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9화>
29화. 전조(2)
“소군, 몸은 괜찮아?”
“전 괜찮습니다.”
“다음부터 나설 때는 내게 언질을 좀 줘. 다짜고짜 나서면 내 심장이 놀라. 그리고 소군 자꾸 다치는 거, 나 정말 싫어.”
근래 악불군이 앞으로 나설 때마다 자꾸 부상을 입고 안 좋은 일을 당하자 걱정이 많아진 그녀였다.
“아가씨를 놀라게 했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고…….”
“압니다. 저 걱정해서 하신 말이란 거.”
악불군이 미소를 지며 답하자 담수련은 또다시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고 급히 심호흡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오늘 아버님께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지 않아?”
“불안하십니까?”
“소군이 있어서 불안하지는 않아. 다만 걱정이 돼.”
“가주님께서는 중원 전체에서 가장 강한 분 중 한 분으로 꼽히십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아니야. 나는 아버님께서 오늘 같은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없어. 분명 단순히 문제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큰일이 벌어진 것 같아.”
악불군도 그런 담무룡의 표정을 처음 본 터라, 세가에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담수련에게 그런 말을 해서 힘들게 할 필요는 없었다.
“아가씨, 세상에는 언제나 큰일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가 피할 방법은 없습니다. 어떻게든 피해 봐야 또 다른 큰일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때그때 맞닥뜨리면서 헤쳐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담수련은 멍한 눈으로 악불군을 쳐다보았다.
“소군, 정말 멋있다…….”
“예?”
“아, 아니야.”
담수련은 또다시 가슴이 두근거리자 급히 고개를 숙이며 얼버무렸다.
‘분명 멋있다고 하신 것 같은데…… 나 보고 한 말일까? 에이, 설마!’
악불군은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판단하고는 달래듯 말했다.
“아가씨, 제가 있는 이상 어떠한 일도 아가씨를 위협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성인식을 치르느라 많이 피곤하실 것입니다. 이만 처소에 들어가 편히 주무십시오.”
“으응…… 그럼 나 갈게. 소군도 좀 쉬어.”
담수련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가슴 두근거림이 너무 심해지자 악불군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바보같이! 거기서 왜 멋있다는 말이 나오는 거야…….’
담수련은 얼굴이 화끈거리자 더욱 걸음을 빨리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담수련의 뒷모습을 보면서, 악불군은 입술을 꾹 물고서 중얼거렸다.
“부족해. 아가씨께서 언제 어디서든 편한 마음을 먹을 수 있을 만큼 강해져야 해.’
* * *
[주군.]
[들어오너라.]
안에 들어선 종리화는 약간은 의아한 듯 다시 말했다.
[그런데 주군, 이 안에서까지 전음이라니? 설마 가등우까지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가등우와 문창현까지 못 믿는다면 내가 너무 불쌍하지 않겠느냐? 한데…… 솔직하게 지금 난 너와 수련이 외에는 누구도 믿을 수가 없구나.]
[그 정도입니까?]
담무룡의 말에 종리화의 표정이 굳어졌다. 상황의 심각함 때문이 아니라, 담무룡이 최측근 수하까지 믿지 못할 정도로 사면초가의 상태에 몰려 있다는 것이 마음이 아파서였다.
[대공을 알고 있는 수하들은 누구도 완전하게 믿을 수는 없다.]
[도대체 대공이란 자가 어떤 자이기에 그러십니까?]
[알면 누구라도 그와는 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냥 가만히 쳐다만 봐도 공포감을 주는 자라고 하면 맞는 말일 게다.]
한마디로 타고난 절대자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담무룡은 자신도 남에게는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제가 보기에는 주군께서도 대공과 다를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대적할 마음을 먹었겠지. 그래, 양호철에게 연락은 됐느냐?]
[상당히 탄탄하게 준비해 놓았더군요. 그런데 그동안 죽었다고 소문이 나거나 도망친 걸로 알려진 수하들이 상당히 많이 합류해 있더군요? 저만 따로 준비를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놀랐습니다.]
[대공이 언제든지 내 뒤통수를 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천화궁주의 서찰을 받고, 저도 주군께서 오랜 기간 준비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화야.]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종리화는 살짝 놀란 듯 잠시 멈칫했다.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죄송해요. 주군께서 제 이름을 부르는 날이 또 올 줄은 몰랐네요?]
담무룡은 종리화의 말에 잠시 미안한 듯 얼굴을 보더니 물었다.
[수하로서가 아니라 내가 아끼는 화야에게 묻는 것이다.]
[말씀하십시오.]
[악불군을 믿을 수 있겠느냐?]
[악불군이요? 그건 왜?]
종리화는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혹시 악불군에 대해 무슨 의심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계획을 좀 변경하려고 한다.]
[어떻게?]
[수운이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보류하고, 세력을 나눌 생각이다.]
[그렇지 않아도 불리한데, 세력까지 나누시면 더 약화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얼마간은 숨어 지내야 한다. 그래서 그동안 잠룡밀은 수운이에게 맡기고, 잠봉밀은 수련이에게 맡기려고 한다.]
[소가주님과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종리화의 질문에 담무룡은 고심하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놈을 내가 잘못 키운 것 같다. 모두 자기 잘되라고 한 것이거늘, 나에 대한 원망이 아주 깊어.]
담수운과 담무룡의 불화는 종리화도 잘 알고 있던 터였다.
[그렇다 해도 아가씨는 당장 조직을 건사할 능력이 안 됩니다.]
[안다. 하지만 수운이만 전적으로 믿기에는 그 아이의 성정이 너무 약하고 생각이 너무 외골수야. 반면에 수련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여리고 약하지만, 그 아이의 강단은 수운이보다 더 강하다. 그리고 지혜가 누구보다도 뛰어나다.]
종리화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지로 담수련은 적들의 수많은 납치 시도에도 겁을 내거나 의연함을 잃은 적이 없었다.
[아가씨의 능력이 출중한 것은 저도 압니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무공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만용에 불과해집니다.]
[그래서 악불군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물은 거다.]
[악불군에게서 주군이나 잠룡세가에 대한 충성심을 원하신다면 큰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아가씨에게만 국한시킨다면 주군보다도 더 아가씨를 아끼는 아이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아가씨께서 가장 믿는 사람도 악불군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 네 말을 들으니 이제 홀가분한 마음으로 결정할 수 있겠구나.]
[어찌 하시려고요?]
[수운이를 위해 준비한 모든 것을 악불군에게 쏟아부을 생각이다.]
[……그게 무슨?]
[수련이를 어떤 위험에서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주겠다는 것이다.]
[설마 대법을 악불군에게 펼치시겠다는 것입니까?]
담무룡은 자신이 기이영초와 영약들을 구할 때 종리화를 통해 구해 왔다. 특히 천년성형하수오를 얻을 때는 정말 최고의 기밀을 유지했다.
[왜? 악불군은 안 되겠냐?]
[정치에 전혀 때가 묻지 않은 아이입니다. 그래서 가장 믿을 수 있다는 것이지만, 대법은 주군께서 소가주님을 위해 철저하게 준비하신 것인데…….]
[수운이가 종가에 가서 개정대법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 또다시 대법을 받는다면 너무 위험해.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다가는 대공의 공격 때문에 그대로 버리게 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그러느니 수련이를 위해 도박을 해 볼 생각이다.]
[종가에서 소가주님께 개정대법을 해 줬다고요?]
[종가에서 이미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할 것을 짐작하고 수운이에게 종가의 미래를 맡긴 모양이다.]
[종가에 도움을 청해 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이미 종가에선 나를 원나라의 개라고 한다. 수운이를 받아 준 것만도 적통이라는 핏줄 때문이지, 예뻐서는 아닐 게다.]
[제가 직접 잠봉밀을 맡아 아가씨를 보호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두 세력을 합쳤다면 가능했겠지만, 지금은 안 된다. 수운이와 수련이가 믿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 너는 천화궁에 숨어 둘을 보호해야 한다.]
[일 년밖에 시간이 없는데, 악불군의 지금 실력으로 얼마나 늘 수 있겠습니까?]
[이미 모든 기초는 잡혀 있다. 남은 것은 내공과 절정무공인데, 내공은 내가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무공은…….]
담무룡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자신이 이십 년이 넘게 연구했음에도 아무런 결실도 내지 못한 것을 악불군이 짧은 시간에 눈에 띄는 성과를 냈다는 말까지는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뭔가 본 것이 있으시군요?]
[그래, 어쩌면 대단한 물건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다만 담씨가 아닌 것이 아쉽구나.]
[아가씨가 담씨이십니다. 그런데…….]
[할 얘기가 있느냐?]
[아닙니다.]
종리화는 악불군과 담수련 사이에 묘한 감정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말할까 했지만 곧 마음을 바꿨다. 지금 그런 말을 해 봐야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만 가 보거라. 그리고 네가 나가면 수련이가 충격을 받을 수도 있으니 언질은 좀 주거라. 똑똑한 아이이니 금방 이해할 게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양호철이 잠룡밀을 활성화시키려면 최소 넉 달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알았다. 수운이는 그때 내보내도록 하자.]
[주군.]
[말해라.]
[주군의 계획에 소가주님과 아가씨는 있는데 주군은 없습니다. 주군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나까지 대공이 두렵다고 도망을 친다면 잠룡세가는 그냥 통째로 대공의 입에 넣어 주는 것과 똑같은 꼴이 된다. 난 그렇게는 못한다.]
[하지만 진짜 공격이 시작된다면 주군의 안전도 담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기지 못한다 하여 내 한 몸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약하지는 않다. 너와 천화궁주만 잘해 주면 잠룡세가는 반드시 다시 부활할 수 있다.]
담무룡이 큰 소리는 치지만 예전의 자신만만함이 보이지 않자, 종리화는 마음이 안 좋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당장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의 명을 확실하게 완수하는 것뿐이었다.
[제가 맡은 임무는 확실히 완수하겠습니다.]
* * *
천륭검보의 그림에 신묘한 뭔가가 있다는 것을 확신한 악불군은, 맹목적으로 따라하던 지금까지의 방식과는 달리 한 자세 한 자세마다 기의 흐름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느끼면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종리 단주님?’
악불군은 종리화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자 급히 자세를 풀었다.
“자고 있었느냐?”
그의 옆에 나타난 사람은 종리화였다.
“아닙니다. 무공 수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뭇가지 위에서 수련을 했다는 거냐?”
“제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근래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좀 더 강해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강해지는 데는 수련 외에는 지름길이 없다고 교두님께서 그러셨습니다.”
“하긴 무림인이 강해지는 데 있어서 수련만큼 좋은 방법은 없지. 하여간 너의 그 성실함은 인정할 만하구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가주님을 만났었다고?”
“제가 대답을 해야 합니까?”
담무룡과의 만남이었다. 악불군으로서는 함부로 누설할 수가 없었다.
“안 해도 된다. 걱정 마라, 가주님께서 내게 명을 내린 것이 있어서 물은 거니.”
“이틀 전에 만났습니다.”
그제야 대답을 하는 악불군을 보며 종리화는 미소를 살짝 짓더니 다시 물었다.
“가주님의 집무실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를 알고 있다고 하던데, 맞느냐?”
“그날 가주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나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알려 주지 않은 길을 네게 가르쳐 주신 것을 보면, 네게 큰 기대를 하고 있는 듯하구나?”
“제게 기대를 할 일이 있겠습니까?”
“하긴, 넌 아가씨 외에는 관심이 없는 아이지. 가주님께서 오늘 밤부터 자시에 맞춰 가주님의 집무실로 은밀하게 오라고 명하셨다.”
“자시면 아가씨께서 가장 취약할 시간입니다. 자리를 비우기 어렵습니다.”
“아가씨는 이제부터 잠봉단에서 완벽하게 보호할 것이니 걱정 마라. 저번 같은 일은 이제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종리화의 말에 악불군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되묻는 것조차 없이 넘어갔을 테지만, 담수련을 제외하고 가장 믿는 사람이 그녀였기에 물은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 모든 적으로부터 아가씨를 완벽히 호위해야 하는 네가 자꾸 부상을 당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신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네 잘못이 아닌데 죄송할 일은 아니지. 그래서 가주님께서 네 무공을 최대한 빨리 늘 수 있도록 직접 사사해 주실 모양이다. 너로서는 다시없는 절호의 기회이니 열심히 익히도록 하거라.”
“가주님께서 제 무공을 봐주신다는 것입니까?”
“그렇다.”
종리화의 말에 악불군은 환호가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지금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