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9화 (19/472)

<천검지애 19화>

19화. 지난 이야기(1)

이튿날 아침.

“아가씨, 화 공자님께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악불군의 몸이 걱정이 되어 잠까지 설친 담수련은 이제 나가서 악불군을 부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매향의 보고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혼약을 한 사람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담수련의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르던 화우성은 담수련의 표정이 밝지 않자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어디 몸이 안 좋으십니까?”

혼약을 한 사이였고 수십 통의 서찰을 통해 많은 대화를 나눈 둘이었지만 이번 만남은 이상하게 서먹하다는 것을 화우성도 느끼고 있었다.

“아니에요. 그냥 오늘 좀 피곤하네요. 화 공자님께 밝은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는데 죄송해요.”

“제가 더 죄송하지요. 어제 사도비류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하셨을 겁니다. 호위 무사의 일도 제가 강력하게 막아 줬어야 하는데 끼어들기가 어려웠습니다.”

“저도 세가에서 자랐습니다. 성 오라버니께서 끼어들기 어려웠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일개 소모품에 불과한 천한 호위 무사 때문에 혈맹인 우리 오룡세가의 공자들이 척을 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연 매가 더 곤란해질 수도 있고요.”

‘나랑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그동안 가졌던 많은 대화와 서찰은 단지 위선이었단 말인가…….

담수련은 ‘소모품에 불과한 천한 호위 무사’라는 말에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확 올라왔지만 간신히 참았다. 이미 어제의 만남으로 사도비류를 비롯 세가의 공자들에게 느낀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도비류는 그 후에도 계속 자신을 끈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고, 티가 날 정도로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 행동하는 철무정도 속마음은 다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남자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였지만 그 정도는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오룡세가의 천금이자 이미 혼약까지 한 자신에게 이럴 정도면, 그들이 밖에서 여인들에게 어떤 행동을 할지는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조금은 다를 줄 알았던 화우성의 말은 그녀에게 깊은 실망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화우성이 무조건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태어나기를 높은 지위에 태어나 수하들은 소모품으로 교육을 받은 그로서는 그런 생각이 당연할 수도 있었다.

담수련은 그와 혼약을 맺었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 * *

머리부터 수염까지 온통 하얀 노인 한 명이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보기만 해도 압도될 정도로 산중턱에 지어진 거대한 장원.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단 한 군데밖에 없는 완벽한 요새(要塞)였다.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밤, 장원을 향해 수백 발의 불화살이 날아가고 그것을 신호삼아 복면을 한 수천 명의 무인들이 장원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 싸움은 사흘이 지나서야 끝났다.

“역시 천륭검가로구나. 무려 삼천이나 끌고 왔거늘 사흘이나 걸리다니…….”

불에 타고 있는 천륭검가를 보며 다섯 명의 복면인 중 선두에 있던 자가 감탄의 목소리를 내 뱉었다.

“대공(大公) 전하! 천륭검가의 모든 생명체, 사람 삼백이십삼 명, 말 사십오 필, 개 일곱 마리 그리고 돼지와 소, 염소 모두 합쳐 서른두 마리, 그리고 닭 오백육십 두까지 전부 죽였습니다. 이제 천륭검가는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그래……. 드디어 천륭검가가 사라졌군……. 우리의 피해 상황을 말해 봐라.”

“삼천 명 중 일천칠백오십일 명이 죽었습니다. 또한 부상이 사백육십칠 명이고, 그중 일백사십 명 정도는 중상입니다.”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로구나.”

복면인은 불타는 천륭검가를 다시 한번 쳐다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독을 풀고 불화살을 날리고, 거기에 더해 열 배가 넘는 전력에 가장 경계가 취약하다는 삼경을 택해 기습까지 했건만…… 허허! 이런 피해라니…….”

그때 한 명의 복면인이 또 나타나더니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이냐?”

“대공 전하! 천륭검가의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찾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갖기 위해 이 엄청난 피해를 감수했는데, 찾을 수 없다니!”

대공으로 불린 자가 노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무릎을 꿇은 복면인은 머리를 땅에 대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천륭검가에서 우리의 기습을 눈치챈 것 같더냐?”

“전혀 눈치 못 챈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급히 어딘가에 숨겼거나 누군가 가지고 도망을 쳤을지도 모른다.”

“비밀 장소가 있을지 모르니 벽과 땅 속까지 샅샅이 뒤지라고 했습니다. 안에 있다면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도망간 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어떻게 확신하느냐?”

“저희가 파악한 숫자와 죽인 자의 숫자가 똑같습니다. 확실합니다.”

잠시 생각하던 대공은 차가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혹시 우리보다 먼저 안에 들어간 자가 있느냐?”

“오대세가의 무인들과 저희가 거의 동시에 천륭검가의 중지에 진입했습니다. 만약 그곳에 천륭검보와 천륭검이 있었다면 우리의 눈을 피해 빼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빼낼 수 없다고? 아니…… 빼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놈들이 있다.”

“오룡을 말하시는 거라면, 그들은 모두 저희보다 늦게 도착했습니다.”

“봤냐?”

“제가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수하들이…….”

“됐다. 우선 장원 전체를 뒤집어엎어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찾아라.”

“예!”

대공은 불타는 천륭검가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손을 들더니 손가락을 까닥했다.

“혈랑무 열 명에게 이곳을 빠져나간 자가 있는지 찾아내라고 해라.”

혈랑무는 대공의 친위대로서 무공뿐만 아니라 추적과 감시에 특화된 자들이었다. 그들이 조사를 한다면 누구든지 추적을 피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예전 천륭검가를 멸문 시킬 당시를 생각하던 대공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장원을 모조리 뒤졌지만 결국 천륭검보와 천륭검은 찾아내지 못했다.

이후 대공은 무려 이십오 년간을 혈랑무로 하여금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찾게 했다. 심지어 이미 멸문한 천륭검가까지 계속 감시하도록 했다.

혹시 누군가 찾아올 것을 대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는 천륭검보나 천륭검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십오 년을 뒤졌다. 그리고 이제 용의자는 한 명으로 좁혀졌다.’

중얼거리는 대공의 눈에서는 강렬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 * *

“공자님!”

누워 자고 있던 화우성은 갑작스런 목소리에 눈을 떴다.

“지금 시간에 무슨 일이냐?”

들어온 자는 화우성의 군사로 그를 보필하기 위해 따라온 정우택이었다.

“가주님의 급한 전갈이 들어왔습니다.”

“아버님의 전갈? 들어와라.”

화우성은 불을 켰다. 그리고 그와 화정무만이 아는 밀어로 적힌 종이를 읽더니 눈이 커다래졌다.

“이게 무슨 소리야?”

화우성은 이해가 안 가는지 몇 번을 읽어 보더니 뭔가 생각에 잠겼다. 그가 잠룡세가에 도착한 것이 이제 오 일이었다.

이틀만 있으면 담수련의 성인식이 시작될 것인데, 놀랍게도 서찰에는 즉시 잠룡세가에서 철수하라는 명이 적혀 있었다.

‘내가 세가를 떠나고 나서 뭔가 아주 중요한 일이 벌어졌다는 말인데……. 아무리 그래도 나와 혼약한 담 소저의 성인식인데 이렇게 돌아가면……?’

화우성은 화정무가 파혼까지 염두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옆에 있으면 묻기라도 하련만…….

“공자님!”

그때 자신의 처소 외곽 경계를 맡고 있던 무사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또 무슨 일이냐?”

“좀 이상한 일이 있어서, 아무래도 보고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왔습니다.”

“이상한 일? 들어와라.”

“예.”

무사는 안으로 들어오더니, 정우택이 같이 있자 급히 인사를 했다.

“이상한 일이라니 무슨 말이냐?”

“제가 담당하고 있는 지역이 마룡세가에서 묵는 빈청과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 은밀히 하고는 있지만 그들이 짐을 싸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짐을 싸?”

“예!”

“수하들에게 철룡세가가 묵는 곳도 가서 살펴보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뭔가 큰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한데…… 무슨 일이지?’

화우성은 그 와중에 담수련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이 첫눈에 반한 여자.

그리고 자신의 짐작보다 더 아름답고 깨끗하게 자란 그녀와 잘못하면 영영 이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강하게 온 것이다.

“안 되겠다. 내가 잠깐 나갔다 오마.”

“공자님, 가주님께서 혹시 이런 일이 생길 경우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계셨다는 것이냐?”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말해 봐라.”

“만약 공자님께서 가주님의 명을 받고 결정을 못할 경우 ‘득천하 후 취여인(得天下 後 取女人)’이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화우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천하를 얻은 후 여인을 취해라.’

말은 좋지만 담수련을 버리라는 말과 다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말뿐이었느냐?”

“예.”

화우성은 심히 갈등을 하는 듯 몇 번이나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는 부모의 뜻을 저버리기에는 아직 어렸다.

‘그래, 지금 간다 해서 연 매와 끝나는 것은 아니야. 아버님께 가서 무슨 이유인지 알아보고 다시 오자. 어차피 혼인은 이 년 후가 아니던가…….’

스스로를 달랜 화우성은 결정을 한 듯 말했다.

“떠난다. 준비해라.”

“예!”

* * *

“소가주님, 이제 곧 출발한 것인데 어디 가시려고요?”

사도비류가 나가려 하자 독갈적수가 앞을 막으며 물었다.

“너희는 내가 도착하는 즉시 떠나도록 준비하고 있어라. 그리고 내 마차는 깨끗이 치워 놓고.”

“소가주님, 함부로 행동하셨다가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걱정 말고 기다려라.”

사도비류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자 독갈적수는 몸을 비키고 말았다. 그의 성격을 알기 때문이었다.

‘전부 떠날 준비를 한다는 것은 제룡회에서 잠룡세가를 버렸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그 계집을 내가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지.’

놀랍게도 사도비류는 이런 상황에서도 담수련을 납치해 가기로 한 것이다.

이미 그는 잠룡세가의 경비망과 담수련을 호위하는 자들의 무공을 숙지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들을 속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얼굴에 복면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담수련이 머무는 전각의 담을 넘은 사도비류는 커다란 바위에 찰싹 붙었다. 사술을 비롯해 방문좌도의 특이한 무공을 많이 사용하는 마룡세가의 소가주답게 은신술 역시 대단했다.

사도비류는 전각 주위를 살피더니 피식 웃었다.

‘담 가주답군. 남자 호위 놈들은 대부분 외곽을 경비하고, 주위에 계집들만 있어. 딸이 예쁘니까 남자를 옆에 두는 게 겁나겠지. 하지만 그 덕에 생각보다 일이 쉽겠군.’

사도비류는 그림자를 타고 담수련의 침소 벽에 딱 붙었다.

그는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듣자 혀로 입술을 한 번 훔쳤다.

‘숨소리까지 사람 흥분하게 만드는군. 이제 평생 내 옆에서 나만 바라보며 살게 해 주지.’

조심스럽게 창문을 연 사도비류는 가볍게 안으로 들어갔다.

수십 명의 호위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그가 담수련의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천려일실(千慮一失)이 있었다.

담수련이 악불군의 상처 걱정으로 아직 잠을 안 자고 있었고, 눈이 창문을 향해 있었다는 것이었다.

“누구…….”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들어오자 놀라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던 담수련의 입과 몸이 굳어 버렸다.

담수련의 목소리를 들은 사도비류가 깜짝 놀라 그녀의 아혈과 마혈을 같이 짚은 것이다.

[흐흐흐! 너 같은 계집을 내가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지.]

사도비류는 그녀를 이불로 감싸고는 어깨에 멨다.

담수련은 너무 놀라 소군을 크게 불러 댔지만 그녀의 목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생각 외로 너무 쉽게 담수련의 납치에 성공한 그는 회심의 미소를 그리며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담수련이 찰나간 내뱉은 작은 소리까지 놓치지 않고 있는 최고의 호위무사가 그녀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그는 간과했다.

휙!

창밖으로 나온 사도비류는 자신의 허리를 향해 날아오는 날카로운 검기에 몸을 회전했다.

하지만 그를 공격하는 검은 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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