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6화>
26화. 담수운(2)
“정말이냐?”
갑작스러운 국대광의 보고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이번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오고 있던 절강의 많은 사절단들이, 갑자기 못 온다고 연락을 해 왔다는 내용이었다.
“예! 처음에는 이놈들이 미쳤나 했습니다. 그런데 절강성 군부에서 군사 수백 명이 직접 나와 길을 막고 통행을 금지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간부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림 세력이라면 수하들을 내보내 징치라도 하겠지만, 군부의 군사들이라면 아무리 잠룡세가라 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다루가치가 갑자기 우리에게 이러는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닌가?”
호법 고숭무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군사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절강성 다루가치의 허락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는 잠룡세가와 사이가 아주 좋았다.
“다루가치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자가 뒤에서 사주한 것이 아닐까요?”
“다루가치는 황제도 함부로 못하는 권력자인데, 누가 사주를 한단 말인가?”
원나라는 각 성에 총독부를 두고 다루가치를 두어 지배를 했다. 그리고 다루가치들은 거의 제후와 맞먹는 권력이 있어서, 황제라 할지라도 함부로 명을 내릴 수 없었다.
외당 당주 역귀혼의 말에 총관 유영필이 거들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방금 오기 전 지부에서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수군들이 항주로 들어오는 뱃길을 막고 무역선들에게 물건을 자계항에 풀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제재가 일시적으로 그치지 않고 길어지면 본가의 재정에까지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세력을 유지하는 데 가장 핵심이 바로 자금이었다. 더구나 잠룡세가는 무림 세력으로, 매달 수하들에게 그만한 보답을 쥐어 주지 않으면 충성이 약한 자들은 금방 떨어지거나 배신을 하기 십상이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현재 비축된 자금으로 일 년은 버틸 수 있습니다.”
“다행이군.”
어차피 대공이 준 시간은 일 년이었다.
“그게 무슨……?”
“됐다. 우선 다른 것은 생각 말고 수련이의 성인식만 성대하게 치러라. 다음 일은 그때 다시 의논한다.”
“예!”
역귀혼과 유영필이 나가자 담무룡은 입술을 꾹 다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빨리 치고 들어오는군? 그렇다면 갑자기 계획된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준비를 했다는 말인데……. 역시 대공다운 전략이야.’
일 년이라고 했지만, 이런 봉쇄가 길어지고 그 강도가 세진다면 분명 충성심이 약한 자들의 이탈이 가속화될 것은 자명했다.
* * *
성인식이 열리는 대연무장에 담수련이 나타나자, 기다리던 백여 명의 사람들이 인사를 하며 한마디씩 외쳤다.
“와아! 너무 아름다우시다.”
“아가씨, 축하합니다.”
“우리 아가씨는 분명 천하제일 미녀일 거다!”
사방에서 들리는 칭찬에 담수련은 슬쩍 사방을 둘러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지만 보고 싶은 사람이 보이지 않자 약간 실망한 듯 목례를 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어서 와라. 내 사랑하는 여동생, 드디어 어른이 됐구나!”
기다리고 있던 담수운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담수련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어깨를 살짝 토닥거렸다.
“오라버니 덕이에요. 감사합니다.”
“나야 세가 내에 있던 적도 별로 없는데, 내 덕이라고 할 게 뭐가 있겠냐?”
“제겐 오라버니께서 계신다는 자체가 든든한 힘이었답니다.”
환하게 미소를 짓는 담수련을 보며 담수운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어머니께서 너를 보살펴 달라고 유언까지 하셨는데 아무런 도움도 못되고……. 그래도 이렇게 예쁘게 컸으니 나야말로 고맙구나.’
담수운은 담무룡이 앉아 있는 단상 쪽으로 걸어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보며 고심에 빠졌다.
사실 그가 계속 잠룡세가에 돌아오는 단 하나의 이유가 바로 담수련이었다. 아마 그녀만 없었다면 그는 이미 잠룡세가와 연을 끊었을지도 몰랐다.
“내 딸 수련이가 드디어 성인이 되었구나.”
담수련이 올라오자 담무룡은 만족한 미소를 지며 그녀의 손을 잡더니 모두를 향해 돌아섰다.
“아가씨! 축하합니다.”
그러자 모두는 허리를 숙이며 다시 한번 축하를 외쳤다.
“오늘 제 딸의 생일을 위해 오신 내외빈들께 감사드립니다. 변변치는 않지만 음식은 충분히 장만했으니 오늘은 마음껏 먹고 마십시오!”
“와아!”
모두가 환호를 터뜨리자 담무룡은 미소를 지며 담수련과 함께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다른 세가 사람들은 모두 어디 갔지요? 성 오라버니도 안 보이시고?”
자리에 앉은 담수련은 이상한 듯 물었다.
작년 그녀의 생일 때만 해도 절강성의 수많은 무림인과 상인들이 축하 손님으로 못해도 백은 넘게 왔었다.
그런데 이번은 성인식까지 겹쳐 있는데도 축하 손님들이 삼십 명도 안 되어 보였다. 더욱이 이미 온 것으로 알고 있는 오룡세가의 소가주들과 철상아도 보이지 않았다.
“일이 있어서 먼저 갔다.”
“일이요?”
담수련은 의아한 듯 반문했다.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이 정작 생일은 안 보고 그냥 갔다는 것은 상당히 의아한 일이었다.
“네가 납치 사건으로 놀란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다. 별일은 아니니 신경 쓸 필요 없다.”
담무룡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러나 세가 일에 대해 그다지 상관하지 않는 담수련도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화우성이 그녀에게 작별 인사도 안 하고 그냥 간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담무룡은 담수운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어깨를 도닥거리고는 한쪽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러자 한 청년이 그들의 앞으로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너도 앉거라.”
나타난 청년을 본 담수련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금방 어두웠던 마음이 악불군을 보자 그대로 풀린 것이다.
“아닙니다.”
“소군, 앉아.”
악불군은 담무룡의 말을 공손하게 거절했지만, 이어지는 담수련의 말을 듣자 곧 자리에 앉았다.
‘이놈 봐라? 내 말은 거절하고 수련이 말은 가타부타 말없이 들어?’
하지만 담무룡의 표정은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어차피 악불군은 담수련만을 위해 존재하도록 키워 왔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성인이 되심을 축하합니다.’
자리에 앉은 악불군은 담수련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그러자 담수련이 미소를 지며 받았다.
‘고마워~’
그들은 자신들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눈과 눈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그때, 총관 유영필이 급히 달려오더니 담무룡의 귀에 뭔가를 보고했다. 그리고 순간 담무룡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중히 모셔라.”
“예!”
유영필이 다시 밖으로 나가자 그 모습을 보던 간부들의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담무룡이 긴장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잔치 분위기에 떠들썩하던 대연무장이 조용해지며 한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대단한 위세였다.
최소 오십 명은 됨직한 무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선 일장 높이의 커다란 가마 위에는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여인은 금잔화였다.
햇빛에 비친 그녀의 금발 머리는 진짜 금처럼 반짝거렸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궁장과 사람의 심연까지 들여다볼 것 같은 그녀의 아름다운 비취빛 눈동자는 얼굴을 면사로 가려 알아볼 수 없음에도 모든 사람의 이목을 단번에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타 문파에 가주까지 있는 자리에 가마를 그대로 타고 들어온 것은 사실 대단한 결례였다.
국대광이 앞을 막으려 하자 담무룡이 손을 들어 말리고는 직접 일어나 가마 앞까지 가더니 포권을 하며 말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금령군주가 누추한 본가를 직접 방문하다니 뜻밖이구려. 환영하외다.”
담무룡이 일어나 말하자 모두는 놀라 벌떡 일어났다.
금령군주는 어찰단의 최고 지위에 있는 원나라의 실력자였다. 하지만 소문은 무성했지만 금령군주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금령군주가 잠룡세가에 나타난 것도 뜻밖인데, 심지어 이렇게 젊은 여인일 줄은 누구도 예상도 못했던 것이었다.
“유명하신 담 가주님을 이미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이제야 찾아와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그녀의 행동은 잠룡세가의 간부진들에게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 충분했다.
담무룡이 일어서서 포권까지 했건만 그녀는 여전히 가마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내당 당주 국대광이 못 참고 한마디 했다.
“아무리 금령군주라 하셔도 가주님 앞에서, 여전히 가마에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자 가마의 앞에 서 있던 중년인이 국대광을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 감히 군주님께 예의라 했느냐?”
“그만! 듣고 보니 내가 실례한 것이 맞다. 제가 중원의 예절에 좀 어두워서 결례를 범했네요.”
금잔화가 손짓을 하자 가마꾼들은 가마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러자 모두의 표정이 또다시 몽롱해졌다. 일어선 그녀의 몸매는 물론 움직임 자체가 남심을 흔들 정도로 고혹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요기로 완전 똘똘 뭉친 계집이라고 하더니 그걸 넘어, 아예 요기 그 자체로군?’
담무룡은 제룡회를 통해, 근래 어찰단은 대공이 아니라 금잔화에 의해 통솔되고 있다는 말을 이미 듣고 있었다.
“제가 가주님께는 좀 불편해 보이지요? 하긴, 제가 중원인이 아니니 그런 시선은 어느 정도 이해됩니다.”
“금령군주의 능력에 대해서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는데 불편할 리가 있겠소? 그런데 이곳에 온 것은 정말 뜻밖이구려.”
“잠룡세가에 대해 여러 말이 있더군요. 그래서 우연히 절강에 올 일이 있던 차에 한번 가주님과 대화를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운이 좋으려니 천금의 성인식이더군요. 불청객이지만 참여를 허가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금령군주를 불청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본가에 한 명도 없으니, 오신 김에 충분히 드시고 쉬시다 가시지오.”
“감사합니다.”
고개를 살짝 고개를 숙였다 드는 금잔화의 눈이 담무룡의 옆에 서 있는 담수련에게 향했다.
‘정말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지고 있네…….’
담수련은 금잔화와 눈이 마주치자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금잔화의 비취(翡翠)빛 눈동자는 실로 진짜 보석인 양 반짝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놀라기는 금잔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세상에서 담 소저께서 천하제일 미인이라고 칭한다던데, 그 말이 사실이었군요! 제가 중원에 들어와 이렇게 예쁜 분은 정말 처음이네요.”
“감사합니다.”
금잔화의 칭찬에 담수련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조신한지 금잔화는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얘가 이제 겨우 열여섯이라고 들었는데 벌써 이 정도면, 더 크면 진짜 경국지색이 되겠어……. 이런 애는 죽이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내 수족으로 만들어 남자들을 포섭할 때 사용하는 것이 나을까?’
금잔화는 담수련이 이대로 큰다면 천하대계의 변수가 충분히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성인이 된 것을 축하해요.”
덕담을 보내며 담수련 쪽으로 다가가던 금잔화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한 청년이 담수련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다가가실 수 없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금잔화는 처음에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나와 눈을 직접 마주쳤는데 흔들림이 전혀 없어……? 저렇게 무심한 눈은 처음 보네?’
금잔화는 자신을 보고 이렇게 무심한 남자는 처음이었다. 물론 내공이 심후해 평정심을 유지하는 고수들은 있었다.
하지만 악불군은 아무리 봐도 삼, 사십 년 정도의 내공을 지닌 그저 그런 일류급의 무사에 불과했다.
“나를 막는 이유가 뭐죠?”
“아가씨의 호위 무사로서 외인이 아가씨의 일 장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막는 게 제 임무입니다.”
“제가 담 소저를 해치기라도 할 것 같아 보이나요?”
“오늘 처음 뵈었는데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전 확실한 판단이 안 설 경우 우선 막습니다.”
“악불군! 이분이 누구신데 감히 앞을 막는 거냐? 비켜라!”
악불군의 돌발 행동에 잠시 어리둥절했던 역귀혼이 급히 소리쳤다.
“제 임무는 아가씨를 호위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당주님의 말씀이라도 지금은 따를 수 없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악불군은 역귀혼의 말에도 전혀 비켜 줄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 금잔화의 신비한 미모나 위세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