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37화 (37/472)

<천검지애 37화>

37화. 암계(2)

“군주님, 우리의 포위망에 어딘가 구멍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혈랑사자가 들어오자마자 약간 곤혹스러운 듯 말하자, 금잔화는 아미를 살짝 좁히며 반문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한 달 전쯤에 혈의나찰 종리화가 잠룡세가에서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고 수색을 했습니다.”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 며칠 전부터 담수운도 안 보인다는 보고입니다.”

“담수운이면 담무룡의 아들?”

“예, 공식적으로 잠룡세가의 소가주입니다.”

“내가 보고 받기로는 오룡세가의 자식들 중 가장 성취가 떨어져서 담무룡하고 사이가 아주 나쁘다고 들었는데?”

“실지로 둘이 같이 대화를 나누거나 식사를 하는 장면도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사이가 안 좋습니다.”

“그런데 담수운이 갑자기 안 보인다?”

“예.”

“확실한 거냐?”

“벌써 보름 가까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하니, 잠룡세가 내에 없는 것은 확실합니다.”

“요것 봐라…….”

금잔화는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더니 생각에 잠겼다.

항주는 큰 도시였다. 거기다 서호(西湖)가 근접해 있어 수량이 풍부했다.

즉 지하수가 많이 흐르고 지반 자체가 단단하지 않아, 짧은 지하 통로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만 긴 통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혈랑사자.”

“예!”

“항주에 천연 동굴이 있나?”

“이 근처에는 산이 없어서 천연 동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당장 알아봐. 항주에서 우리의 포위망을 넘어가는 긴 통로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자연이 스스로 만든 동굴이 있다면 사용할 수는 있겠지.”

“당장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담수운의 용모파기를 만들어서 사방에 돌려. 반드시 찾아야 한다.”

“예!”

혈랑사자가 나가자 금잔화는 옆에 시립하고 있는 시녀에게 말했다.

“가서 항주의 정밀 지도를 가지고 와라.”

“예!”

‘심복과 아들을 내보냈다는 것은 반전시킬 뭔가를 밖에 구축해 놓았다는 말인데……. 뭐야? 그럼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말이잖아?’

시녀가 나가자 뭔가 생각하던 금잔화의 눈이 살짝 커졌다. 만약 담무룡이 이런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면 계획을 다시 점검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그녀의 계획은 담무룡이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는 것을 상정해 만든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 * *

넉 달이 지났다.

절강의 패자인 잠룡세가가 몰락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점점 널리 퍼지고 있었고, 처음에는 의심하던 사람들도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숨을 죽인 채 상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잠룡세가와 거래를 하던 상단들도 손을 끊기 시작했다.

아니, 애초에 항주를 포위한 군인들이 잠룡세가로 향하는 모든 물품을 검수하면서 퇴짜를 놓고 있어서, 거래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림 세가가 상단과 거래를 못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치명적인 악재였다.

그러던 중, 항주에서는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잠룡세가의 정청.

담무룡의 앞에 시립해 있는 간부들의 표정은 상당히 격앙이 되어 있었다.

“가주님, 더 이상은 못 참습니다. 다루가치에게 가주님의 서찰을 보낸 지가 두 달이 다 되어 가는데 답장도 없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제가 수하들을 이끌고 나가, 군부고 뭐고 다 쓸어버리겠습니다!”

외당 당주 역귀혼이 담무룡을 보며 외쳤다.

“역 당주! 아직 범인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군부를 먼저 건드린다면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가 오히려 곤란해질 수 있소이다. 우선 진정하고,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가장 좋을지 의논을 해 봅시다.”

호법인 연성문의 말에 역귀혼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연 호법! 지금 우리 애들 이십 명이 항주 외곽에서 시체로 발견이 됐습니다. 그런데 진정이 됩니까?”

“역 당주, 나는 지금 화가 나지 않아서 이런다고 생각하오? 나도 당장 나가서 어떤 놈들이 우리를 건드렸는지 당장 알아내서 물꼬를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소. 하지만 우리가 경거망동을 하면 가주님께 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어찌 모르시나!”

“두 분은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본가의 세력권인 항주에서 본가의 수하들이 피살당하는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태를 수습할 간부들께서 싸우면 어찌하겠습니까?”

연성문도 언성을 높이며 맞받아치자 급히 나선 문창현이 둘을 말리고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담무룡을 쳐다보았다. 뭔가 결단을 내려 달라는 의미였다.

“가주님, 이번 사건은 백주 대낮에 이십 명이 넘는 수하들이 피살당해서 크게 불거졌지만, 사실 수하들의 피해는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동안 내당에서 은밀히 지가(支家)에 원군을 보내라는 서찰을 가지고 나간 수하들도 모두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더 이상 한두 명을 보내는 정도로는 포위망을 뚫기가 어렵습니다.”

내당 당주 국대광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국 당주, 그런 중요한 일을 왜 이제 말하는 것이오!”

호법인 고숭무가 깜짝 놀라 물었다.

“연락 두절이라 생사를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보니 그들 역시 죽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씀 드리는 겁니다.”

이미 알고 있었던 담무룡과 문창현을 빼고 다른 사람들의 표정은 격앙에서 경악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때 담무룡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본가는 전시 체제에 돌입한다. 역 당주와 국 당주는 비상을 발동하고 경계를 강화해라. 그리고 문 군사는 감히 본가의 수하를 건드린 놈들을 추적할 추적대를 조직해라.”

“가주님, 추적대라면 제 소관인데 어찌 군사에게 명을 내리십니까?”

연성문이 의아한 듯 물었다.

“머리를 쓰지 않고 추적해 봐야 피해만 커질 뿐이다. 이번 일은 군사에게 맡긴다. 그럼 모두 명을 시행해라.”

담무룡의 말이 떨어지자 모두는 뭔가 미진함을 느꼈지만, 문창현만 남고 밖으로 나갔다.

“주군, 추적대라니요? 지금 추적대를 보내 봐야 그냥 피해만 입을 뿐입니다.”

뜻밖에도 문창현조차 추적대에 대한 얘기는 지금 처음 들은 것 같았다.

“추적대는 없다. 너는 추적대를 조직하는 척하면서 본가의 정예들만 따로 모아 놓도록 해라.”

“그게 무슨?”

“대공이 우리의 자금원만 막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움직임마저 막았어. 그렇다고 그냥 있으면 수하들의 사기는 어떻게 하겠느냐?”

문창현은 이해가 된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군사가 되어 가지고 그 정도의 생각도 못하다니, 정말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제부터 수하들의 동요(動搖)가 심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분명 이탈하려는 놈들이 있을 것이니, 단속을 확실하게 해라. 대공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정말 몰랐군. 이러다간 싸워 보지도 못하고 자멸하겠어.”

“주군, 요즘 세가 내에서 불만의 소리가 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불만의 소리?”

“예.”

“말해 봐라.”

“소가주님과 종리 단주가 요즘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수하들 사이에서 아드님과 최측근 수하만 피신시킨 것이 아니냐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문창현, 그 정도는 네가 알아서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

“저도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니 무마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문창현의 말 속에는 의아함과 불만이 약간 섞여 있었다. 세가의 모든 일을 알고 있어야 하는 군사에게까지 아무 언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종리 단주는 잠룡세가에서 떠났다.”

“주군의 명으로 나간 것이 아닙니까?”

“명은 아니지만, 나가라고 내가 설득했다.”

“…….”

문창현은 예상치 못한 말에 답을 하지 못했다.

“종리화는 오로지 내가 좋아 본가에 몸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마지막으로 종리화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고심하다, 세가를 떠나라고 했다.”

“주군, 만약 수하들이 그 사실을 알면 사기가 급속도로 떨어질 것입니다.”

가장 아끼는 수하라고 알려진 종리화를 죽지 않게 하기 위해 세가를 떠나게 했다면, 모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담무룡이 인정했다는 의미가 된다.

아무리 충성스러운 수하라 해도 죽을 것을 뻔히 아는 싸움을 하려는 자들은 드문 법이었다. 더욱이 잠룡세가에 그 정도로 담무룡에게 충성을 바치는 수하가 그리 많지 않았다.

문창현의 말에 담무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언했다.

“수하들이 물으면 종리화에게 원군을 데리고 오라고 내보냈다고 해라.”

“지금 절강성의 지부들 무사들조차 항주로 들어오지 못하는데 원군인들 올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종리 단주가 어떻게 나갔는지도 궁금해할 것입니다.”

“변장을 하고 나갔다고 해라.”

“그럼 소가주님은 뭐라고 할까요?”

“그놈이야 내가 알 바 아니지 않느냐? 원래부터 툭하면 사라지던 놈이다. 이번에도 스스로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나갔겠지.”

“지금 대공은 본가의 무인들이 항주성 밖으로 나가면 죽이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소가주님께서 그냥 나가셨다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지만 그것도 거절했다. 난 더 이상 그놈에게 기대 안 한다. 그러니 누가 물으면 무단 외출을 한 것 같다고 해라.”

담무룡의 답은 여러 가지로 충분치 않았다. 하지만 문창현은 더 물을 수는 없었다.

주군이 그렇다는데 자꾸 캐묻는 것은 주군에 대한 예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말해서 달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본가를 본격적으로 침입했을 때 어떻게 방어할지에 대한 계획서입니다. 우선 보시고 미비한 점이 보이시면 말하십시오.”

“알았다. 이만 가 보거라.”

“예!”

정중하게 대답을 하고 사라지는 문창현의 뒷모습을, 담무룡은 미묘한 눈빛으로 주시했다.

문창현은 그를 이십 년 가까이 보필을 해 온 가장 믿는 최측근 수하였다. 더구나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대안을 내놓는 아주 비상한 머리를 가진 그였다.

그런데 벌써 넉 달 전에 대책을 마련하라고 했건만 아직까지 뾰족한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대공이란 존재가 불가항력(不可抗力) 적인 존재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그동안 그가 보인 능력을 생각한다면 지금 보이는 행태는 대단히 의외였다.

그리고 그것은 담무룡의 의심을 사고 있었다.

‘문창현, 설마 너까지 나를 배신한 것은 아니겠지…….’

담무룡은 참담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더니 몸을 일으켰다.

* * *

언제나처럼 비밀 연무관에 도착한 악불군은 서가에 있는 무공 비급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이게 마지막 권이군.’

악불군의 무공은 검법이 위주였다. 기본적인 권법과 장법도 배우긴 했지만 그냥 수박 겉핥기 정도였다.

하지만 서가에 있는 비급들을 읽으면서, 그는 소림내경일지선을 읽으며 가졌던 여러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냥 무공의 원리만 알아보기 위한 공부를 위해 비급을 읽기만 했지만, 그의 무공은 그도 모르는 사이에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었다.

비급을 읽던 악불군은 책장을 덮었다. 담무룡이 집무실에 들어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집무실에서 꾸불꾸불한 동굴 같은 통로가 삼십 장이나 이어진 비밀 연무장에서 그가 들어온 것을 느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왔느냐?”

안으로 들어선 담무룡은 악불군은 허리를 숙인 채 기다리고 있자 자리에 앉으며 다시 말했다.

“전부 적어 왔느냐?”

넉 달이 지난 지금, 담무룡은 악불군의 일취월장하는 무공에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대법을 마친 그 이튿날 악불군은 담무룡과의 비무에서 무려 삼십 초를 버티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처음 비무를 시작할 때 겨우 삼성의 공력만을 사용한 것과 달리, 당시엔 무려 육성의 공력을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단 하루 만에 무려 여섯 배나 강해졌다고 볼 수 있었다. 인간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발전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거의 담무룡의 십성 공력이 담긴 공격을 백 초 이상 받아 내고 있었다.

담무룡은 자신이 펼친 대법이 실패가 아니라 대단한 성공을 했다는 것을 느꼈지만, 문제는 여전히 악불군의 단전에서 느낀 내공은 여전히 일 갑자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무공 발전에는 그 순서가 있는 법인데, 악불군의 발전 양상은 완전히 상식을 벗어나고 있었다.

대법을 행한 과정은 모두 기록해 놓았다.

하지만 그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상식적이 아니라면 그 이유를 알아내야 했다.

하지만 석 달 동안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담무룡은 악불군에게 스스로 몸의 변화를 적어 내라고 했다.

“예.”

악불군은 품에서 빽빽하게 적은 십여 장의 종이를 꺼내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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