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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22화 (22/472)

<천검지애 22화>

22화. 비밀

자신의 집무실에서 상황을 분석하고 있던 종리화는 가늘게 들리는 방울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담무룡은 지난날 대공과 함께 수많은 문파들을 멸문시키면서 비밀통로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의 거처와 자신의 집무실 간에 직통으로 이어지는 비밀통로로 만들어 두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담수운과 담수련 그리고 종리화였으니, 그가 종리화를 얼마나 믿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잠룡세가에 몸 담은 지 십오 년……. 저 비상종이 울리는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구나.’

중얼거린 종리화는 집무실안의 개인 연공실로 들어가더니 뭔가를 조작했다. 그러자 벽에 구멍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가 안으로 사라지자 벽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주군, 종리화입니다.]

담무룡의 집무실에 도착한 종리화는 조심스럽게 전음을 날렸다.

[지금 이 주위는 완벽하게 봉쇄가 되어 있으니 들어와도 된다.]

[무슨 일인데 십오 년이 넘게 울리지 않던 비상종까지 발동하신 거지요?]

열린 벽으로 나온 종리화는, 담무룡이 심각한 표정으로 태사의에 앉아 있고 손잡이가 완전 가루가 되어 있는 것을 보자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오룡세가의 갑작스런 철수로 그녀 역시 뭔가 일이 있다는 것은 짐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은밀하게 부를 정도라면 그녀의 상상 이상의 사건이 벌어졌음이 분명했다.

[이리 가까이 와라.]

담무룡은 종리화의 얼굴을 자세히 주시하더니 침중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도 나를 사랑하느냐?]

혈의나찰로 불리는 종리화가 사랑했던 사람은 바로 담무룡이었다.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그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느냐?]

[한번 주군은 영원히 주군이지만 한번 사랑은 영원하지는 않더군요.]

종리화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담무룡의 입가에 미소가 나타났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비록 혈의나찰이라는 무시무시한 명호를 얻은 그녀였지만 중원을 배신하고 원나라를 도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 그녀가 마음을 바꾼 것은 오로지 담무룡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미안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네게만은 언제나 미안했다.]

[주군께 미안하다는 말을 듣다니, 정말 뜻밖이네요.]

잠룡세가에서 담무룡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었던 단 한 명, 종리화와 담무룡 간에 존재하는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

그것은 이뤄지지 못한 사랑이었다.

[네 사랑을 받아 주지는 못했지만 난 너를 가장 아끼고 믿었다.]

종리화는 뭔가 복잡한 눈빛으로 담무룡을 쳐다보더니 한숨을 살짝 내 쉬었다.

[휴우~ 전 제가 죽을 때까지 주군께 이런 말을 들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대체 무슨 일이세요?]

[지금 본 세가에 확실히 내가 믿을 사람이 너밖에 없다.]

종리화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녀가 아는 바로는 담무룡의 주위에는 충성스런 수하들이 넘쳐 나고 있었다.

[문 군사도 있고 가 대장을 비롯해 장로들과 간부들도 있는데 믿을 사람이 없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이해가 안 가겠지만 사실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문 군사와 가 대장까지 믿지 못한다고 하시는 겁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확실하게 이행해 주어야 한다. 대공이…….]

담무룡의 전음을 듣던 종리화의 눈이 점점 커졌다.

[대공 그자가 왜? 그런 오해를 한 거죠?]

[오해가 아니다.]

[그게 무슨?]

[내가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빼돌린 것은 사실이다.]

문창현에게까지 말하지 않던 사실을 말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종리화를 믿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주군! 도대체 왜 그렇게 위험한 짓을?]

종리화는 경악을 한 듯 커다랗게 말했다.

[천륭검가는 중원 무림의 자존심이다. 내가 비록 사세(事勢)에 밀려 저들과 손을 잡기는 했지만, 천륭검보와 천륭검까지 대공한테 넘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내가 천륭검가의 지위를 가지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지.]

[하긴 제가 주군에게 완전히 반한 것이 바로 그런 성격 때문이긴 했지요.]

[나의 무모한 행동을 이해한다는 말이냐?]

[무모한 것이 아니라, 원나라 놈들에게 자존심까지 넘기실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또 있나요?]

[네게 처음으로 말한 것이다.]

[그럼 대공이 왜 이십 년도 지나서 주군을 의심하게 된 걸까요?]

[내가 비밀 연공실에서 은밀하게 다른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는 자들이 몇 명 있다. 그들 중 한 명이 대공의 첩자라고 생각한다.]

[그럼 주군께서 천륭검가의 무공을 다 익히셨습니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기대하는 마음이 들어 있었다. 담무룡이 천륭검보를 다 익혔다면 대공의 공격도 버틸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혀 소득이 없었다.]

[주군께서는 백 년에 한 번 나오기 힘들 정도의 천고기재라는 말을 듣던 분이신데, 이십 년 동안 아무 소득이 없었다니 말도 안 됩니다.]

[담수운에게 가르치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나조차도 아무 소득이 없어 결국 실패를 했다.]

종리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리고 그녀는 입술을 잘근 씹더니 말했다.

[제가 장담하건대 잠봉단에는 절대 배신자가 없습니다. 오늘부터 제가 잠봉단과 함께 주군을 밀착 경호하겠습니다. 누구도 저를 죽이지 않고는 주군에게 위해를 가할 수는 없을 겁니다.]

종리화의 말에 담무룡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난 네가 여기에 있는 것보다 내 부탁을 들어주기를 바란다.]

[뭐든지 명하세요.]

[우리가 만든 계획을 실지로 발동해야 할 것 같구나.]

담무룡의 말을 들은 종리화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당장 고개를 저었다.

[주군. 제가 십오 년 넘게 잠룡세가에 있는 이유가 뭔지 아시죠?]

[안다.]

[제 성격에 팔자에도 없는 유모 노릇을 십 년을 넘게 했어요. 물론 아가씨를 저도 사랑해요. 하지만 주군이 없었다면 절대 안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젠 주군 없는 곳에서 담씨의 귀신이 되라는 말인가요? 제게 너무 가혹한 것 같지 않나요?]

[수련 어미가 죽은 후 미친 듯이 무공 수련을 한 적이 있었다.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오늘 일의 사달을 만든 물건을 취득한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 일 년 정도 폐관을 했는데 천륭검보를 익히던 중 주화입마에 걸렸다.]

종리화는 갑작스런 담무룡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묵묵히 그를 쳐다보았다.

[이십 년 전 너를 처음 만났을 때 이미 난 남자 구실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너를 받아 줄 수 없었지. 하지만 나도 사실은 너를 사랑했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미안하다는 말에도 감동을 받았던 종리화였다.

그런데 평생 그렇게 듣고 싶었던 사랑했다는 말을 듣자 이상하게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내 마음에 대못은 다 박아 놓고! 짝사랑이 얼마나 괴로운 줄 아세요?]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지 않느냐?]

[당신은 정말 잔인한 분이세요. 결국 진심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그 말 한마디로 또 나를 엮는군요. 알았어요. 시키신 대로 하지요. 대신 불리하다 싶으면 후퇴하는 방법도 생각해 보세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요.]

말을 마친 종리화는 몸을 돌려 그대로 사라졌다. 나찰로 불리는 그녀였지만 역시 사랑에는 약한 여인이었다.

‘종리화의 눈에 눈물이라……. 살다 보니 별걸 다 보는군.’

중얼거리는 담무룡의 얼굴은 상당히 어두웠다.

만약을 대비해 이미 오래전부터 이럴 경우 대처할 방법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니 불안하고 당황스러운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 * *

가지 위에서도 쉬지 않고 자세를 바꿔가던 악불군은 뭔가 이상한 느낌에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이게 무슨 느낌이지? 교두님들이 호위무공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저절로 위험을 몸이 감지한다고 했는데, 그건가……?’

[지금 나를 느낀 거냐?]

그때 그의 귀에 들리는 전음에 악불군이 깜짝 놀라 검을 뽑으려고 했다.

[나다. 은밀히 얘기할 것이 있으니 조용히 해라.]

[가주님?]

악불군이 놀라 반문하는 순간 그의 앞에 담무룡이 나타났다.

[편한 곳이 아니니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다.]

악불군이 급히 예를 갖추려하자 담무룡이 손을 젓더니 나뭇가지에 털썩 앉았다.

[매일 밤 여기서 밤을 새느냐?]

[잠도 잡니다.]

[악불군.]

[예!]

[많이 다쳤다고 들었는데 벌써 움직여도 되는 것이냐?]

[이 정도로 눕는다면 어찌 아가씨의 호위라고 하겠습니까?]

악불군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인 담무룡이 다시 물었다.

[방금 나를 느꼈냐고 물었다.]

[가주님을 느낀 것은 아니고, 그냥 기분이 이상했던 것뿐입니다.]

[그게 느낀 것이다. 그런데 네 내공으로는 나를 느낄 수 없을 텐데? 손을 내 보거라.]

담무룡은 악불군이 손을 내밀자 맥을 잡았다. 그리고 곧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우선 그냥 넘기기로 했다.

[다음에 정밀 검사를 해 보도록 하고, 예전에 내게 맹세한 말을 기억하느냐?]

[어떤 맹세를 말씀하시는지요?]

[수련이를 목숨을 바쳐 보호하겠다고 했지.]

[당연합니다. 제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어떤 위험도 아가씨에게는 일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담무룡이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죽지 않는다면 영원히 수련이를 보호할 수 있다는 말이렷다.]

[그렇습니다.]

[그 마음 변하지 말거라.]

[예!]

돌아가려던 담무룡은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는지 다시 물었다.

[수련이를 납치하려고 했다는 자의 얼굴은 봤느냐?]

[얼굴은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누구인지는 짐작이 갑니다.]

[사도비류냐?]

담무룡의 반문에 악불군은 ‘역시’ 하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자인 것 같았습니다.]

[정말이냐? 진짜 사도비류라면 네 실력으로는 십 초를 버티기가 어려웠을 텐데?]

[저도 그래서 생각을 많이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무고에서 본 비급의 도움을 받은 것 같습니다.]

[너…… 지, 지금 뭐라고 했느냐? 설마…… 무명 비급을 말하는 것이냐?]

담무룡의 눈이 커다래졌다.

심지어 말까지 더듬을 정도였다. 그의 경악하는 표정으로 미루어 대공의 협박을 들을 때보다 더 놀란 듯했다.

[예! 저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자의 공격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검을 찔렀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무명 비급에서 본 자세였던 것 같습니다.]

담무룡의 눈에 심각한 갈등의 빛이 나타났다. 만약 혈랑사자의 방문이 없었다면 갈등할 필요도 없이 악불군을 당장 제압해 고문을 해서라도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내려고 했을 그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수하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거기다 악불군은 담수련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심복이었다.

한참을 무엇이 좋을지 고심하던 담무룡은 드디어 결정을 내린 듯 악불군을 보며 말했다.

[나를 따라와라.]

[예? 하지만 아가씨를……?]

[오늘부터 사화가 수련이와 같이 자기로 했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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