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23화 (23/472)

<천검지애 23화>

23화. 의문(1)

잠룡세가를 벗어난 혈랑사자는 곧장 태룡대로 달려갔다.

태룡대는 절강 최대의 호수인 태호에 형성된 천 길 낭떠러지였다.

태룡대의 끝에 도착한 혈랑사자는 마치 자살이라도 하려는 듯 그대로 낭떠러지를 뛰어내렸다.

무모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누군가의 미행을 따돌리는 데에는 아주 탁월한 방법이었다.

혈랑사자의 소매에서 천으로 쌓여 있는 두 개의 대나무가 나오더니, 마치 활강하는 매의 날개처럼 쫙 펴졌다.

어두운 호수의 수면을 향해 새처럼 날아가던 그가 내려선 곳은 상당히 큰 배였다.

그는 날개를 접어 다시 소매에 넣더니 선수(船首) 쪽으로 급히 걸어갔다.

배의 갑판 주위로는 수십 명은 됨직한 무인들이 빙 둘러 서 있었다.

의자에 앉아 밖으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노인의 뒷모습이 보이자 혈랑사자는 부복을 하며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혈랑사자의 보고에도 노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오직 낚시의 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허허허! 드디어 한 놈 잡았구나!”

들어 올린 노인의 낚싯대의 끝에는, 두 자는 넘어 보이는 커다란 잉어가 낚시바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이미 잡혔는데 몸부림치면 고통만 더 심하다. 얌전히 잡히는 게 그나마 네겐 좋을 게다.”

하지만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잉어는 계속 몸부림을 칠 뿐이었다.

“쯧! 쯧! 쯧! 노부가 말을 안 듣는 놈들은 참 싫어하는데…….”

팍-

노인의 말이 끝나자 바늘에 달려 있던 잉어가 마치 벽력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그대로 터졌다.

조작조각 잘린 잉어의 잔해가 태호의 수면으로 떨어지자, 노인은 낚싯대를 옆에 있는 중년인에게 넘기더니 몸을 돌렸다.

“그래, 내 말은 잘 전하고 왔느냐?”

“예! 하지만 순순히 따르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왜, 거역할 것 같더냐?”

“제가 보기에는 그럴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긴…… 담무룡이 말 몇 마디로 고개를 숙일 리 없지. 천륭검과 천륭검보에 대해 묻자 어떤 표정을 짓더냐?”

“처음에는 금시초문인 듯 행동하더니, 곧 자신은 그런 적 없다고 시치미를 뗐습니다.”

“후후후~ 담무룡도 이젠 늙은 모양이구나? 예전의 그라면 당장 너를 죽이려 들었을 텐데 말이다.”

“대공 전하.”

“말해라.”

“제가 보기에는 거짓은 아닌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유복통이 이끄는 백련교라는 반역 세력이 홍건당까지 만들며 곳곳에서 저희 군과 대립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우군이라고 할 수 있는 잠룡세가를 적으로 돌리시는 것은 소탐대실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잠룡세가에 일 년이나 기한을 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압박을 가해 스스로 찾아오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그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되긴 하겠구나? 하지만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지.”

대공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를 짓더니,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젊을 적 담무룡은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놓아야 더 큰 것이 들어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놈들은 내가 담무룡은 신임해서 절강을 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조공을 가장 거짓 없이 바칠 자가 그였을 뿐이다.”

대공은 말을 잠시 멈추고는 태호의 수면을 무심한 눈으로 보더니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변하기 시작했어. 방국진의 난 때도 다루가치가 여러 차례 종용을 해서야 간신히 원군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 절강의 무역 규모가 이십 년 전보다 다섯 배는 늘었지만 조공은 여전히 금자 오만 냥이지. 이제 바꿀 때가 된 거다.”

“하나 대공 전하, 제가 잠룡세가를 보니 그 세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너무 몰아붙이다가 반군을 돕기라도 한다면 큰 우환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속은 것을 생각하면 경고고 뭐고 당장 쳐들어가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찾고 싶구나. 그럼에도 꾹 참고 일 년이나 시간을 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소신이 어찌 전하의 심모원려를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잠룡세가의 전력이 너무 강해서다. 그리고 담무룡은 수하들을 공포와 돈으로 다스려 왔다. 그렇기 때문에 일 년 정도의 압박이면 잠룡세가의 전력을 반 이상 소실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 될 게다.”

대공의 말에 혈랑사자는 감탄의 눈으로 한 번 보더니 바닥에 머리를 대며 소리쳤다.

“대공 전하의 현명한 계획을 누가 있어 짐작하겠습니까?”

“금잔화가 아니었다면 여전히 범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계속 헤맸을 것이다. 이번 일은 모두 금잔화의 공이라고 해야겠지.”

“대공 전하의 칭찬을 받으니 마치 공중으로 몸이 뜨는 것 같은 황홀함을 느끼네요.”

그때 구슬이 구르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인 한 명이 나타났다.

피부는 너무 하얘 투명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고, 머리카락은 완전 금빛이었다.

거기다 중원인들에게는 없는 커다란 눈과 코 그리고 비취빛 눈동자는 그냥 보기만 해도 신비해 보일 정도였다.

황제조차 대공 앞에서는 말을 조심한다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였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혈랑사자, 오랜만이야?”

혈랑사자는 답은 못하고 고개만 조아릴 뿐이었다.

“그래, 구경은 잘했느냐?”

“태호가 이렇게 아름다운 줄은 몰랐습니다. 기분이 아주 좋네요.”

금잔화가 금발을 손으로 쓸어 올리며 자리에 앉자, 대공이 혈랑사자에게 물었다.

“그래, 담무룡의 무공은 어떻더냐?”

혈랑사자는 어찰단에서도 최고의 지위에 있는 자로, 굳이 전령의 역할을 맡아 직접 갈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를 보낸 것은, 바로 담무룡의 무공의 경지를 염탐하기 위해서였다.

“예전보다는 확실히 강해졌습니다. 하지만 자연적으로 발전한 것이지, 천륭검보를 익혀서 강해진 것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 이상하군……. 내가 아는 담무룡은 무공에 관한한 대단한 기재인데, 왜 이십 년이 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천륭검보를 익히지 않았을까?”

“전하, 제가 보기에는 익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 익힌 것이에요.”

“못 익혔다고?”

“제가 따로 알아보니, 천륭검가 내에서도 천륭검보를 익힌 사람은 극소수였어요. 검보를 보지 못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창시한 가문의 후계자조차 못 익히는 무공이라면 다른 사람들은 더욱 익히기 어렵다고 봐야지요.”

금잔화의 말에 대공은 그럴 듯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그가 담무룡을 범인으로 지목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의 분석 때문이었다.

“그럼 네 생각에 담무룡이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할 것 같으냐?”

“아직 제가 담무룡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아직 확실히 판단을 내리진 못했어요. 하지만 전하에 대해 잘 아는 자라고 하니 대놓고 거역은 하지 못할 거예요. 다만…….”

“다만?”

“담무룡, 그자의 그동안 행적을 살펴보면 언제나 도망칠 구멍을 만들어 놓았더군요.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전하가 있는 곳에서 빼돌렸다면, 분명 걸렸을 경우도 대비해 놓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겠지요.”

“네 말대로 일 년의 시간을 주기는 했다만, 난 하루라도 빨리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가지고 싶구나.”

“대공 전하, 지금 절강성에서 잠룡세가의 움직임을 군부에서 간섭하기 시작했어요. 그렇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잠룡세가가 망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질 겁니다. 얼마나 많은 자들이 이탈하느냐가 관건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잠룡세가에서 나오는 자들의 감시입니다.”

“그것은 걱정 마라. 잠룡세가에서 나오는 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의 감시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공의 호언장담에 금잔화는 미소를 지며 말했다.

“전하, 그런 자신감 때문에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놓쳤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전 좀 더 강력한 감시 체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알려지지 않은 비처(秘處)를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담무룡이 예전부터 비처(秘處)를, 그중에서도 비밀 통로를 아주 좋아했지. 하지만 어떤 비밀 통로도 오백 장 이상 뚫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항주는 태호(太湖)가 붙어 있어 지반이 약해. 비밀 통로로 나온다 해도 우리의 포위망 안일 뿐이다.”

금잔화는 일 년간의 유예 기간을 주자고 고언한 것은 잠룡세가가 스스로 무너지게 하려는 것도 있지만, 담무룡이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잡기 위함도 있었다.

“그래서 제가 담무룡을 직접 만나 볼 생각인데, 허락해 주시겠어요?”

“네가 직접 가겠다는 것이냐?”

“정보를 통해 보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다를 수 있으니까요. 잠룡세가의 저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제 분석에 빠진 변수가 있을지도 보려고 합니다.”

“오룡세가의 일거수일투족은 어찰단에 의해 완벽하게 감시하는 중인데, 변수 같은 것이 있을 리 있겠느냐?”

“물론 그렇지만, 변수라는 것은 항상 생각지도 못한 것에서 나오는 법이지요. 하지만 제 분석으로도 현 무림 상황과 인물들을 보면 변수는 극히 제한적일 것 같네요.”

만약을 위해 변수를 말했지만 그녀는 변수가 있기 힘들다고 이미 판단을 내린 뒤였다.

변수가 정말 나타나고 있을 줄은 그녀도 예상 못하고 있었다.

* * *

담무룡의 뒤를 따르던 악불군은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담수련의 거처 가까운 곳에 이런 비밀 통로가 있을 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 집무실과 연결된 통로로, 극소수만 아는 곳이다. 비상시에만 사용하지.”

“그렇습니까?”

악불군은 담무룡의 설명에 조심스럽게 답했다.

육관을 통과하면서 그의 지위는 대주급으로 격상이 되긴 했다. 하지만 세가의 비밀에 접근할 정도의 지위는 분명 아니었다.

그런데 극소수만 아는 곳을 왜 자신을 데리고 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담무룡을 따라 비밀 연공실에 들어선 악불군은 상당히 당황했다.

척 보기에는 대단한 금역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기관으로 움직이는 입구가 담무룡의 집무실에 있었다.

“잠룡세가에서 이곳을 아는 사람은 오로지 나밖에 없다. 이제 너까지 두 명이 아는 셈이군.”

악불군의 얼굴이 더욱 불안해졌다. 극소수만 아는 통로도 그로서는 부담스러웠는데, 이제 가주만이 아는 금역에 들어왔다지 않은가…….

“가주님, 전 아가씨의 호위 무사일 뿐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지역에 제가 왜 온 것인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거짓이 하나라도 있다면 넌 오늘 여기서 죽을 것이다.”

악불군은 본능적으로 담무룡의 말이 그냥 엄포가 아님을 직감했다.

“전 가주님이나 아가씨께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악불군이 강직하다는 말은 종리화에게 계속 들어온 터라, 담무룡은 믿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책 한 권을 그에게 던졌다.

“이건?”

악불군은 무명 비급을 보자 의아한 눈으로 담무룡은 쳐다보았다.

“그래, 네가 무고에서 보았던 것이다. 지금부터 아까 한 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보거라.”

“그게…….”

악불군은 뭔가 중요한 이유가 있음을 직감하고는 사도비류와의 싸움 중에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

“설마, 이 비급에 있는 모든 그림을 기억한다는 말이냐?”

악불군의 설명을 들은 담무룡은 놀란 듯 물었다.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지만, 이십 년을 넘게 검보의 그림을 연구한 그조차도 그림의 자세를 완벽하게 외우지 못했다.

더구나 그림의 자세를 엇비슷하게 따라할 수는 있었지만 그림과 똑같은 자세는 불가능했다.

“예! 전부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 네가 무고에서 나온 것이 이제 겨우 한 달이다. 그동안 계속 수련을 했느냐?”

“처음에는 자세가 특이해서 그냥 한번 따라 해 보았는데, 이상하게 몸이 아주 편해졌습니다. 그래서 매일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자세를 연습했습니다.”

“몸이 편해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

“그게 설명은 좀 어렵습니다. 그 자세를 취할 때마다 몸 근육이 이완되고 찌릿한 기분이 감도는데, 피곤이 싹 풀렸다고 할까요.”

악불군의 말에 담무룡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그림의 자세를 수천 번은 취해 보았기 때문이었다.

‘왜 같은 그림을 연습했는데 나는 느끼지 못한 것을 이 아이만 그렇게 빠른 시간에 느낀 거지?’

차가운 담무룡의 눈이 악불군에게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