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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21화 (21/472)

<천검지애 21화>

21화. 혈랑사자

쾅!

담무룡은 앞에 놓인 탁자를 손으로 치며 일어섰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탁자는 그의 일 장에 완전히 가루로 변해 버렸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거요!”

“내공이 더욱 심후해지셨군요. 설마 나를 여기서 죽이지는 않으시겠지요?”

“혈랑사자도 알다시피 대공과 난 이십오 년 전 일을 끝으로 서로 간에 더 이상 관여는 하지 않기로 약속했소! 그리고 난 협력자이지 대공의 부하가 아니란 것을 명심하시오.”

“맞습니다. 분명 대공 전하께서는 가주님께 부귀영화를 약속하시며 절강이라는 가장 좋은 지역을 주셨습니다. 그때 일이 깨끗하게 끝났다면 아마 제가 찾아오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일이 완전히 마무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랑 아무 연관이 없는 일을 지금 와서 무조건 가지고 와라 한다면, 그냥 핑계 삼아 나를 제거하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구려.”

“대공 전하께서 가주님을 제거하려면 핑계 따위를 만드실 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아실 텐데요? 전하께서 일 년이나 시간을 주는 것도 그만큼 가주님께서 심사숙고해서 올바른 결정을 하시라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혈랑사자는 가루가 된 탁자를 힐끗 보더니 몸을 일으키더니 포권을 하며 다시 말했다.

“전 가주님께서 후회할 결정을 내리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전언을 다 전했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담무룡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혈랑사자가 그대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담무룡이 대노할 실로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지금 그는 그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대공…… 이자가 진짜 뭔가를 알고 있나?’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자 중 한 명인 담무룡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뒷짐을 진 채 집무실을 왔다 갔다 하던 담무룡은 뭔가 결심이 선 듯 비상줄을 잡아당겼다.

“부르셨습니까?”

“문창현 보고 들어오라고 해라.”

“존명!”

* * *

“분명합니까?”

“분명하네.”

잠룡세가의 한쪽 안 쓰는 방에서 두 명의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담수련의 생일이 이제 겨우 이틀 남았네. 그런데 갑자기 오룡세가 사람들이 모두 세가를 떠났네. 오룡세가는 서로 간에 반목을 하면서도 절대 적대시는 하지 않았네. 그런데 이번일은 그들이 잠룡세가를 적대시하겠다는 신호라고 보이네. 문제는 혼약을 한 화룡세가까지 떠났다는 것이네.”

“지금 본 세가를 적대시할 사건이 없었지 않습니까?”

“거기까지는 노부도 모르겠네. 하지만 가주가 비상회의를 소집했어. 노부의 짐작이 맞다면 지금 잠룡세가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것이 분명하네.”

“잠룡세가의 힘은 세간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더 거대합니다.”

“아무리 거대하다 해도 더 거대한 힘 앞에는 무너지네. 자네는 지금 우리에게 아주 중요하네. 노부는 자네가 세가를 빠져나갔으면 싶네.”

“아직은 아닙니다.”

“그리고 담수련 문제는 미안하네.”

“아닙니다. 저도 수련이의 호위가 그렇게 강할지는 몰랐습니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대화를 나누던 한 명이 밖으로 나왔다.

달빛에 비친 얼굴, 담수운이었다.

* * *

의숙에서 상처를 꿰매고 금창약만 바른 악불군은 즉시 담수련의 처소의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세상 어디보다 담수련이 있는 곳이 가장 편했다.

‘꽤 놀라신 모양이군? 아가씨께서 짧게라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악불군은 담수련의 방에 아직도 불이 켜져 있자 침입자가 담수련을 납치해 방 밖으로 나올 때까지 몰랐다는 것에 큰 자책감이 들었다.

담수련의 방이 잘 보이는 곳의 나뭇가지에 등을 대고 앉은 악불군은 눈을 감았다.

육 관을 통과하고 나올 때까지만 해도 담수련을 보호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자신감은 많이 퇴색했다.

생각 외로 고수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사실 악불군이 자신이 상대한 자들이 얼마나 대단한 고수들인지 알았다면 자책감이 아니라 자부심을 느꼈어야 했다.

약간은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던 악불군이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그자에게 어떻게 상처를 입혔지?’

침입자는 내공도 그보다 상당히 높았고 조법 역시 강력했고 빨랐다. 특히 그의 마지막 공격은 악불군의 보법이나 검법으로 막아 내는 것은 물론 피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처를 입고 물러난 것은 침입자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당시 상황을 반추하던 악불군의 눈이 번쩍 떠졌다.

‘설마……?’

* * *

“문 군사!”

문창현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담무룡이 부르자 긴급 상황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무슨 일이 생기셨습니까?”

“대공이 내 뒤통수를 칠 것 같다.”

“예에?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말 그대로다.”

“주군, 대공과 척을 지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내가 척을 지는 것이 아니라 대공이 나를 배반하는 거다.”

“이유가 뭡니까?”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내가 빼돌린 것으로 오해를 한 것 같다.”

“그건 이미 이십오 년 전 일 아닙니까? 그런데 왜 대공께서 갑자기?”

“그것을 모르니까 너를 부른 것이다. 어떻게 대처했으면 좋겠느냐?”

“대공이 경고 같은 것을 했습니까?”

“일 년간의 시간을 줬다.”

“그건 다행이군요.”

“다행이라고 판단하느냐?”

“대공 성격에 경고도 안 하고 공격했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일 년이라는 시간을 준 덕에 우리가 대비할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문 군사는 대공이 정말 우리를 위해 대비할 시간을 주었다고 생각하나?”

“그, 그렇지는 않겠지요…….”

“내가 아는 한 대공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잠룡세가는 원에 아주 친밀한 무림세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잠룡세가를 대공이 다짜고짜 공격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원나라에 협조적인 세력들이 혼란스러워하겠지요.”

“일 년이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대비할 시간이 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자중지란이 일어나 스스로 무너질 수도 있는 시간이다.”

잠룡세가의 간부급들은 대부분 친원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미 중원의 배신자로 낙인이 찍혀있어서, 원나라와 척을 지게 될 경우 사방이 모두 적이 되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었다.

담무룡이 원나라와 척을 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잠룡세가 내에서 이탈하는 자들이 분명 생길 것이었다.

“가주님께서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진짜 가지고 계십니까?”

“당연히 없다.”

담무룡은 이런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시치미를 뗐다.

“그렇다면 증거는 없겠군요. 대공도 오로지 심증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대공에게 오해를 풀 노력을 해보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공에게 오해란 없다. 한번 결정을 하면 바로 그것이 계획이 되는 사람이지.”

문창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잠룡세가의 전력은 오룡세가에서도 철룡세가와 함께 가장 강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어찰단을 움직일 수 있는 대공과 견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걸 내게 물으면 어떡하느냐? 군사인 네가 방법을 찾아내야지. 모든 방법을 강구해보고 결국 방법이 없다면 담수운과 담수련이라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라.”

“주군, 대공이 노린다면 천하에 무사할 수 있는 세력은 없습니다. 주군께서 대공을 한번 만나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가지고 오라는데, 없는 것을 어떻게 가지고 간단 말이냐?”

“그러니까 없다는 것을 납득시키셔야지요.”

담무룡은 잠시 대공의 얼굴을 생각했다. 그리고 곧 고개를 저었다.

“내가 대공을 만난다면 온갖 치욕을 다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살아난다는 보장도 없지. 그런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 일 년 동안 가주님께서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찾아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대공도 이십오 년을 찾았는데 못 찾은 것을, 내가 무슨 재주로 일 년 안에 찾아? 그리고 찾았다 쳐도 대공은 믿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훔쳐 갔다가 협박을 하니 찾은 척 가지고 왔다고 더 의심을 할 게다.”

문창현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대공은 수만 명에 달하는 어찰단을 수족처럼 부리고 뿐만 아니라 개개인이 절정 고수인 혈랑무를 천 명 넘게 데리고 있었다.

더구나 군부까지 움직일 수 있기에, 일개 무림 세력이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주군, 대공이 정말 본 가를 친다면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대공은 파샤원정 당시 한 번도 전쟁에서 진 적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병법가이기도 하다. 그는 언제나 상대를 구석으로 몰아 공포에 질리게 만들어 저항할 의지까지 꺾어 버린 후 공격을 한다. 이긴 후에는 모조리 죽여 반항한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보여주지. 그래서 대부분은 공포에 질린 수하들이 도망을 쳐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진 경우도 많다.”

“대원제국이 초기에 가장 많이 사용한 병법이지요.”

“그런데 그 방법이 통하지 않은 곳이 있었다. 바로 천륭검가였다. 비록 수가 천여 명에 불과했지만 하나하나가 고수였고 구문황이라는 천하제일고수가 버티고 있어, 대원제국조차 너무 큰 피해가 예상된다 하여 손을 대지 못했다. 결국 구문황이 죽은 후에 공격을 했지만 그들은 한 명도 도망치지 않았다.”

“승리라고 할 수 없는 큰 피해를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주군…….”

“말해라.”

“주군께 죽음으로 고언을 하겠습니다. 천륭검가와 잠룡세가는 다릅니다. 잠룡세가는 전자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 아주 많이 다르지. 그러니 일 년은 우리에게 기회도 되지만,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그대로 무너지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문창현.”

“예.”

“이미 화해는 물 건너갔으니 기대를 접고 이 위기를 벗어날 묘책을 구상해라.”

문창현은 담무룡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미 불안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정면 대결은 절대로 안 됩니다. 우선 소나기는 피하는 것이 좋지요. 주군, 급한 대로 지하로 숨으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지하로 숨는다고 뾰족한 수가 있겠느냐? 아니, 지하로 숨을 수나 있겠느냐?”

“해야지요. 최소한 주군과 소가주 그리고 아가씨는 안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난 상관없다. 수운이와 수련이만 안전하면 된다. 할 수 있겠느냐?”

“우선 집안 단속부터 확실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하들의 동요를 먼저 잡은 후 다음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계획을 짜면서 생각해 보겠다고 한다면, 담무룡은 당장 질책을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대공이었다. 담무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문 군사의 능력을 믿어 보겠다.”

“예!”

대답을 한 문창현이 나가자 담무룡은 자신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언제나 차갑고 당당하던 담무룡의 표정은 상당히 지쳐 보이고 있었다.

심지어 담수련을 납치하려고 했던 중요한 사건까지도 잊을 정도였다.

‘대공, 하지만 내가 끝난다 해도 잠룡세가가 끝난 것은 아니다.’

태사의의 옆에서 연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담무룡의 손아귀에 잡힌 태사의의 손잡이가 타오른 것이다.

* * *

‘감히, 아가씨를 노린 자…… 사도비류 그자가 확실해!’

악불군은 너무 어둡고 복면까지 해서 상대가 누군지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가 내뱉은 목소리에서 사도비류라고 확신했다.

‘내가 듣기로 마룡세가가 대단하긴 해도 본 가를 이런 식으로 건드릴 정도의 힘은 없는 걸로 아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악불군에게 담수련 외의 다른 일들은 다른 세상의 일이었고,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담수련만 지킨다는 그의 생각이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언제든지 그를 담수련의 곁에서 떼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감지한 덕분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어.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난 아무것도 아니야. 누구도 방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야만 해.’

담수련을 지키기 위해 강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부단히 노력을 했지만, 그가 익힌 무공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그였다.

‘그래, 사도비류의 얼굴에 검을 찌를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을 찾아야 해.’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눈은 담수련이 처소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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