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1화>
31화. 수련(2)
언제나처럼 담수련의 처소가 보이는 나무 위에 앉은 악불군의 머릿속은 아주 복잡했다.
종리화가 보낸 서찰에는 당금 잠룡세가가 처한 상황과, 악불군이 이제부터 해야 할 일에 대해 적혀 있었다.
종리화는 자존심이 강한 담무룡이 악불군에게 자신이 밀리는 지금 상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악불군이 담수련을 제대로 보호하려면 이제부터 일어날 일에 대해 어느 정도는 언질을 주어야 대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덕분에 서찰은 악불군에게는 새로운 세상에 대해 눈을 뜨는 계기가 됐다.
그가 아는 무림 세력은 잠룡세가뿐이었다.
그에게 담무룡은 천하제일 고수였고, 잠룡세가는 천하에서 가장 강한 세력이었다.
‘도대체 무림이란 곳이 얼마나 무서운 곳이기에, 잠룡세가가 단지 위협만으로 이렇게 흔들리는 것이지?’
육관을 통과하면서 교두들에게 무림이 얼마나 험악한 곳인지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종리화의 서찰이 사실이라면 무림은 험악하다는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곳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 무림이 아니라 지옥의 도산검림이라 해도 나를 막을 수는 없어.’
입술을 꾹 다문 악불군은 서찰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러자 서찰은 순식간에 가루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순간 악불군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중요한 서류를 손바닥으로 비벼 파쇄하는 것은 삼, 사십 년의 공력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흔적도 없이 완전한 가루로 만드는 것은 그의 공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건 내 실력이 아닌데? 어떻게 된 거지……?’
악불군은 자신의 두 손바닥을 보며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자신이 하고도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펼친 무공이 그가 아는 자신의 무공보다 상회한다는 것은 오히려 환호를 부를 일이었다.
문제는 자신도 자신의 무공이 많이 늘었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악불군은 무명비급에서 본 그림의 자세를 취했다.
늘었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가 한 것이라고 그림의 자세를 취하는 수련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변화는 그 그림의 자세 때문이라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가주님께서 그 비급에 그렇게 흥미를 가지신 이유가 분명 있었어. 어쩌면 보통 무공이 아닐지도 몰라.’
악불군은 그러자 그동안 관심에 없었던 각 장에 한 글자씩 적혀 있던 글자들을 유추하기 시작했다.
그림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던 글자들.
‘그래. 그 그림이 이렇게 효과가 대단하다면, 그 글자에도 분명 뜻이 있을 거야.’
악불군은 자신이 지금 깨달음의 단계를 하나씩 밟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 * *
성인식이 끝나고 한 달이 지났다.
항주성 내에서는 이상한 괴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절강성을 지배하던 잠룡세가가 멸문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최전성기라고 할 정도로 그 위세가 등등한 잠룡세가가 멸문한다는 소문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 소문은 전혀 줄어들 기색 없이 계속 퍼져 나가고 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소문을 퍼뜨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혈랑사자님, 오두경입니다.”
“들어와라.”
혈랑무 영주인 오두경은 안으로 들어서더니 두 손으로 작은 쪽지 하나를 바쳤다.
“언제 왔느냐?”
쪽지를 펼쳐 본 혈랑사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읽더니 물었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알았다. 나가 보아라.”
“예!”
‘종리화가 안 보인다고?’
혈랑사자는 쪽지를 다시 읽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잠룡세가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한 그였다.
그리고 종리화는 회유가 불가능한 담무룡의 최측근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찬두려.”
혈랑사자의 부름에 한 중년인이 급히 대답하며 뛰어 들어왔다.
“예!”
“네가 잠룡세가를 맡고 있었지? 종리화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면 모두 말해라.”
“종리화는 젊을 적 혈의나찰이라 불릴 정도로 잔인하고 무서운 마녀로 통했습니다. 하지만 사파로는 분류가 안 되었는데, 잔혹한 행동 양식에 비해 그 이유가 대부분 정당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성향은 어떠냐?”
“그녀가 잠룡세가에 몸을 담은 이유는 정치적인 성향과는 상관없이 담무룡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 종리화는 처음부터 담무룡의 수하였다는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녀에 대한 회유는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지금 잠룡세가에서 눈에 띄지 않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만약 진짜로 사라진 것이라면 우리의 포위망에 구멍이 있다는 것이니, 빨리 찾아내라. 그리고 만약 빠져나갔다면 당장 추적한다.”
“존명!”
‘하긴 담무룡이 가만히 앉아서 당할 자는 아니지.”
찬두려가 나가자 혈랑사자는 젊을 적의 담무룡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 * *
“가등우!”
“예!”
“내가 삼 일간 폐관을 할 생각이다. 누구의 방문도 받지 않을 것이니, 누구를 막론하고 집무실 주위 백 장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라.”
“갑자기 왜 폐관을?”
“너만 알고 있어라. 다른 간부들에게는 내가 생각할 것이 있어 두문불출한다고 하고.”
가등우는 뭔가 계획이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허리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담무룡은 비밀 연무장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준비한 것을 오늘 시전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 * *
[연무장으로 들어오너라.]
오늘도 비밀 통로를 통해 담무룡의 집무실에 도착한 악불군은, 담무룡의 전음에 연무장으로 들어가는 비밀문을 열었다.
악불군은 모르고 있지만 비밀 연무장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잠룡세가에서 담무룡을 제외하면 오로지 그밖에 없었다.
담무룡과의 만남 이후 악불군은 천륭검보의 그림을 수련하고, 달마역근경의 구결대로 운기조식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리고 매일 비밀 연무장에 와서 담무룡과 비무를 했다. 처음에는 삼 초도 버티지 못했지만 이젠 이십여 초까지 버틸 정도였다.
악불군은 자신에게 무재가 없는 것인가 하고 자책을 할 정도였지만, 담무룡은 실로 경악을 할 정도로 놀라고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자 열 명을 꼽으라고 하면 반드시 들어가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더욱이 담무룡은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절정 고수들과 벌인 생사투의 횟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실전 경험도 많았다.
그런 그에게 삼 초도 못 버티던 악불군이 겨우 한 달 만에 이십 초를 넘게 버틴다는 것은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성취였다.
비밀 연무장에 도착한 악불군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예전과는 다르게 연무장에 뿌연 연기가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너의 내공이 예상보다 빨리 늘어서 계획을 좀 앞당길 생각이다.”
“제 내공이 늘었습니까?”
“아마 너는 별로 느끼지 못할 게다. 나도 네 말을 듣고 연구해서 근래에 알아낸 사실이다. 그 비급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의 자세는 보통 사람들은 할 수 없다. 너 같이 특이한 체질을 가진 자만이 취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제가 특이한 체질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겉으로 볼 때, 그냥 무재가 있구나 정도라고 볼 수 있겠지. 네 신체는 보통 사람들에 비해 월등한 탄력과 유연성을 가진 뼈와 질기면서도 강한 근육을 같이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그 자세를 취할 수 있었던 거다.”
“하지만 그 자세가 내공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자세를 조합하면 하나의 초식이 된다. 하지만 더 큰 효용은, 그 자체로 기를 흐르게 하는 구결과 같은 효과를 보여 운기조식 같이 공력을 키워 준다는 것이다.”
막상 일취월장하고 있는 악불군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십 년이 넘게 연구를 해 왔던 담무룡은 악불군의 상태를 계속 주시하면서 천륭검보의 놀라운 효능을 알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저는 늘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까요?”
“내가 익히지를 못해서 거기까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곧 알게 될 게다. 우선 그것보다는 이제부터 시작할 대법에 집중해라.”
“대법이요?”
“너의 무공이 빠르게 늘고는 있지만, 시간이 너무 없다. 네가 완벽하게 검보를 익힐 때까지 너를 보호할 장치가 필요하다.”
말을 마친 담무룡은 뿌연 연기를 내뿜고 있는 커다란 통을 슬쩍 보며 다시 말했다.
“우리 담씨 종가는 원래 의가(醫家)였지만, 우연하게 무림인들을 치료하면서 그들의 신체의 변화에 흥미를 느껴 연구를 하다가 무림 세가가 되었다. 하지만 조사께서 외부 활동을 금하셨기 때문에 태산의 심산유곡에서 은거하고 있다.”
담무룡은 종가의 소가주로서 가업을 이어받아야 했지만, 능력을 가지고도 숨어 사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종가를 뛰쳐나오고 말았다.
“아가씨께 종가에 대해 언뜻 들은 적은 있었습니다.”
“수련이가 종가 얘기까지 했다니, 너를 무척 믿기는 하는 모양이구나.”
묘한 눈으로 말하는 담무룡의 보자 악불군은 급히 부언을 했다.
“자세한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상관없다. 지금부터 하는 말이나 잘 기억해 둬라.”
“예.”
“천하에 있는 외문기공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피부 조직을 강철처럼 단단하게 하여 여간한 무기에는 상처조차 나지 않게 만들어 주는 철포삼(鐵袍衫)이다. 하지만 너보다 강한 내공을 지닌 자를 만나면, 겉으로는 상처가 보이지 않더라도 내상을 입을 수 있다.”
철포삼은 무공 같이 수련을 통해 익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약물의 도움을 받아 연성을 하기 때문에, 빠르게 고수가 되고 싶은 자들이 많이 시도하는 외문 무공이었다.
하지만 그 약물을 구하기가 원체 어렵고 연성 중에 겪는 고통이 너무 커서, 실지로 철포삼을 완벽하게 익힌 사람은 많지 않았다.
“철포삼을 익힌 상태에서 내공이 일 갑자를 넘게 되면 금종조(金鐘罩)로 발전시킬 수 있다.”
담무룡의 이어지는 부언에 악불군은 고무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제가 철포삼을 익히는 것입니까?”
철포삼은 수련을 통해 익히는 것이 아닌지라 정종 무공을 배운 무림인들은 천시하는 무공이었다.
하지만 그 효과는 아주 탁월해서 삼류 무사도 철포삼만 완성하면 당장 일류 고수와 대적할 수 있다는 말을 악불군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고무될 수밖에 없었다.
“철포삼은 피부에 아주 독한 약들을 흡수시켜 검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질기게 만들어 준다. 종가에서는 거기에 몇 가지를 더 첨부해, 공격 시 상대에게 타격도 주고 독공에도 버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단 그 방법은 철포삼만 시술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고통이 너무 심해 다들 견디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바람에, 아직 성공한 적이 없다. 네가 철포삼만 익히겠다고 하면 그렇게 해 주겠다.”
“아닙니다. 더 강해질 수 있다면 버텨 보겠습니다. 전 아가씨만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다면 어떤 고통이라도 견뎌 낼 수 있습니다.”
담무룡은 악불군의 다짐이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포기할 수 없다. 어떤 고통이 있더라고 버텨야 할 것이다. 옷을 모두 벗고 저 안으로 들어가라.”
“예!”
대답을 한 악불군은 옷을 벗고는 거침없이 통 안으로 들어갔다.
통 안에는 뿌연 연기를 뿜어내는 죽 같은 검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악불군이 통 안에 정좌를 하고 앉자, 담무룡은 자물쇠가 채워진 작은 상자를 벽에 만들어진 비밀 금고에서 꺼냈다.
상자 안에는 자그마한 호리병이 놓여 있었다.
담무룡은 다시 갈등하는 표정으로 호리병을 한참 쳐다보더니 작은 한숨을 내쉬며 꺼내 들었다.
담수운을 위해 수십 년에 걸쳐 구한 수많은 기이영초와 귀물(貴物)들의 진액을 빼내 숙성시킨 약물이었다. 마시고 제대로 흡수만 시킨다면 백 년 이상의 내공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당장이 아니고 계속적인 수련이 필요했다.
담수운이 개정대법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차라리 자신이 직접 마시고 대공을 상대해 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미 불혹(不惑)을 넘긴 그의 나이에 효과는 한정적이었다.
‘그래, 어차피 대공의 공격이 시작된다면 그냥 버리게 된다. 아까워할 때가 아니야.’
마음을 굳힌 담무룡은 호리병을 들고 악불군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