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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36화 (36/472)

<천검지애 36화>

36화. 암계(1)

담무룡의 반문에 문창현의 표정에 살짝 당황함이 나타났다. 뭔지 모를 질책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확한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완벽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전 주군께서 생각하시는 현 상황에 대한 판단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구나. 하지만 평상시의 너와는 많이 다르구나.”

“무슨 의미신지요?”

“빙금까지 우리가 의논한 것이 무엇이더냐? 절강 주둔 군부에서 항주를 봉쇄하고 본가의 모든 자금줄을 끊어 버렸다. 이미 대공이 군을 동원했는데, 그런 이분적인 질문이 의미가 있다고 보느냐?”

담무룡의 질타에 문창현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대공은 이미 본가를 반란군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주군께서 이미 상황 판단을 다 하시고 계신 것 같으니, 그럼 고언을 하나 올리겠습니다.”

“말해 봐라.”

“제가 그 질문을 드린 이유는, 주군께서 생각을 바꾸었으면 해서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바꾸라는 것이냐?”

“저는 모든 경우의 상황을 짚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온 결론은, 어떤 방법으로도 대공이 공격을 하는 순간 본가는 멸문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공이 원하는 것을 넘기고 화해를 하십시오. 어느 정도 저희들의 세가 약화되는 것은 감당할 수밖에 없겠지만, 멸문은 피할 수 있습니다.”

“문창현.”

“예!”

“방비책을 찾아내라고 했더니, 겨우 찾아낸 답이 무조건 투항을 하라는 것이냐? 그럼 군사가 왜 필요해? 없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군사가 할 일이 아니더냐!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넘기라니? 도대체 무엇을 넘기라는 것이냐?”

문창현은 담무룡의 명에 따라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을 찾기 위해 두 달간 전력투구를 했다. 하지만 방법이란 것도 적과의 전력 차이가 너무 크면 백약이 무효인 법이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문창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며 말했다.

“……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최선을 찾아보겠습니다.”

* * *

바람에도 흔들리는 나뭇가지 위에서 요상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악불군은 상쾌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끔찍한 고통이긴 했지만 뭔가 좀 달라지긴 한 것 같구나.’

대법의 효과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는 담무룡의 말을 듣고, 악불군은 처음에 상당히 실망을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담무룡의 말과는 달리 자신에게 뭔가 큰 변화가 생겼음을 느끼고 있었다.

문제는 그 변화가 무엇인지 콕 짚어 말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내공이 증가한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고통에 비해, 늘어난 공력은 겨우 오 년에서 십 년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의 몸은 활력이 넘쳤고 가벼웠다. 나무 위로 올 때마다 그는 발바닥에 내기를 불어넣으며 뛰어야 했다.

한데 지금 그는 발가락을 살짝 튕기기만 했는데 나무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분명 대법을 펼치기 전과 지금은 확연히 달랐다. 그런데 왜 달라진 것이 거의 없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그 그림…… 단지 고통만 줄여 주는 게 아닌 것이 분명해. 도대체 그게 무슨 비급일까?’

악불군은 천륭검보에 그려진 그림들과 지금 상황이 연관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 * *

“수운이 있느냐?”

방 안에 앉아 서류를 뒤적이던 담수운은, 담무룡의 목소리를 듣자 급히 서류를 품 안에 집어넣고는 문을 열었다.

“이렇게 이른 새벽에 어쩐 일이십니까?”

“세가 일로 너와 의논을 할 것이 있구나.”

담수운의 표정에 의아함이 나타났다. 담무룡이 그에게 이렇게 부드럽게 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실수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아버님께서 제게 이렇게 친절하신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친절해도 불만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제 방까지 직접 오신 적이 없는데 갑자기 오셔서 놀란 것뿐입니다. 그래, 무슨 일로 오신 것입니까?”

“이 아비가 일이 있어야만 네게 올 수 있는 거냐?”

“솔직히 언제나 부르시기만 하셨지, 이렇게 오신 적은 없어서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담무룡의 검미가 꿈틀했다.

그랬다. 그와 담수운의 대화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식이었다. 삐딱한 대꾸,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호통.

결국 하고자 했던 대화는 사라지고 깊은 감정의 골만 파인 채 둘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그래서 아비를 배신했느냐?”

이번에는 담수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제가 비록 아버님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효자는 아니었지만, 배신까지 하는 패륜아는 아닙니다.”

“그래. 나도 네가 나를 좋아하지는 않아도, 배신까지 할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담무룡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 내 집무실에 침입한 이유가 뭐냐?”

담수운의 표정이 탈색이 되었다. 그가 아는 담무룡은 배신자라면 아들이라도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저를 죽이시겠습니까?”

“아니라고 부정도 안 하느냐?”

“제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치사한 놈이 될 수는 없겠지요. 이미 아시고 온 것 같은데 변명해서 뭐 하겠습니까?”

“이 아비를 배신한 대가로 무엇을 받기로 했느냐?”

“대가 같은 거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싫었더냐?”

“전 아버님을 싫어한 적 없습니다. 오히려 존경했지요. 왜 난 아버님처럼 할 수 없을까? 나도 아버님 같은 분이 되고 싶다. 제가 지금까지 버텨 온 원동력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담수운의 말에 담무룡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며 물었다.

“그럼 왜 나를 배신한 것이냐?”

“전 아버님을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 내 집무실에 숨어 들어와 찾은 것이 무엇이냐?”

담수운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

“죄송하지만 말할 수 없습니다.”

“왜?”

“비밀을 지키겠다고 서약을 했습니다.”

“대공과 서약을 했느냐?”

담무룡의 반문에 담수운은 피식 웃었다.

“대공이 얼마나 대단한 자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자에게 고개를 숙일 만큼 비열하지는 않습니다.”

순간 담무룡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 말이 마치 자신에게 비열하다고 하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럼 대공과 거래를 한 나는 비열하다는 말이구나?”

“아버님의 아들로서 전 아버님의 결정이나 살아오신 인생에 대해 비난을 하거나 재단을 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아버님과 다른 길을 걷고자 할 뿐입니다.”

“설마…… 영웅회였느냐?”

담무룡은 깜짝 놀라 즉각 반문했다.

영웅회는 몰락한 중원 무림인들이 지하에 숨어 결성한 비밀 단체로, 현 무림의 절대자로 군림하는 오룡세가의 실질적인 주적(主敵)이었다.

“말할 수 없습니다.”

“넌 잠룡세가의 소가주다. 영웅회는 본가와는 불구대천의 원수이거늘, 어찌 네가 거기에 들어간단 말이냐?”

담수운은 말할 수 없다고 했지만 담무룡은 이미 기정사실화한 듯 물었다.

“아버님, 잠룡세가가 중원인들에게 불구대천의 원수인 것은 분명 맞습니다. 하지만 잠룡세가는 중원을 배신하고 그들을 괴롭힌 가해자였습니다. 잠룡세가가 중원인들에게 어떤 피해를 보았다고 서로 불구대천인 것처럼 말하십니까?”

“영웅회, 그놈들이 나를 암살하려고 시도한 것이 백 번이 넘는다. 또한 네 동생의 납치 시도 역시 부지기수다. 그 와중에 죽은 본가의 수하들 역시 수백이야. 그런데 불구대천이 아니란 말이냐?”

“수만 명을 죽인 사람이, 수백 명이 죽었다고 피해자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언제부터냐?”

“아버님, 언제냐고 묻지 마시고 왜냐고 물어 주십시오.”

“왜냐?”

“제가 옳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담무룡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번 대답 역시 자신에게 틀렸다고 말하는 것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느냐?”

“아버님께서 언제나 제게 야망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전 야망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혹시 항주 성내에서 수련이를 납치하려고 한 것도 네가 연관이 되어 있느냐?”

“납치가 아니라 수련이를 보호하려고 한 것뿐입니다.”

“수련이는 이곳에서 가장 안전하다.”

“지금 잠룡세가는 사상누각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정말 모르십니까? 중원인들의 본가에 대한 원한은 하늘에 닿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민족인 원나라에서는 우리의 이용 가치가 사라지면 언제든지 버릴 것입니다. 그게 어찌 안전하다고 하십니까?”

“사상누각……이라고?”

예전의 담무룡이었다면 이미 손이 올라가고도 남았을 말이었다. 담무룡에게 잠룡세가는 자신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죽을 각오를 하고 거침없이 말하던 담수운까지 의아함을 느꼈는지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삼각 가까이 침묵하던 담무룡이, 드디어 마음을 가라앉혔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대공이 아니라 영웅회라니 다행이구나.”

담무룡이 집무실에서 담수운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은 그가 대공의 간세 노릇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영웅회라서 다행이라니, 의외의 말씀이군요.”

“네 말대로 이 아비가 인생을 잘못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치열하게 살아 왔다.”

“저도 아버님의 치열했던 승부사적 기질은 존경합니다. 다만 아버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이 저와는 방향이 다를 뿐입니다.”

“내일 세가를 떠나거라.”

“아버님! 제발 뭐든 그렇게 독선적으로 하지 마십시오. 제게도 생각하는 바가 있습니다. 어찌 제 의견은 듣지도 않고 결정을 하십니까?”

“의견? 넌 지금 내가 너에게 의견을 묻는다고 보느냐? 난 가주로서 소가주에게 명을 내리는 것이다. 희생을 최소화하고 잠룡세가의 전력을 최대한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니, 그렇게 알아라.”

“제가 따르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시겠습니까? 죽이시겠습니까?”

“내가 가는 길이 패도란 말을 듣곤 하지만, 아들까지 죽일 정도로 모진 아비는 아니다. 하지만 네가 내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비밀 세력들은 구심점을 잃고 결국 대공한테 붙을 것이다. 물론 나나 수련이의 안전도 담보하지 못한다.”

담무룡의 말에 담수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가 영웅회에 들어가 중원 무림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담무룡이나 담수련이 다치는 상황까지는 원치 않았다.

“제가 아버님을 배신하고 제게 맡긴 세력을 제가 원하는 쪽으로 사용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다른 놈들에게 배신당해서 죽는다면 그놈에 대한 분노로 눈도 못 감겠지만, 자식 놈에게 당하면 그냥 내가 교육을 잘못시킨 자업자득이니 억울하지는 않겠지.”

“아버님, 전 중원에 큰 죄를 지은 잠룡세가를 더 이상 존속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감정적으로 판단하지 말거라. 그리고 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대공이 나를 죽이고 본가를 전멸시킨다 해도 잠룡세가는 쉽게 멸문당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네가 가주가 되면, 네 말대로 그 힘을 네가 원하는 곳에 사용할 수 있다.”

“…….”

담수운이 즉답을 하지 않자 담무룡은 몸을 일으키더니 그의 어깨를 손으로 토닥거렸다.

“시간이 많지 않다. 지금 포위망이 점점 좁혀 오고 치밀해지고 있다. 자꾸 시간을 끌면 빠져나가는 일조차 쉽지 않을 수 있다.”

“제가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준비되면 비밀 통로를 이용해 내 집무실로 오거라. 그럼 세부적인 계획을 알려 주겠다.”

말을 마친 담무룡은 담수운의 대답도 듣지 않고 나가 버렸다.

“휴우…….”

담수운은 한숨을 푹 쉬웠다.

오히려 예전처럼 강압일변도였다면 대들기라도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담무룡은 변했다.

그리고 달라진 담무룡의 변화가 이상하게 담수운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로서는 미워했지만 남자로서는 닮고 싶다는 생각도 했던 그에게는 우상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본가가 멸문까지 생각할 정도로 지금 위험하다는 것 인데…… 도대체 대공이라는 자가 누구기에?’

영웅회에서도 대공이라는 자에 대해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가 황실의 실권자라는 정도만 알 뿐, 얼굴도 실제 이름도 그리고 그의 무공 실력까지 아는 것은 전무한 터였다.

잠시 고심하던 담수운은 종이에 뭔가를 적어 작은 쇠막대에 묶더니 창가로 갔다. 그리고 그것을 힘껏 어디론가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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