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3화>
33화. 변화(1)
영약이나 기이영초에 의해 증진된 공력은 정순하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즉, 강하기는 하지만 지속력이 약하고 다시 보충되는 시간이 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반드시 충분한 수련을 거쳐야 그 내공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내공을 증진시키는 귀물(貴物)을 먹고 나서 즉시 폐관에 들어가는 사람이 많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그런데 악불군의 내공은, 증가량은 적은 듯 보였지만 그 공력이 아주 정순했다.
‘왜 나타난 결과가 내 예상과 이렇게 다른 거지? 종가의 보고서에 이상이 있을 리 없는데?’
담무룡은 생각지 못한 결과에 무척 의아했지만, 우선은 좀 더 기다려 보기로 하고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벽 쪽 무기 거치대에 걸려 있던 검이 그의 손으로 날아와 잡혔다.
허공섭물이었다.
담무룡은 악불군의 팔에 검을 대더니 슥 베었다. 이곳에 있는 무기들은 모두가 상당히 이름 있는 무기였고, 그의 손에 잡힌 검 역시 명검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그러나 검이 지나간 자리에는 얇게 자국만 나타날 뿐 피부는 갈라지지 않았다.
“철포삼은 아주 성공적으로 잘 익혔군.”
다행히 철포삼은 예상보다 성공적인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내공의 증가가 적은 것은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철포삼이 내가의 고수에게는 큰 방어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철포삼이라도 성공을 했으니…… 남은 기간 최대한 수련을 극대화한다면, 예상보다는 실망스럽지만 그래도 효과는 있겠지.”
악불군의 대법이 실패한다면 그의 계획은 다시 수정을 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성공이라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실패했다고 단정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악불군은 아무것도 못 느끼는 듯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 * *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단독 면담을 신청한 화우성을 보며 화운천이 물었다.
“아버님께서 제게 이러시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화우성은 상당히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이유를 알고 싶다는 거냐?”
화운천은 짐짓 모른 척 반문했다.
“두 달이 지났습니다.”
화룡세가에 돌아온 화우성은 우선 화운천을 만나려고 했다. 하지만 화운천은 그를 만나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방에 감금했다.
그가 풀려난 것은 담수련의 성인식이 끝나고도 열흘이나 지나서였다.
이후에도 화운천을 몇 번이나 찾아가 잠룡세가에 다녀오고 싶다고 말했지만 화운천은 승낙하지 않았다. 심지어 서찰을 보내는 것조차 허락을 하지 않았다.
“안다.”
“이제 약속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이 아비를 믿지 않느냐?”
“아버님을 믿기 때문에 지금까지 기다려 온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오늘도 이유를 말해 주시지 않는다면, 제가 직접 잠룡세가에 가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화운천은 화우성의 모습에서 그가 빈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우성아,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 알지?”
다른 강압적인 세가와는 달리 화운천과 화우성은 대화도 잘 통했고, 그래서 많은 재량권을 주어 왔다. 화우성 역시 화운천에게 존경과 믿음을 보내 왔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을 더욱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화운천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가만 있자 화우성이 다시 간청하듯 말했다.
“아버님, 부탁입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제룡회에 대해서 너도 알 게다.”
“알고 있습니다. 이번 일이 제룡회와 연관이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룡회는 단지 친목 모임일 뿐,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는 체제는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랬었지. 하지만 대공이 나타나면서 그게 깨졌다.”
“대공이요?”
화우성도 대공에 대해 자주 들은 바 있었다. 하지만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그래, 대공이 잠룡세가를 버렸다.”
“이유가 뭡니까?”
“나도 모른다.”
“아버님, 대 화룡세가가 이유도 모른 채 철수하라면 철수하는 그런 조직이었습니까? 저희는 호남의 패자이지, 원 황실의 주구가 아닙니다!”
화우성은 어이가 없다는 듯 반박했다. 화룡세가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그로서는 화운천의 말에 큰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공은 황실의 어른이자 어사대와 어찰단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자다. 그의 말을 거부하는 것은 본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모험이다. 그리고 너는 모르겠지만, 대공은 그 자체로도 천하제일고수라 불릴 만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건 아니라고 봅니다.”
“나도 곤혹스럽다. 하지만 더 이상 잠룡세가와 관계를 이어 가는 것은 위험이 너무 크다.”
“연 매와 저는 혼약을 했습니다. 지금 그 말씀은 연 매를 포기하라는 말입니까?”
“그렇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버님께서 제게 그러셨습니다. 운명의 여인을 만난다면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입니다. 연 매는 제게는 운명의 여인이자 약혼녀입니다. 저는 약혼녀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는데 그 여인이 위험해지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다면, 그것은 남자로서 부끄러운 일이지. 그러나 네게는 더 중요한 세가와 가족을 지켜야 할 책임도 있다.”
“소가주로서 제가 책임을 질 것이 있다면 지겠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모른 척 방관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 연 매에게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못하고 왔습니다. 잠깐이라도 다녀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담수련 한 명 때문에 본가의 수천 식솔들이 피해를 당해도 괜찮다는 얘기냐?”
“아버님, 잠룡세가와 화룡세가가 한 가족이 된다면 건드릴 수 있는 자가 천하에 누가 있겠습니까?”
“대공은 오룡세가 전체가 힘을 합쳐도 이길 수 없는 자다.”
“대공이 아니라 황제라 해도, 연매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아버님, 잠룡세가가 정녕 위험하다면 아버님께서 구해 주십시오. 소자, 이렇게 애원하겠습니다.”
화우성은 털썩 무릎을 꿇으며 애절하게 말했다.
화운천은 화우성의 그런 모습을 침통한 표정으로 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남자는 아무 때나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담수련을 구하고 싶다면 이 아비보다 두 배는 강해져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의 전력으로 잠룡세가를 도왔다가는, 본가는 물론 네 어머니와 네 동생의 안위도 보장할 수 없다. 그러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우선 기다려 보자.”
“제가 정체를 밝히지 않고 혼자 갔다 오겠습니다.”
“어허! 내가 하는 말을 어디로 듣는 게냐? 네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넌 화룡세가의 기둥이다. 그리고 넌 네 어머니는 생각도 않느냐?
화운천의 말에 화우성은 낙담한 듯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제가 사랑하는 여인입니다. 아버님, 제게 그녀를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넌 천하를 경영해야 할 화룡세가의 소가주다. 아녀자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할 생각이냐?”
“아버님!”
화우성은 머리를 바닥에 대며 절규하듯 소리쳤다. 화우성은 분명 담수련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좋게 말하면 책임, 나쁘게 말하면 포기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화운천의 허락은 너무 중요했다.
악불군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마 그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생각을 하고서라도 담수련을 지키기 위해 달려갔을 것이었다.
* * *
“깼느냐?”
담무룡은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는지, 악불군이 눈을 뜨자마자 말을 걸었다.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악불군은 담무룡의 말에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이 몸을 담았던 액체들이 모두 사라진 것을 보자 의아한 듯 물었다.
“액체들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옷부터 입어라.”
악불군은 통에서 나와 옷을 입고는 담무룡에게 허리를 굽혀 예를 취한 뒤 앞에 앉았다.
“무림인들끼리의 예의는 포권 정도면 족하다. 너무 굽히면 상대가 얕잡아볼 수도 있다.”
“무인으로서가 아니라, 제게 베풀어 준 가주님의 크나큰 은혜에 대한 예우입니다.”
“은혜?”
“아무 희망이 없던 제게 아가씨께서는 세상을 살아갈 의지를 주셨고, 가주님께서는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제가 금수(禽獸)가 아닌데, 어찌 그 은혜를 모르겠습니까?”
담무룡은 악불군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평생 누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모든 사람을 오로지 세 부류였다.
적과 적이 아닌 자, 그리고 가족이었다.
물론 살아오는 동안 그에게 은인이라고 칭하거나, 은혜를 입었으니 반드시 갚겠다는 등의 말을 듣기는 했다.
하지만 누구도 은혜를 갚은 사람은 없었고, 심지어는 그런 자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적도 있었다.
“난 은혜니 뭐니 그런 거 모른다. 지금도 네가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하에 대법을 펼친 것일 뿐, 네게 은혜를 베풀려고 한 것이 아니니 굳이 그런 예를 갖출 필요 없다.”
“베푼 분이 은혜가 아니라고 했다 하여 은혜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지요. 무엇보다 당사자인 제가 은혜를 받았으니까요.”
악불군의 말에 담무룡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은혜로 안다 하여 나쁠 것도 없었다.
“말을 재미있게 하는구나. 어쨌든 그건 네 마음대로 하고, 우선 팔을 내밀어라.”
“예!”
악불군이 여전히 서슴없이 팔을 내밀자 담무룡의 검미가 살짝 좁혀졌다.
“맥문을 잡히면 즉시 내공 운용에 큰 문제가 생긴다. 무림은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되는 곳이니, 다음부터는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맥문을 내밀면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들인 담수운에게도 해 주지 않던 조언을 지금 악불군에게 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담무룡은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맥문에 손가락을 대고 조금씩 움직여 가며 기의 움직임을 살피던 담무룡의 고개가 갸웃했다.
운기조식을 끝냈으니 아까와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기대를 했음에도, 악불군의 단전에서 여전히 유의미한 변화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뭔가 특이한 현상이 느껴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계속 맥문의 혈을 바꿔 가던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살짝 집어넣은 자신의 기를 강하게 밀어내는 듯하더니 갑자기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또 뭐야? 반탄은 그렇다 치고, 흡성이라니……?’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의 현상에 담무룡은 표정을 굳힌 채 좀 더 강하게 자신의 기를 집어넣어 보았다. 하지만 방금 느꼈던 현상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악불군의 단전에서 느껴지는 내공에는 여전히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대법이 잘 안 되었습니까?”
악불군은 자신의 맥문의 혈을 계속 바꿔 가던 담무룡의 표정이 자꾸 변하자 의아한 듯 물었다.
“아니다.”
악불군은 우선 손을 뗐다.
분명 이해 못할 현상이 일어났지만,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이상 뭐라 말해 줄 수도 없었다.
“철포삼은 다행히 완벽하게 성공했다. 하지만 공력은 예상보다 너무 낮다. 그래도 원체 좋은 영초들이니 조금 늦게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부단히 수련을 하도록 해라.”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마음가짐은 마음에 드는구나. 그래, 운기를 하던 중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겠느냐?”
악불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운기조식을 시작한 후, 정말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고통이 몰려들었습니다. 간신히 참으며 운기조식을 계속했는데…….”
“했는데?”
악불군이 말을 잇지 않자 담무룡이 급히 물었다.
“……죄송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죽겠다고 생각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 정신을 잃은 것 같습니다.”
“전혀 생각이 안 난다는 말이냐?”
“어렴풋이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긴 합니다.”
“그게 뭐였느냐?”
다급하게 들릴 정도로 빠른 반문에, 악불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