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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34화 (34/472)

<천검지애 34화>

34화. 변화(2)

“제가 무명 비급의 자세를 취한 것 같긴 합니다.”

“운기조식을 하다가 비급에 그려진 그림의 자세를 취했다는 거냐? 대체 왜?”

“몽롱한 상황이어서 정말 그랬는지도 확언은 못하지만 고통이 너무 심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담무룡은 악불군이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고통이 심해서 그랬단 말이지…… 좋다, 그 문제는 좀 더 시간이 지나가면 결론이 나오겠지. 그럼 이제부터 내 말을 명심해서 들어라.”

악불군은 드디어 담무룡이 자신에게 왜 이러는지 이유를 말하려고 한다는 것을 직감하고서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수련이의 성인식 때 온 여자를 기억할 게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본가에 경고를 하러 온 것이었다.”

“경고요?”

“그래. 본가를 없애겠다는 경고 말이다.”

심각한 일이 생겼다고는 짐작했지만 잠룡세가의 멸문까지 언급되자 악불군의 표정이 확 굳었다.

“그런 망언을 했는데 어찌 그냥 보내셨습니까?”

“그건 네가 알 필요 없는 정치적인 문제다. 그녀가 내게 경고한 시간은 일 년이다. 이제 두 달이 지났으니 딱 열 달 남았구나. 그때 본가의 존망을 다투는 혈겁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준비를 하셔야지요?”

“지금 준비를 하고 있지 않느냐?”

“그게 무슨……?”

“바로 네가 준비다.”

“본가 같이 강한 문파를 공격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그만한 힘이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따위가 어찌 준비가 되겠습니까?”

“어차피 나는 피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수운이와 수련이는 기회가 있다.”

“모두 힘을 합치면…….”

“악불군! 내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해라.”

담무룡은 강하게 악불군의 말을 끊었다.

“죄송합니다.”

“난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수운이와 수련이를 보호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수련이다. 세가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방파에 가까워서 혈연으로 이어져 있지 않다. 즉, 무공이 약한 수장은 언제든지 수하에게 배신을 당할 수 있다는 말이다.”

“…….”

담무룡은 악불군이 아무 말 없자 살짝 미소를 지며 말했다.

“내 말을 끊지 말라는 것이지, 질문까지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 주십시오.”

“내가 바라는 것은, 네가 호위는 물론 수련이가 행할 모든 일을 대신할 손과 발이 되어달라는 것이다.”

“그건 제 필생의 책무입니다. 가주님께서 이러지 않으셔도 어차피 전 아가씨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것입니다.”

“지금 네 무공으로는 호위조차도 어렵다. 남은 열 달 동안 최소한 내 손에서 백 초는 버틸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할 것이다.”

“최선의 노력을 다해, 반드시 그렇게 되겠습니다.”

악불군도 이미 자신의 무공에 대해 큰 실망을 하고 있던 터라, 담무룡의 말의 의미를 즉각 인정했다.

“그리고 종리화가 세가를 나간 것은 알고 있겠지?”

“예.”

“내가 준비한 모든 것을 종리화에게 맡겼다. 네가 수련이와 함께 강호로 나서면 곧 종리화에게서 연락이 올 것이다. 넌 거기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종리화 외에는 내 이름을 팔더라도 절대 믿지 마라.”

“알겠습니다.”

“잘했다. 나갈 때가 되면 내가 알려주마. 이제부터 네가 할 일은 열 달 동안 최대한 강해지는 것밖에 없다. 그리고…….”

담무룡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악불군의 눈을 주시하더니 말을 이어 갔다.

“내 준비는 첫째, 나는 죽더라도 잠룡세가는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강해서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두 번째 계획한 것이 수운이와 수련이만이라도 살리는 것이다.”

“소가주님은 제가 장담을 못하지만, 아가씨만은 반드시 제가 지킬 것입니다.”

“그래, 반드시 지켜라. 만약 수운이가 죽는다면 수련이를 천하제일의 영웅과 혼인을 시키고 첫 아들은 담씨 성을 붙여 잠룡세가의 다음 대 가주로 삼는다. 할 수 있겠느냐?”

“아가씨는 이미 혼약을 한 것으로 압니다.”

“화룡세가의 화운천은 다른 세가 놈들처럼 악하지는 않지만, 대가 너무 약해서 절대 이 혼인을 이어 가지 못한다. 난 화우성이 성인식 전에 떠난 것으로 이미 혼약은 파기됐다 생각한다. 이제 수련이의 신랑은 네가 구해 줘야 한다.”

“반드시 아가씨께 어울리는 천하제일의 영웅을 찾아보겠습니다. 다만…….”

“다만 뭐냐?”

“아가씨께서 좋아하시지 않는다면 어쩌지요?”

“수련이는 내 말을 거역한 적이 없다. 내가 따로 말해둘 것이니 걱정 마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만약 네가 당할 수 없는 적을 만나게 되어 수련이가 그들에게 잡히게 된다면, 그 전에 네 손으로 수련이를 죽여라.”

악불군의 얼굴이 경련을 일으켰다.

담수련을 죽이라니…….

그것은 그가 절대 할 수 없는 명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가주님의 명이라 해도 그것만은 따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너는 수련이가 저놈들에게 잡혀가 온갖 모욕을 당하며 노예 같은 삶을 살아도 괜찮으냐?”

“절…… 대 누구도 아가씨를 잡아가지 못합니다!”

주먹을 꽉 쥔 악불군의 몸이 부들거리기 시작했다. 담수련이 노예 같은 삶을 살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그의 몸이 격렬하게 반응을 하고 있었다.

순간 담무룡의 눈이 살짝 커졌다.

고개를 저은 담무룡은 맥문을 놓고는 품에서 작은 소책자 하나를 꺼내더니 건네며 말했다.

“이것은 너와 수련이에게 생명줄이 될 것이다. 기호는 비문이고 그림들의 모양은 비밀 암호들이다. 그것을 언제 어디서 보더라도 즉시 알아볼 수 있도록 완벽하게 숙지한 후 소각해라.”

책자에는 괴상한 기호들과 기묘한 모양의 손가락들이 그려져 있었다.

악불군은 책자를 소중히 품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기 있는 무공 비급들을 저도 읽을 수 있겠습니까?”

악불군의 질문에 담무룡은 서가를 슬쩍 보았다.

비급들 역시 그가 중원을 배신하며 평생에 걸쳐 모은 각 문파들의 절세 비급들이었다.

“무공을 너무 여러 가지를 배우면 오히려 혼란만 가중이 된다.”

“제가 익히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무공의 원리를 알고 싶어서입니다.”

“무공의 원리는 왜 알려고 하느냐?”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이해가 안 될 때는 글자의 뜻을 음미하라고 하셨습니다. 원리를 알면 무공을 수련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이놈이 내 아들이었다면 천하가 내 것이 된 것처럼 기뻤을 것 같군…….’

말하는 것마다 너무 마음에 드는 말을 하는 악불군을 보며 담무룡은 안타까운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곧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대공의 공격이 시작되면 전부 사라질 것들이다. 마음껏 보거라. 그리고 무기 거치대에 있는 무기 중 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가지고 가거라. 실전에 이용하기 위해서는 무기에도 너를 맞춰야 한다.”

“지금 가진 검도 만족하고 있습니다.”

“어허! 지금 내가 너를 위해서 준다고 생각하느냐? 수련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좋은 무기도 필요하다. 고르거라.”

담무룡의 말에 악불군은 더 이상 빼지 못하고 무기 거치대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십여 개의 검과 대여섯 개의 도 그리고 창과 도끼 등 오십 개가 넘는 무기들이 걸려 있었다.

모두가 척 보기에도 대단한 장인들이 만든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무기들이었다.

무기를 훑어보던 악불군은 갑자기 한 검에 눈길이 갔다.

다른 검들과 비교하면 약간 초라해 보이는 검집에 길이도 약간 짧았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 많은 무기 중 그것에 눈길이 갈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악불군은 그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순간 담무룡의 눈이 커졌다.

“이것으로 하겠습니다.”

악불군이 그 검을 가지고 오자, 담무룡은 미묘한 표정으로 주시하더니 벌떡 일어서며 악불군의 목울대를 손가락으로 잡았다.

“음…… 제가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습니까?”

갑작스러운 공격에 침음성을 살짝 내뱉은 악불군은 담무룡의 손길에서 살기를 느껴짐에도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물었다.

“네놈의 정체가 뭐냐?”

“제 정체는 악불군입니다.”

“악불군…… 그래, 악불군 맞지…….”

우문현답(愚問賢答).

그 대답에 주변에 가득했던 담무룡의 살기가 좀 누그러졌다. 자신이 생각해도 악불군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 들어왔고, 이후 육관 통과를 하느라 한 번도 바깥출입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저 많은 무기 중 왜 천륭검을 택한단 말인가…….

“네가 그 검을 선택한 이유를 말해 봐라.”

천륭검. 바로 천륭검가를 상징하는 절세보검이었다.

담무룡은 이십 년이 넘게 수시로 천륭검을 조사해 보았고, 심지어 삼 년간 그 검으로만 수련도 했었다.

하지만 천륭검이 왜 절세보검으로 불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길이가 짧아 보통 검법을 펼칠 시 허점이 드러났고, 그렇다고 날카로움이나 섬세함도 특별한 것이 없었다.

거기다 천륭검보와 함께 있어서 천륭검이라고 생각했지, 실지로 천륭검이 맞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런데 악불군이 너무나도 쉽게 천륭검을 선택하자, 갑자기 대공이 자신에게서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회수하기 위해 보낸 간세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모두 그가 스스로 악불군을 선택한 것이지, 악불군이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찾으려고 먼저 나선 적은 없었다.

“제게 이 검을 선택한 이유를 물으셨습니까?”

“그렇다.”

악불군은 너무 뜻밖의 질문에 당장 답을 하지 못했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것을 잡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저도 그 검을 왜 선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거치대에 섰는데 그 검이 저를 잡아 주세요, 하고 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검이 말을 했다?

누구라도 믿을 수 없는 대답.

하지만 담무룡은 악불군의 답에 탄식을 터뜨리며, 목을 잡고 있던 손을 풀 수밖에 없었다.

“허허허~ 나는 천연(天緣)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너를 보니 천연이라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다만 왜 나나 수운이가 아니고 너인지 모르겠구나.”

“이 검이 가주님께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전 다른 무기를 가져도 됩니다.”

“아니다. 검이 너를 주인으로 택했으니 이미 내 손에서 떠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 보거라. 그리고 혹시 몸에서 이상한 징후가 보이거나 주화입마의 조짐이 나타나면 언제라도 이곳으로 달려오너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악불군이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고 하자 담무룡이 다시 불렀다.

“잠깐! 방금 넌 내 손에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어찌 전혀 반항이 없었느냐?”

“제가 이렇게 강하게 큰 것은 모두 가주님 덕입니다. 또한 저를 믿고 아가씨의 호위까지 맡겨 주셨습니다. 그런 가주님께서 저를 죽이신다면, 죽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신조와는 너무나도 다른 악불군의 답에, 담무룡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나가라는 듯 손짓을 했다.

악불군이 포권을 하고는 비밀 통로로 빠져나가자, 담무룡은 자신의 자리에 앉더니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놈이군…….”

그가 악불군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담수련이 악불군을 가장 믿는다는 것과, 담수련에 대해 보이는 진정성과 우직함 때문이었다.

담수련을 보는 남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음심(淫心)이었다. 이는 담무룡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만큼 담수련이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은밀하게 주시한 결과, 악불군은 전혀 그런 생각 없이 오로지 담수련의 안전만을 생각했다.

심지어 몇 번의 죽을 고비까지 넘길 정도였고, 사도비류와 같은 높은 지위와 강한 무공을 지닌 자에게도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던 것도 이유의 하나였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생각보다 진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자신의 예상보다 저조한 효과였다.

그런데 그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 스스로 반 시진 정도 지나야 현상이 발현한다고 했다. 그런데 악불군은 반 시진 만에 모든 약을 흡수했다.

다른 때 같으면 그런 중요한 사실을 놓칠 그가 아니었다.

그러나 집무실에 들어왔던 침입자로 인하여 받은 충격이 너무 크다 보니 생각이 분산되었다. 절대로 배신해서는 안 될 자가 배신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탄식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찌 그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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