. 화우성을 만나고 왔는데도 담수련이 전혀 즐거운 표정을 짓지 않아서였다.
“너희는 나가 있어.”
하지만 담수련은 그냥 그녀들 보고 나가라고 했다.
사화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서로를 한 번 보았다. 하지만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그녀의 표정이 너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것이니, 시키실 일 있으면 불러 주십시오.”
사화가 인사를 하고 나가자 방에는 담수련 혼자만 남았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연회 내내 악불군이 보이던 입가의 핏줄기가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잠시 그렇게 있던 담수련은 눈물을 닦고는 입을 열었다.
“소군, 거기 있어?”
[아가씨, 저 여기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몸 괜찮아?”
[이 정도는 제게 상처도 아닙니다.]
“얼굴 좀 볼 수 있어?”
[전 아가씨 방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들어와서 여기 앉아 봐.”
[…….]
“들어오라니까!”
뜻밖의 말에 악불군의 대답이 없자 담수련이 화가 난 목소리로 조용히 다시 말했다.
[아가씨, 전 침소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
[잘못하면 아가씨의 명예에 누가 될 수 있습니다.]
“소군이 들어와서 내 명예에 누를 끼칠 일을 할 거야?”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남의 눈이…….]
“이건 내 명이야. 소군은 내 명은 뭐든지 듣는다고 했지? 빨리 들어와.”
[그럼 불이라도 켜십시오.]
“불을 켜면 밖에 있는 사람들이 소군이 여기 들어온 거 알잖아. 그럼 더 이상하게 보지?”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갈등하는 듯 잠시 침묵이 이어지더니, 그녀의 앞에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육 관에서 배운 호위 무공 중에는 은신술과 잠입술 같은 살수 무공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앉아.”
“아닙니다.”
“앉으라니까!”
담수련이 그에게 이런 식으로 화난 티를 낸 적이 없었다. 악불군은 약간 당황한 듯 자리에 앉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뭐가?”
“아까 정청에서 제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바람에 아가씨의 입장이 난처해지신 것 같았습니다.”
“소군은 바보야?”
“예?”
“잘못은 그들이 했어! 그런데 왜 소군이 죄송하다고 하는 건데?”
“그분들은 지위가 높으신 공자님들입니다. 그리고 전 천한 호위 무사에 불과합니다.”
“내겐 그냥 부모 잘 만나서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자들일 뿐이야. 난 그 사람들보다 소군이 훨씬 더 귀하고 소중해. 만약 소군이 천하다면 소군을 귀하게 보는 나도 천한 거야?”
“아가씨! 어찌 그런 황망한 말씀을…….”
말을 하던 악불군은 입을 닫았다. 창문으로 새어 나온 달빛에 담수련의 눈에 고인 눈물이 반짝 비친 것이다.
담수련은 악불군의 눈을 바라보며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소군이 내게 황망이니 그런 말을 하면 난 정말 슬퍼. 다시 말하지만 소군은 나의 생명의 은인이자, 나를 위해 뭐든 다 해 주는 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야. 사과를 하려면 아까 소군이 맞는데도 말리지 못한 내가 사과를 해야 해!”
말하던 담수련의 눈에서 결국 수정 같은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악불군은 담수련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 만든 것이 너무 마음이 아픈 듯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또…… 가슴이 뛰어…….’
담수련은 악불군의 눈을 보며 자신의 심장이 또 콩닥콩닥 뛰자 당황한 듯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차 마셔. 내가 처음으로 직접 따라주는 차지? 미안해 내가 너무나 내 생각만 했어.”
악불군은 담수련이 손수 찻잔에 차를 따라 자신에게 권하자 황공하다는 듯 말렸다.
순간 둘의 손이 살짝 닿고 말았다. 그리고 둘은 깜짝 놀라 손을 뗐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기운이 닿은 손에서 찌릿하며 심장까지 전해지는 느낌을 동시에 받았기 때문이었다.
“제가 감히 아가씨의 존체에 손이 닿았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악불군이 급히 용서를 빌었지만 담수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슴이 뛰는 현상도 이해를 못해 고심하고 있는데 또 다른 현상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짜릿한 느낌이 전혀 싫지 않았다.
“내일부터 꾀 안 부리고 진짜 열심히 무공 배울 거야. 그래서 소군을 더 이상 힘들게 만들지 않을 거야.”
“아가씨의 총명함은 제가 잘 압니다. 마음만 먹으신다면 누구보다 빨리 무공이 일취월장할 것입니다.”
악불군의 칭찬이 듣기 좋은 지 담수련의 얼굴에 배시시 미소가 나타났다.
‘아가씨는 웃을 때 가장 예쁘십니다. 다시는 아가씨 눈에 눈물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담수련의 웃는 얼굴을 본 악불군은 갑자기 가슴이 뛰자 급히 고개를 숙이며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차가 정말 맛있습니다.”
“내가 끓인 거 아니야.”
“누가 끓인 것이 대수겠습니까? 아가씨께서 손수 따라 주었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난 소군을 내 친오빠 이상으로 생각해. 그러니까 다시는 다치지 마. 그리고 오늘 같은 일이 생기면 절대 그냥 맞지 말고 덤벼. 만약 상대가 너무 강하면 도망가. 약속할 수 있어?”
‘죄송하지만 그것은 약속을 드릴 수가 없군요.’
악불군은 다시 중얼거리며 찻잔으로 입을 가져갔다.
“왜 대답 안 해?”
“아가씨, 너무 늦었습니다. 며칠 후면 곧 생신이신데 잠이 모자라면 얼굴에 안 좋습니다.”
“소군이 그런 것은 어떻게 알아?”
“추국에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소군은 언제 자?”
“전 수시로 토막잠으로 충분한 휴식을 취합니다. 그리고 운기로 피곤을 풀기도 하고요.”
“그래도…… 이젠 내가 잘 때는 소군도 자기 방에 가서 자. 여긴 나를 지키는 시녀들도 많잖아. 그 애들도 상당히 무공이 높아.”
“압니다. 하지만 아가씨 곁을 떠나 있으면 제가 잠을 더 못 잡니다. 그리고 근처에 제가 숨어 있을 곳이 많습니다. 생각보다는 편하니까 걱정 마십시오.”
담수련은 곁을 떠나 있으면 더 잠을 못 잔다는 말에 이상하게 다시 가슴이 쿵쾅거리며 얼굴이 뜨거워 오자 급히 말했다.
“어쨌든 이만 가서 푹 쉬어.”
“예. 편히 주무십시오. 아가씨.”
“휴우~ 왜 자꾸 소군만 보면 가슴이 뛰고 눈물이 나려고 하는지 모르겠네…….”
악불군이 사라지고 다시 침상에 누운 담수련은 잠에 들지 못한 채 뒤척이고만 있었다.
* * *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악불군은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애초에 사도비류에게 당한 일 정도는 마음에 담아 놓지도 않았다. 이미 어린 나이에 그보다 더한 일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반 시진가량 운기조식을 하던 악불군은 갑자기 이상한 자세를 취했다. 천륭검보에서 본 그림의 자세였다.
그동안 그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각 자세는 신체의 각 부분을 강하게 단련시켜 주는 것으로 판단했다.
‘운기조식보다 이 자세가 더 빨리 몸의 상태를 원상태로 돌려주고 있어. 이게 무슨 원리일까?’
우연히 무명 비급의 그림이 특별한 효과가 있다는 것을 느낀 후, 무명 비급의 자세를 소림내경일지선의 원리로 분석하는 것이 그의 일과가 되어 있었다.
다행히 담수련이 움직이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 시간은 충분했다.
악불군은 자신이 지금 담무룡이 이십 년도 넘게 연구를 했지만 알아내지 못한 천륭검보의 진정한 단서를 찾았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륭검보를 익히기 위해서는 세 가지 필수 조건이 있었다. 바로 그림의 자세를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신체 유연성과 다음 자세로 재빨리 바꿀 수 있는 반사신경 그리고 자세를 몇 시진씩 할 수 있는 인내심이었다.
어찌 보면 무림인들에게 너무 쉬운 조건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는 천륭검가의 사람들조차 칠 성 이상 익힌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심지어 무황으로 불리던 구문황조차 십 성까지 익히지 못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그 조건을 모르는 담무룡으로서는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그 자세를 펼치면 몸의 근육이 편해진다는 것을 알고 매일 담수련을 보호하며 홀로 그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니, 악불군 같은 끈기와 고집이 없었다면 역시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 한 자세만 잡기도 어려웠던 처음과는 달리 연속동작까지 해 내고 있었으니 만약 담무룡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한참동안 동작을 바꾸던 악불군은 정좌를 하고는 긴 호흡을 했다.
‘동작마다 편하게 해 주는 부위가 있어. 참 특이한 자세야.’
쿡쿡 쑤시던 내상의 고통이 어느새 사라지자 악불군은 눈을 떴다. 그리고 가지에 등을 대고 누웠다.
그리고 항주성에서 싸웠던 자들과의 결투 장면을 반추하기 시작했다. 사도비류와는 싸웠다기보다는 그냥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었지만, 항주성에서 싸운 납치범들과는 그의 첫 생사결이었기에 자주 생각을 하며 실전 감각을 기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자가 한 말이 무슨 의미였을까?’
결투장면을 반추하며 어떤 초식으로 상대하는 것이 최선이었을까를 생각하던 악불군이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담수련을 기습했던 자의 떠나면 마지막으로 외쳤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의 등에 단검을 박았던 중년인은 잠룡대가 달려오자 악불군을 원망스럽게 쳐다보며 ‘중원의 배신자! 원나라의 개!’라는 말을 남기고 도망을 쳤었다.
“약한 여인을 납치하려고 했던 자들이 오히려 나보고 배신자라고……?”
그는 이미 담수련의 호위에 일생을 바치기로 맹세를 했고 그 결정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그들은 악불군의 적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이 자꾸 그를 심란하게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