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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28화 (28/472)

<천검지애 28화>

28화. 전조(1)

금잔화가 나타나면서 성인식의 흥은 완전히 깨져 있었다. 간부들의 표정부터 굳어 있으니 다른 사람들 역시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 세가에 무슨 일이 있는 거 맞지요?”

담수련은 역시 표정이 어두운 담수운을 보며 물었다.

“수련아.”

“예.”

“아버님께서는 평생을 도전 속에서 살아온 승부사다. 이번 일도 아무 일 없이 헤쳐 나갈 것이니 걱정 말거라.”

담수운의 말은 지금 상황에서 그가 담수련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 역시 표정이 굳어 있으니, 담수련의 불안을 무마하는 데는 부족했다.

담수운은 이틀 전 담무룡과 대화를 끝낸 후 많은 고심을 했다. 담무룡의 계획을 따른다는 것은 그의 신념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따르지 않는다면 담무룡이 구축해 놓은 잠룡세가의 비밀 조직이 어떻게 될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담수운이 생각에 잠기자 담수련은 자신도 모르게 악불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도 자신에게 눈을 떼고 있지 않는 악불군의 눈을 보자 왠지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아가씨께서 불안해하고 계신다…….’

담수련과 눈이 마주친 악불군은 그녀에게서 불안을 느끼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가 그녀에게서 어떤 불안도 느끼지 않는 보호막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자책의 마음이 들고 있었다.

그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간부들의 고개가 한쪽으로 향했다. 안채로 들어갔던 금잔화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금잔화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담수련이 앉은 자리로 다가갔다.

그리고 담수련과 삼 장 정도 거리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악불군이 그 앞을 막았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삼 초 안에 당신을 죽일 수 있는데, 이렇게 막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삼 초면 아가씨께서 피할 시간은 되겠지요.”

“소군, 물러서.”

보고 있던 담수련이 악불군이 다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급히 끼어들었다.

“호호호~ 담 소저는 정말 충직한 수하를 둬서 좋겠어요?”

담수련의 등 뒤에 서는 악불군을 보며 금잔화는 정말 부럽다는 듯이 물었다.

“제게 할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담수련은 그녀의 말에 답 없이 반문했다.

“나와 의자매 맺자는 말, 그냥 한 말이 아니에요. 어때요?”

“군주님께서 저를 어여삐 보아 주셔서 감사하긴 하지만, 아직 의자매 얘기를 하기에는 서로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담수련은 완곡한 표현으로 거절을 했다.

“그래요. 아직 기회는 있으니까 좀 더 생각해 봐요. 아무래도 저 때문에 분위기를 망친 것 같아서, 끝까지 보지 못하고 가야 할 것 같네요.”

말을 마친 금잔화의 몸이 공중으로 석 자 정도 뜨더니 그 자세 그대로 뒤로 날아가더니 가마에 앉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모두의 얼굴에는 감탄의 빛이 나타났다. 그녀가 보인 경공은 최소한 일 갑자 이상의 내공을 지녀야만 펼칠 수 있는 비공허도였기 때문이었다.

“가자!”

“예!”

대답과 함께 일사불란하게 사라지는 그들을 보며 담수련의 얼굴에 다시 불안감이 나타났다.

금잔화는 떠나기 전 담수련 쪽을 잠시 주시했었다.

모든 사람들이 담수련을 보고 떠났다고 생각했지만, 담수련만은 그녀의 눈동자가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분명 소군을 보고 있었어……. 그런데 의미가 뭐지?’

담수련은 몸을 돌려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악불군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자 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 * *

“가주님!”

금잔화가 중간에 떠났음에도 담무룡이 나타나지 않자 문창현이 급히 집무실로 달려갔다.

“들어와라.”

안으로 들어선 문창현은 담무룡이 자신의 의자에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건방진 계집! 어린 계집이 감히 나를 가지고 놀려고 하더구나.”

“뭐라고 했습니까?”

“제안을 하더군…….”

담무룡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주먹을 꽉 쥔 채 금잔화가 던진 제안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설명을 다 들은 문창현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상황이 생각보다 아주 위중하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확답은 안 줬다.”

“주군께서 배웅도 안 하셨으니 대충 답은 짐작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성정상 우리를 압박하기 위해 어떤 행동이 수반될 것입니다.”

“명분을 만들기 위해 들어줄 수 없는 제안을 한 것이다. 이제 우리도 본격적인 대비에 들어가야겠구나.”

“주군, 대공을 대놓고 거역한다면 본가라 해도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멸문할 우려가 크겠지.”

“주군, 지금 원나라의 상황이 그리 좋지 못합니다. 아무리 대공이라 해도, 원 황실에 우호적인 우리를 단칼에 자르는 것은 부담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금령군주의 제안을 들어주는 척하며 최대한 대비할 시간을 버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문창현.”

“예!”

“그동안 너무 편하게 지내 온 모양이구나.”

“그게 무슨?”

“상황을 대충 보기만 해도 전체를 파악하던 네가, 이렇게 간단한 계략도 알아채지 못하니 하는 말이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계략이라 하심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를 죽이러 오는 자들에게 돈도 주고 군사도 주는 형상이라는 걸 모르느냐?”

“명색이 대공이 아니십니까? 그 지위에 빈말을 하시겠습니까?”

“대공, 그는 이기기 위해서는 어떤 짓이라도 한다. 일 년의 시간을 준 이유는 우리 스스로 무너지기만 바란 것이 아니라, 본가의 전력까지 흡수할 생각이기 때문이야.”

“그럼 금령군주의 제안을 거절하실 생각이십니까?”

“당장 거절할 이유는 없겠지. 하지만 살려 달라는 식으로 급하게 받아들일 생각도 없다. 지금까지의 압박은 아마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어쩌면 항주까지 봉쇄할 수도 있으니, 거기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라.”

“주군.”

“할 말이 있느냐?”

“대공과 주군의 사이는 오룡세가의 가주 중 가장 돈독했습니다.”

“그래서?”

“대공과 만남을 한번 가지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문창현은 어떻게든 이 전쟁만은 피하고 싶었다.

대공과의 전쟁은 무조건 필패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담무룡은 금잔화와의 대화에서 대공이 자신을 완전히 버렸다는 것을 직감한 터였다.

“스스로 범의 입에 뛰어들라는 것이냐? 살아난다 해도 남자로서 당할 수 있는 온갖 치욕을 겪어야 할 것이다. 대공에게 치욕을 당하고 싶지 않다.”

담무룡의 말에 문창현은 설득은 틀렸다고 생각한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서 우리의 피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담무룡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물었다.

“성인식은 어떠냐?”

“분위기가 좀 가라앉았습니다.”

“오늘은 주인공은 수련인데 나 때문에 분위기를 망치면 안 되겠지. 설총마를 준비시키거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문창현이 나가는 모습을 본 담무룡의 표정이 침통하게 변했다.

‘역시 욕심이 심했어. 천륭검보를 익힐 수 있었다면 한번 해볼 수 있었건만……. 악불군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강인한 표정으로 묵묵히 담수련을 호위하는 악불군의 모습을 생각하며, 담무룡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그가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빼돌리고 무림 문파를 공격할 때마다 구할 수 있는 비급과 영약을 최대한 확보한 것은 담수운 때문이었다.

강해지고 싶어 중원 무림까지 배신했고, 그 결과 그는 강해졌고 부귀영화까지 누렸다.

하지만 그에게는 절대 넘볼 수 없는 절대자가 둘 있었다. 천륭검가의 가주였던 무황과 원 황실 최고의 고수인 대공이었다.

그는 태생적으로 자신보다 위에 누군가가 있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담수운을 자신이 갖지 못한 위치에 오르게 하여, 자신이 해내지 못한 꿈을 이루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담수운은 그보다도 재질이 떨어졌다. 더욱이 그를 더욱 실망시킨 것은 야망 없는 그의 태도였다.

‘수운이와 수련이가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수밖에 없다면 결국 악불군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말인데…… 어이가 없군. 잠룡세가의 미래를 일개 호위 무사에게 걸어야 한다니, 쯧!’

담무룡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곧 몸을 일으켰다. 담수련이 설총마를 받고 좋아하는 모습을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 * *

“얘기는 잘되셨습니까?”

금잔화가 항주를 벗어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혈랑사자가 나타나 가마 옆에 붙으며 물었다.

“다혈질이라고 들어서 항우 같은 자인 줄 알았는데, 조조 같은 자더구나. 쉽지 않을 것 같더라.”

“무공과 머리까지 겸비한 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공 전하의 신임을 받아 노른자위라고 할 수 있는 절강을 세력권으로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 연극도 잘하더구나. 하긴, 그렇지 않았다면 대공 전하께서 이십 년이 넘게 범인을 옆에 두고 못 찾을 리 없겠지.”

“대공 전하께서 담무룡도 조사는 했습니다. 하지만 천륭검보를 얻었다면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익힌 흔적이 나타나야 하는데, 전혀 발견을 하지 못했습니다.”

“전에도 잠깐 말했지만, 천륭검가에서조차 천륭검보를 오성 이상 익힌 자는 몇 명 안 되었다고 들었다. 구문황조차 겨우 칠성을 익히고도 무황으로 불리며 대공 전하까지 막아 냈잖아.”

한번 목표를 정하면 단숨에 처리하는 대공조차 구문황이 살아 있을 때는 천륭검가를 도모할 생각조차 못했으니, 구문황의 무공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럼 군주님께서는 담무룡이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시는군요?”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자 외에는 가져갈 수 있는 시간이 있는 자가 없었어. 맞을 거야. 그리고 잠룡세가에 악불군이라는 자가 있으니, 그자에 대해서 알아봐.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잠룡세가에 어떻게 들어갔는지까지 샅샅이 알아봐.”

“악불군이요?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무공은 일류 중상위 정도 될 거야. 담수련의 호위 무사더구나.”

“호위 무사요? 그런 자를 조사할 이유가 있습니까?”

“아직은 이유를 모르겠어. 그런데 내 예감에, 뭔가 있어.”

무공도 자신보다 한참 약한 악불군이 그녀의 눈을 정면으로 받아 내면서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긴장을 할 정도였다.

금잔화는 계속 악불군에 대해 관심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 * *

“아가씨, 백설이가 그렇게 좋으세요?”

백설의 목을 계속 쓰다듬고 있는 담수련을 보며 추국이 물었다.

“그때 보고 정말 많이 보고 싶었거든. 백설이도 나 많이 보고 싶었지?”

담수련의 질문에 백설이는 마치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호호, 얘 좀 봐! 꼭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흔드네? 어머!”

그 모습에 재미있다는 듯이 웃던 연화는, 갑자기 백설이 자신에게 뒷발질을 하자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백설이는 너희들 하는 말 다 알아들으니까, 백설이 앞에서는 말조심해.”

담수련의 말에 사화는 까르르 웃었다.

그 모습을 숨어서 보고 있던 악불군의 얼굴은 그리 좋지 않았다.

오룡세가가 갑자기 다 떠나자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던 손님들은, 금령군주까지 나타나고 담무룡을 비롯한 모두의 표정이 굳어지며 축제 분위기까지 싸늘하게 식어 버리자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한 조짐을 그들도 눈치챈 것이다. 담무룡의 성격을 생각하면 자리를 먼저 떠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있자니 불안한 것이다.

결국 담무룡은 담수련이 백설을 선물로 받는 것을 끝으로 성인식을 마쳤다.

담수련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과할 정도로 기분이 좋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지만, 악불군은 그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화, 너희들은 백설이 데리고 잠시 물러가 있어.”

같이 웃던 담수련이 갑자기 침울한 표정으로 말하자, 사화는 이유도 묻지 못하고 백설을 끌고 사라졌다.

“소군.”

담수련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악불군은 즉시 몸을 날려 그녀의 앞에 섰다.

“부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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