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7화>
27화. 금잔화
금잔화는 악불군의 강인한 자세에 미소를 지며 담무룡을 보며 말했다.
“호호호~ 가주님께서 세가의 이름을 잠룡으로 지으신 이유를 알겠네요. 일개 호위 무사도 잠룡이니 말입니다.”
그녀의 말에 그녀를 호위해 온 중년인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나타나고 있었다.
평소 그녀의 성격이었다면 호위 무사 따위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순간, 일이 벌어져도 단단히 벌어졌을 터였기 때문이다.
“금령군주에 대해 몰라서 무례를 저지른 것이니 날 봐서 용서해 주시구려.”
“무례라니요? 전 자신의 임무를 확실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을 가장 좋아한답니다.”
“소군, 물러나.”
누구의 말도 통하지 않을 듯 강인한 모습을 보이던 악불군이 담수련의 한마디에 비켜서자, 금잔화는 좋은 생각이 든 듯 미소를 지며 말했다.
“담 소저하고는 의자매를 맺으면 아주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가주님 생각은 어떠세요?”
“그거 아주 좋은 생각 같구려. 한데 제 딸을 예쁘게 봐주시니 감사는 하오만, 먼저 군주의 용건을 듣고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소?”
“제가 가주님과 할 얘기가 있을까요?”
“용건 없이 오기에는 금령군주라는 지위가 너무 높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시오?”
“호호호~ 역시 듣던 대로 아주 현명하시군요. 그래요, 그럼 단둘이 대화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금잔화의 말에 담무룡은 유영필을 보며 말했다.
“군주께서 나와 대화가 필요한 모양이니, 난 잠깐 안으로 들어가겠다. 총관은 계속 잔치를 하거라.”
유영필에게 명을 내린 담무룡은 금잔화와 함께 안쪽으로 들어갔다.
‘금령군주…… 대단히 무서운 여인이라고 들었는데, 왜 갑자기 여기를 온 거지? 정말 세가에 무슨 일이 있긴 있는 것 같구나.’
안으로 사라지는 둘의 모습을 유심히 보던 담수운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담수련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악불군을 보았다.
그가 본 세가 내의 남자들 중 담수련을 가장 믿고 맡길 수 있는 단 한 명이 바로 그였다.
하지만 악불군이 호위 무사로서는 상당히 강한 편이지만 담수련을 보호하기에는 턱없이 약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축제 분위기였던 성인식은 금잔화의 등장으로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지만 담수련만은 긴장하지 않았다.
악불군이 자신이 보이는 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됐기 때문이었다.
* * *
“가주님의 집무실이 생각보다 아주 단출하네요. 오룡세가에서 가장 부자인 잠룡세가의 가주님께서 제일 검소하다는 말은 들었는데, 사실이었네요?”
자리에 앉은 금잔화는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원나라 조정에서 본가를 토사구팽하기로 결정을 한 모양이더구려.”
담무룡은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고 느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토사구팽이요? 호호호호~ 담 가주님께서는 토사구팽의 뜻을 곡해하신 모양입니다.”
“그럼 지금 본가에 행하는 행동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소?”
“토사구팽은 충실한 사냥개를 잡아먹었으니 분명 배신은 주인이 한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 대공 전하와 담 가주님 사이에 벌어진 일은, 사냥개가 주인의 음식을 훔쳐 갔으니 사냥개가 배신을 한 것이지요. 제 말은 토사구팽에 대한 비유일 뿐 절대로 담 가주님을 사냥개와 비교한 것은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셨으면 좋겠네요.”
순간 담무룡의 눈꺼풀이 떨렸다. 자신이 먼저 꺼낸 단어였지만 막상 그녀가 자신을 사냥개로 묘사하자 극노한 것이다.
‘여우같은 년! 감히 나를 가지고 놀려고 해……!’
담무룡은 속으로는 욕을 했지만 백전노장답게 태연하게 받았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안 그러면 군주께서 대공을 사냥꾼으로 비유하는 황망한 짓을 한 것이 되는데, 그래서야 되겠소?”
“호호~ 제가 오히려 담 가주님께 한 방 맞은 셈인가요?”
“한 방 먹이고 말고 할 상황은 아닌 것 같소이다.”
“그래요. 이미 다 아는 상황에서 말 돌릴 필요는 없겠지요. 대공 전하께서는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담 가주님께서 가지고 계시다고 생각하십니다.”
“나도 사실은 그게 의아하외다. 난 천륭검보나 천륭검을 보지도 못했소. 그런데 왜 그런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셨는지 모르겠소이다.”
“대공 전하께서는 이십 년이 넘게 천륭검보와 천륭검에 대해 조사를 하셨어요. 그 덕에 정말 많은 정보를 수집하셨지요. 그런데 참 신기하지요? 천륭검보와 천륭검은 천륭검가를 공격하기 전날까지 분명 있었어요. 그런데 너무 감쪽같이 사라졌고, 이십오 년이 지나는 동안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요. 심지어 그 무공을 익힌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지요.”
“그게 본가를 의심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오.”
“당연하지요. 대공 전하께서는 잠룡세가를 의심하지 않으셨어요.”
“그럼?”
“대공 전하께서는 담 가주님을 의심하는 것이지요.”
“지금 말장난을 하시는 거요?”
“그럴 리가요. 가주님께서는 잠룡세가의 누구도 모르게 독자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신 거지요. 물론 무림인으로서 천하제일의 비급을 보고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요. 다만 그 상대가 누구인지 정도는 한 번 더 생각하셨어야 했는데, 그게 좀 아쉽네요.”
“분명 난 아니라고 했소.”
“가주님, 세상 모든 일에는 인과(因果)라는 것이 있습니다. 결과가 있다면 시작과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전 대공 전하께서 그동안 모아 오신 정보를 분석했습니다.”
순간 담무룡의 눈가가 꿈틀했다.
“군주께서 직접 분석하셨다는 말이오?”
“그렇게 됐네요.”
“천하에서 가장 현명하여 미래까지 본다는 말이 있는 군주께서 직접 분석을 했는데 그 결과가 나라니, 실로 실망스러운 판단이구려.”
“대공 전하께서는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탐낼 만한 사람 중, 의심하는 사람과 의심하지 않는 사람 두 부류로 나누어 분석을 하셨더군요. 그리고 의심자 중 그날 천륭검가에 나타나지 않은 분들을 먼저 뺐고, 나타났지만 명확하게 동선이 드러난 분들을 또 소거했지요. 그랬더니 백여 명 정도가 남더랍니다.”
“거기에 내가 들어가더란 말이요?”
“아니요. 가주님께서는 그 백 명에 안 들어가셨습니다. 의심자군에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걸리지 않으신 것이지요. 그래서 전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당시 천륭검가에 있던 분들 중 절대 불가능한 사람을 먼저 소거해 나갔습니다.”
담무룡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당연히 나는 아니어야 하지 않겠소? 난 그곳에 가장 늦게 도착했으니 말이오.”
“글쎄요? 하여간 전 불가능한 사람들을 하나씩 소거해 나갔어요. 그랬더니 다섯 분이 남더군요. 물론 그분들도 불가능했어요. 그리고 불행히도 모두 오룡세가의 가주님들이었지요.”
“다시 말하지만, 다른 가주들은 천륭검가에 들어갔지만 난 한참 뒤에 들어갔소.”
“그거예요.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빼돌릴 수 있는 다섯 분 중 네 분은 그 덕에 증인을 가지게 되었어요. 서로서로가 증인이 되셨으니까요. 하지만 담 가주님께서는 한참 뒤에 나타나셔서 증인이 없더군요.”
“군주! 이미 검보와 검이 사라진 후 내가 도착했다는 것을 본 사람은 여러 명이요. 그런데 증인이 없다니, 그게 말이 되오?”
“오룡세가의 가주님들의 무공 수위는 모두 비슷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모두 가장 먼저 중지에 도착해 대공 전하께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바치는 영광을 얻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지요. 그런데 대공 전하께 가장 신임을 받던 가주님께서, 공교롭게도 모두가 천륭검보와 천륭검이 사라진 것을 안 후 알맞게 도착했습니다.”
금잔화의 말은 정황 증거일 뿐, 담무룡이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가져갔다는 확실한 증거는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자신이 행했던 상황을 정확하게 유추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소름이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정황만으로 대공께 큰 공을 바친 나를 내친다는 것이오?”
“대공 전하께서도 그래서 무척이나 망설이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럼 직접 만나 뵙고 확실한 결론을 내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이미 본가에 대한 압박이 시작되었던데, 결론을 이제야 낸다는 것이오?”
“가주님께서 검보와 검을 가지고 가신 것은 이미 결론이 났습니다. 제 말은 가주님께서 아직도 대공 전하께 도움이 될 분인지를 결론내겠다고 한 것입니다.”
담무룡은 이미 자신을 범인으로 특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내가 범인이라고 특정을 하신 모양인데, 도움이 되고 말고가 무슨 필요가 있겠소?”
“대공 전하께서 왕위를 받은 것이 이미 이십 년 전이에요. 그런데 가주님께서는 아직도 전하께 그냥 대공이라고 하시네요.”
“난 무림인이오. 그리고 대공과는 서로 협조하는 관계였소. 관리도 아니고 신하는 더더욱 아닌데 전하란 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소?”
“그럼 이제 신하가 되세요. 대공께 충성심을 보인다면 잠룡세가에 대한 압박은 당장 사라질 것입니다.”
“충성심을 보이라……. 대공 앞에 가서 무릎이라도 꿇으라는 것이오?”
“그건 그냥 가식적인 형식이지요. 근본적으로 대공 전하의 부담을 줄여 주는 방식이면 될 겁니다.”
“좀 알아듣기 쉽게 말해 주시겠소?”
“반란군인 홍건당의 세력이 지금 만만치 않아요. 거기다 지금 황실은 군벌들의 자중지란으로 그들을 소탕하는데 애를 먹고 있어요. 총체적인 난관이라고 할 수 있지요.”
“결국 그거요?”
“충성심을 보이는 데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요. 잠룡세가에서 대공 전하께 금자 이십만 냥과 일류급 고수 천 명을 지원해 주신다면, 가주님께서 검보와 검을 빼돌린 일은 없도록 해 드릴 수 있어요. 물론 검보와 검은 전하께 돌려 드려야겠지요.”
금잔화의 말에 담무룡은 주먹을 꽉 쥐었다. 금자 이십만 냥은 지금 잠룡세가가 비축한 전 재산이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다 일류급 고수 천 명은 잠룡세가 전력의 정확한 절반이었다.
이미 정밀한 조사를 하지 않고서는 내밀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담무룡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기도 했다.
“원 황실이 그런 허접한 반란 세력조차 막기 어려울 정도로 약해졌다는 것이오?”
스스로를 미륵불이라고 칭하던 백련교의 한산동은 원의 박해에 맞서기 위해 홍건당을 조직했다.
하지만 한산동이 원나라 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 수하였던 유복통이 본격적으로 반원의 기치를 내걸면서, 장강 남쪽의 백성들과 지하로 숨어든 중원의 무림인들까지 합세를 하기 시작했다.
그 덕에 지금은 원나라의 군대도 쉽게 토벌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져 있었다.
금잔화는 담무룡의 반문에 미소를 지며 말을 받았다.
“역시 담 가주님께서는 대단하세요. 그 와중에도 무엇이 더 이익일지를 생각하시니 말이에요. 가주님 말씀대로 지금 반군의 세력이 상당히 커진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것은 대공 전하께서 아직 본격적으로 나서지 않아서일 뿐입니다. 그분의 놀라운 무공을 잘 아시니 하는 말이지만, 어떤 세력도 대공 전하께서 마음만 먹는다면 단숨에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럼 지원금은 그렇다 쳐도, 천 명이나 되는 본가의 수하들이 필요한 이유가 없지 않소?”
“지원을 해 달라고 하니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인데, 제 말은 우리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지금 상황에서 가주님께서 최악의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말한 것뿐입니다.”
“군주의 생각이시오?”
“전하의 뜻입니다.”
“대공께서도 이제 나이가 드시니 예전과는 많이 달라지신 모양이구려.”
“무슨 뜻이지요?”
“대공께 말하면 내 말의 의미를 아실 거요. 그럼 더 할 얘기가 있소?”
“대충은 용건은 다 말한 것 같네요.”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소이다.”
“축객령이신가요?”
“딸애가 성인이 되는 생일이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잔치를 마치고 싶어서 하는 말이오.”
“제가 좀 껄끄러우신 모양이군요? 그래요. 이왕 왔으니 선물은 놓고 가겠습니다.”
“배웅은 하지 않겠소.”
“호호호~ 가주님께서 어떤 결정을 하실지 참 궁금해지네요. 그럼 즐거운 잔치되시기를 바랄게요.”
“조심해서 가시오.”
겉으로는 화기애애하게 진행된 대화였지만, 둘은 이미 결코 화기애애하지 않은 결말을 이미 예상하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