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25화 (25/472)

<천검지애 25화>

25화. 담수운(1)

예전의 담수운이라면 담무룡의 노한 모습에도 어쩔 줄을 몰라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모습은 달랐다.

“감히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함부로 하다니, 배짱이 많이 늘었구나.”

차갑고 잔인하다고 소문난 그였지만 자식을 어찌할 수는 없는지 표정을 풀고 말았다.

“어머니께서 임종하실 때 아버님을 무척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나는 네 어미를 사랑했다. 하지만 당시는 잠룡세가가 완벽하게 자리를 잡느냐 마느냐 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식이 늦게 도착했다.”

담무룡은 자신을 보고 싶어 했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는지 그답지 않게 변명을 하고 말았다.

“됐습니다. 제게 하시고 싶은 말부터 하십시오.”

[지금부터 대화는 전음으로 한다. 지금 잠룡세가가 큰 위험에 봉착했다.]

담수운은 뜻밖의 말에 놀라 반문했다. 지금 잠룡세가의 전력은 무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었다. 거기다 담무룡의 무공은 무림에서 가장 강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위험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말 그대로다. 그래서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네가 해 줄 일이 있다…….]

담무룡의 전음은 상당히 길었다. 그리고 전음을 듣던 담수운의 표정도 심각하게 굳어졌다.

[지금 저만 살라고 하시는 겁니까?]

[너만 살라는 것이 아니다. 네가 있어야 잠룡세가의 식솔들이 살 수 있는 거다.]

[지금까지 아버님에 의해 멸문한 문파가 몇 개나 되시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아버님께 죽은 자는 얼마나 될까요? 심지어 아버님께서는 수하들조차 조금만 실수해도 죽이시는 것을 어려서부터 전 봐 왔습니다. 그렇다면 본가 역시 다른 세력에게 멸문당하고 저희들이 죽는다 하여 억울할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전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합니다.]

[약육강식의 세계인 무림이다. 그러한 일을 당한 것은, 그들이 나보다 약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은 우리가 약해서 당한 것으로 생각하면 되겠군요?]

[약하다 하여 그냥 죽는 것도 장부의 자세는 아니지! 당할 때 당하더라도, 버틸 때까지 버티다 보면 반전의 기회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반전의 기회요? 아버님의 그 야망 때문에 저희 담씨 종가는 이미 전 중원으로부터 배신자라는 말을 들으며 망해 가고 있습니다.]

[능력이 있는데도 태산의 오지에서 화전민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최소한 남에게 못할 짓은 할 필요가 없겠지요.]

[미욱한 놈!]

담무룡의 말에 담수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미욱하다’ 그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단어였다.

[미욱한 아들에게 도대체 뭘 바라십니까? 전 이미 제가 갈 길을 정했습니다. 솔직히 전 잠룡세가에는 미련이 없습니다.]

[미련이 있건 없건 내 아들로 태어난 이상 네가 짊어져야 할 짐을 피하지 마라. 그리고 이 일은 수련이의 안전과도 관계가 있다. 설마 네 누이까지 나 몰라라 할 생각이냐?]

[……수련이는 제가 보호합니다.]

[지금 상태면 네 목숨도 온전치 못할 것인데, 무슨 재주로 수련이를 보호해? 딴생각 말고 내가 말한 대로 준비해라.]

[지금 아버님께서 제게 원하는 것이 수련이의 안전입니까, 아니면 아버님의 욕심이십니까? 수련이는 제가 어떻게든 보호합니다. 하지만 저나 아버님은 세상에 해를 끼친 죗값을 피해선 안 됩니다.]

간신히 참고 있던 담무룡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던 그의 역린을, 다시 한번 아들이 건드린 것이다.

그렇게 긴장된 순간이 일각쯤 됐을까…… 담무룡의 입에서 간신히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나가거라!]

그러자 담수운은 일어서더니 말도 없이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 버렸다.

담수운이 나가자 담무룡은 허탈한 듯 고개를 의자에 기대더니,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중얼거렸다.

‘잘못 키웠어…….’

담무룡은 담수운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고민에 빠졌다.

그의 고민은 무려 한 시진 가까이 이어졌다. 그리고 자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 차선으로 가야 하는가…….”

담무룡의 계획에 원래 담수련은 없었다. 그녀는 무공을 어느 한계 이상으로는 익힐 수가 없는 오음절맥을 타고난 데다가, 언제 갑자기 병이 도져 죽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담수운만 믿기에는 그가 너무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담수련을 택한다면 그에게는 그가 하고 싶지 않은 선택만이 남고 만다.

“악불군, 진짜 운이 좋은 놈이군…….”

담무룡의 입에서 허탈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 * *

“오라버니가 이렇게 심각한 것은 처음 보네요?”

마차에 마주 보고 앉은 철상아는, 철무정이 눈을 감고 계속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자 미묘한 미소를 지며 물었다.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는 거냐?”

눈을 뜬 철무정은 철상아를 의아한 눈으로 보며 물었다.

“내가 뭘 안 하던 짓을 한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나한테 신경 쓴 적이 없지 않았냐?”

“호호호~ 하나밖에 없는 오라버니를 제가 어떻게 신경을 안 쓰겠어요? 다만 그동안 신경 쓸 일이 없었지요. 그런데 이제 신경 쓸 일이 좀 생긴 것 같네요.”

“무슨 의미냐?”

“오라버니, 가지고 싶지요?”

뜬금없는 질문에 철무정은 검미를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여자인 내가 봐도 너무 사랑스럽던데, 남자인 오빠의 눈에는 얼마나 아름다웠겠어요?”

“귀찮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오라버니, 왜 아버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급히 돌아오라고 명을 내렸을까요?”

“지금은 알 수 없지.”

“그런데 우리만이 아니라 화룡세가와 마룡세가도 동시에 떠났어요. 그럼 답이 딱 나오지 않아요?”

“대공 전하께서 나섰다는 말이냐?”

“대공 전하가 아니면 누가 있어 이렇게 무례한 행동을 하도록 만들겠어요? 전 대공 전하께서 잠룡세가를 버렸다고 생각해요.”

“말조심해라! 대공 전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든 함부로 넘겨짚는 것은 불경이다.”

“대공 전하께서 우리를 그렇게 예뻐하시는데 뭔 걱정이에요. 오라버니, 제가 대공 전하께 부탁할게요.”

“무슨 부탁?”

“담수련을 나의 하녀로 달라고요.”

“담수련을 너의 하녀로? 그녀는 화우성과 혼약한 사이다. 불가능해.”

“그거야 잠룡세가가 존재할 때 얘기지요. 제 예상이 맞다면 잠룡세가는 곧 사라져요. 대공 전하께서는 일을 처리할 때 언제나 깨끗하시지요. 그 말은 어차피 담수련은 죽는다는 의미예요. 대공 전하께서는 제 부탁이라면 계집 한 명 정도는 빼 줄 거예요. 그럼 제가 오빠한테 담수련을 넘길게요.”

“네가 내게 이런 말을 해 주는 이유가 궁금한데?”

“대신 오빠도 한 명만 빼돌려 주세요.”

“누구?”

“담수련의 호위 무사! 오빠는 담수련을 가지고 놀고, 난 그자를 가지고 놀고. 서로 좋지 않겠어요?”

“그래야 하는 이유가 뭐지?”

“오빠가 여자를 빼 달라고 하면 대공 전하께서 안 좋아하실 거예요. 한창 수련을 해야 할 시기에 여자 생각한다고 말이에요. 또한 저도 명색이 여자인데 남자를 빼달라고 하긴 그렇죠?”

철상아의 말에 철무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른 때 같으면 그의 성격상 철상아의 이런 말을 들어줄 리 없었다. 아니 오히려 꾸짖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담수련이 너무 갖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철상아가 회심의 미소를 지며 쳐다보고 있었다.

* * *

“드디어 절강을 벗어났습니다. 소가주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사도비류의 얼굴에 금창약을 바르고 천으로 감아 준 독갈적수는, 잠룡세가를 나오자마자 최대의 속력으로 절강을 벗어났다.

자신의 소주인이 아주 위험한 행동을 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으으으아아아악! 내 이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다!”

절강을 벗어났다는 말을 듣자 사도비류는 화가 폭발하는지 찢어지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감히 소가주님의 신체에 상처를 낸 놈이 누구입니까?”

“독갈적수.”

“예!”

“나와 시비가 붙었던 담수련의 호위 놈 기억하지?”

“예, 기억합니다.”

“그놈을 잡아 와라. 반드시 산 채로 잡아 와야 한다.”

“소가주님, 지금은 안 됩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아무래도 대공의 지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대공?”

“예, 대공이 아니면 성인식을 축하하러 갔던 세 가문이 전부 동시에 철수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이이익!”

사도비류는 주먹을 꽉 쥐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하지만 진짜 대공이 끼어 있다면 섣부른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좋아. 지금은 귀가한다. 우선 아버님께 자초지종을 알아본 후, 담수련과 그 호위 무사 놈을 사로잡아 데려온다.”

“알겠습니다.”

독갈적수는 잠룡세가의 천금과 그 호위 무사를 산 채로 잡아 오라는 사도비류의 명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우선 대답을 했다.

사도비류가 이성을 잃으면 완전 악귀같이 변하기 때문이었다.

* * *

여기 또 한 명 마음이 바쁜 사람이 있었다.

화우성이었다.

“소가주님, 아직 어두운데 그렇게 빨리 달리시면 위험합니다.”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는 화우성을 따르던 단금철권(斷金鐵拳)이 불안한 듯 말했다.

화우성은 세가로 철수하라는 명을 받자 수행 무사와 마차까지 뒤로한 채 직접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본디 말이란 밤눈이 어두워, 밤에는 달리지 않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연 매의 성인식이 삼 일밖에 안 남았어. 아버님께 이유를 묻고 다시 돌아오려면 최대한 빨리 가야 한다.”

화우성은 지금 너무 불안했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음을 그는 몰랐다.

* * *

“아가씨, 너무 아름다우시다.”

성인식을 위해 곱게 차려입은 담수련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아직은 앳된 귀여움과 그냥 자체적으로 빛이 나는 조신함과 고결함.

누구라도 보면 다시 한 번 쳐다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청초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진짜 예뻐?”

추국의 감탄에 담수련은 살포시 미소를 지며 물었다.

“정말 예쁘세요! 아마 세상에서 아가씨만큼 예쁜 여자는 없을 거예요.”

이어지는 매향의 칭찬에 담수련은 동경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며 생각했다.

‘소군도 나보고 예쁘다고 할까?’

그녀는 사화의 칭찬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악불군에게만은 예뻐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이상하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가슴이 쿵쿵쿵 두근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아무 때나 나가서 악불군을 부를 수 있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더 보고 싶은데도 오히려 나가서 악불군을 부르지 못하고 있었다.

“아가씨, 가실 시간이에요.”

연화와 매향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선 담수련은 추국과 흑란의 안내를 받으며 밖으로 나섰다.

밖에는 잠봉단의 여무사들 삼십여 명이 가마를 준비하고는 기다리고 있었다.

* * *

“아가씨, 너무 아름답지 않냐?”

나뭇가지 사이에 앉아 있던 악불군은 사화와 함께 나오는 담수련을 보자 손바닥에 앉아 있는 작은 새에게 물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악불군의 능력.

그것은 동물들과 공감이었다.

동물과 인간과의 주변 감지 능력은 크게는 백 배 이상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악불군은 동물과 공감함으로써 주위 상황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까칠하다는 백설이 그를 보자마자 머리를 그에게 비빈 것도 그 능력 때문이었다.

더해 악불군이 담수련의 거처에서 떨어진 이곳 나뭇가지 위에서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 이유도 그것이 일조했다.

공감 능력 덕에 많은 동물들이 그의 주위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돌아다니고 있었기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더 큰 이유는 이곳에서 담수련의 거처가 가장 잘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언제나 혼자 있는 악불군과 가장 많이 대화를 나눈 상대가 바로 새였다.

물론 두려워하지 않을 뿐, 새가 악불군의 말을 알아 들을 리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새는 그의 손바닥을 부리로 쪼았다. 벌레나 더 잡아 달라는 신호였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네 친구들하고 놀아라. 오늘은 내가 바쁘구나.”

새를 날려 버린 악불군은 사라지는 담수련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