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8화>
38화. 성장(1)
너무 자세한 보고서에 오히려 담무룡이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자세히도 썼구나?”
“다음에 또다시 대법을 펼칠 경우를 생각해, 중요한 사료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악불군의 대답에 담무룡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자신의 무공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모두 적어 낸다는 것은 보통 무림인들은 하기 어려운, 아니, 절대 안 할 행동이었다.
자신만이 최고가 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악불군은 정말 자세히도 자신의 변화를 적어 온 것이다.
‘한마디 한마디가 절대 미워하기 힘든 아이로군.’
자신은 무공에 관한한 절대적인 욕심쟁이였건만, 모순적으로 악불군이 욕심이 없는 것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그래, 넌 이번 대법이 성공적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아무래도 무명비급에 그려진 그림들이 이유인 것 같습니다.”
담무룡의 의외라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
“그림의 자세들을 천천히 분석해 보니, 각 자세들이 신체의 특정한 부분을 강화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그 자세를 취할 때 몸의 기가 강제적으로 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전 그것이 운기조식과 비슷한 효과를 보인다고 보았습니다.”
담무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악불군에게 그런 의견을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은, 악불군의 내공이 가시적으로는 크게 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보고서에도 적었지만, 무명비급의 각 장에 적혀 있는 글자들도 뭔가 심오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담무룡도 각 장에 한 자씩 적혀 있는 글자의 의미를 알기 위해 무던히 노력을 했었다.
심지어 항주에서 가장 학문이 높다는 선비도 찾아갔고 의원도 찾아갔지만 찾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
“지금 제 무공이 느는 이유가 그 비급 때문이라면, 그 글자 역시 반드시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아직은 무슨 뜻인지 알아낸 것이 없지만, 언젠가는 알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에 대해 알아내면 역시 보고서로 올리도록 해라.”
“예! 그런데 가주님.”
“말해라.”
“그 무명비급은 정말 이름이 없는 것입니까? 갈수록 대단한 비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지금처럼 그냥 무명비급이라고 생각해라. 자세히 알아 봐야 좋을 거 없다. 자, 시간이 없다.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가주님, 오늘은 검을 사용하지 않고 권법으로 비무를 해 보고 싶습니다.”
“익힌 권법이 있느냐?”
“일관부터 오관까지 여러 권법을 배웠습니다.”
“거기서 배운 권법들은 결투에는 그다지 효용가치가 없을 텐데?”
잠룡세가의 육관까지의 수련 방식은 수련생의 체질에 맞는 특화된 무공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악불군은 검법이 맞다고 판단되어 검법을 위주로 수련해 왔다.
물론 무공의 기초가 권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기초적인 권법은 가르쳤다. 하지만 생사결에 사용할 정도로 절정의 권법은 배우지 못했다.
“삼관에서 배운 소림오권을 변형시켜 간다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림오권은 달마대사가 동물들의 움직임을 보고 가장 처음 만들었다고 알려진 권법으로, 무림인은 물론 저잣거리의 왈패들도 배우는 아주 보편적인 초보 무공이었다.
그런데 지금 악불군의 입에서 경악할 말이 나왔다.
오권을 변형한다니…….
사실 지금 천하에 퍼져 수많은 권법들은 소림오권을 변형시켜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놈이 설마 종사급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담무룡은 악불군의 눈을 자세히 주시했지만, 헛된 공명심으로 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소림오권으로 나의 상대가 될 수는 없을 텐데?”
“감히 제가 어찌 가주님과 상대가 된다는 생각을 하겠습니까? 다만 검이 없는 상황도 생길 수 있으니, 권법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권법을 가르쳐 달라고 해야지, 당장 나와 비무를 하겠다는 것은 무리가 아니겠느냐?”
“권법과 무기 간의 효용성을 먼저 비교한 후 익히면 더욱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음…… 그럴 수도 있겠군.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봐주지는 않는다.”
“알고 있습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연무장의 중앙으로 가더니 소림오권의 자세를 취했다. 호권이었다.
순간 담무룡의 몸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악불군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악불군은 무릎을 굽혀 몸을 더 낮추는가 싶더니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담무룡을 향해 두 주먹을 번갈아 휘둘렀다. 마치 호랑이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독수리를 공격하는 듯했다.
탁! 탁!
담무룡의 조와 악불군의 권이 두세 번 부딪쳤다. 바위도 그대로 움푹 긁어 버리는 담무룡의 조였지만 악불군의 권에는 조금의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철포삼의 위력이었다. 아니, 둘 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담무룡은 조와 권을 번갈아가며 이십 초를 넘게 공격했다. 하지만 악불군은 힘겨워하면서도 요상하게 그의 공격을 전부 다 막아 내고 있었다.
‘이게 소림오권이라고……?’
담무룡 역시 소림오권을 완벽하게 익히고 있었다. 그가 지금 펼치는 조법이나 권법은 속칭 절기라 부르는 것으로, 소림오권 정도로는 절대 막을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초수가 길어지면서 담무룡의 표정은 서서히 경악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디 보자! 하는 마음으로 공력의 강도를 점점 높혔다.
그런데 그에 비례해 악불군의 방어 역시 강해진 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담무룡이 갑자기 공격을 멈추자 악불군이 의아한 듯 물었다.
“팔을 내밀어 봐라.”
“예.”
담무룡은 악불군의 맥을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악불군의 내공은 여전히 크게 늘지 않았다.
비무치고는 상당히 격렬했고, 더욱이 십성에 버금가는 내공이 담긴 공격이었다. 당연히 공력의 고하를 떠나, 기가 매우 활성화되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악불군의 기는 마치 운기조식을 마친 사람처럼 고요했다.
담무룡은 자신의 상식을 벗어나는 현상에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말했다.
“방금 내게 사용한 권법이 소림오권이 확실하느냐?”
“예.”
“허허허! 겨우 소림오권으로 나의 비혈조와 대등한 비무를 했다니……. 제대로 된 권법을 익힌다면 권법의 대가로 올라서는 것은 시간문제겠구나.”
“과찬이십니다. 사실은 소림오권에다가 그림에서 배운 자세들을 약간씩 가미했습니다.”
“정말이냐?”
“예.”
‘뭐지, 이놈? 설마 정말 종사급의 능력을 타고 났다는 말인가……?’
뭔가 변형을 시켰다면 담무룡 같은 초절정 고수가 발견을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위력이 소림오권이 아니라는 생각은 했지만 어떤 변형도 발견하지 못했다.
담무룡은 악불군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다시 한번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무는 이만 하고 자리에 앉거라.”
“예.”
악불군이 앉자 담무룡은 잠시 생각하더니 침통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불군아.”
“예.”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해서 듣거라.”
“예!”
“솔직히 너를 보면서 내 인생을 다시 반추하는 계기가 됐다.”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이다.”
“가주님처럼 성공한 인생을 사신 분이 천하에 몇 분이나 계시겠습니까?”
“성공?”
담무룡은 허탈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어 갔다.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다 해도 아들이 부정(否定)한다면 성공적인 인생이 될 수 없더구나.”
“…….”
담무룡의 자조 섞인 답에 악불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의 실력이 일취월장해서 기쁘다.”
“모두 가주님 덕입니다.”
“네가 은혜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갚으면 된다.”
“당연히 갚을 것이옵니다.”
“이제 네게 정확한 상황을 말해 줄 때가 된 것 같다. 잘 듣고 네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보거라.”
“가르침을 주십시오.”
“백 년 전, 대원제국이 중원을 짓밟았을 때 이 세상 어느 세력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그들은 너무 강했고, 마지막 보루였던 무림까지 그들에게 유린당했다. 당시 우리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저항을 해서 모든 것을 잃느냐, 아니면 그들에게 순종을 하여 후일을 도모하느냐였지. 그리고 난 후자를 선택했다.”
“할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생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누가 틀리고 맞고가 아니라 다른 것뿐이라고 하셨지요. 이후 생길 수 있는 칭찬과 비난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업보이니 스스로 견뎌야 한다고요. 전 가주님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내 선택은 중원인을 배신한 것이다.”
“중원에서 사는 사람들은 다 중원인이지요. 전 다를 것이 없다고 봅니다. 어렸을 때 저도 중원인이었고, 주위 사람들도 다 중원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중 저를 도와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때리고 빼앗고, 제게는 악몽 같은 생활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제게 중원을 배신한 사람들이 된다는 말인데, 사리에 맞지가 않다고 봅니다.”
“이유는?”
“그들 역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가족과 자신이 굶어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전 가주님께서는 중원인을 배신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옳다고 믿은 자신의 신념을 이어 간 것이지요. 다만…….”
“계속 말해 보거라.”
악불군이 잠깐 말을 멈추자 담무룡이 재촉했다. 그 역시 중원인을 배신했다는 원초적인 죄책감으로 언제나 고심해 왔는데, 악불군의 말이 크게 위안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원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올바른 길이었나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옳지 않은 행동이 있었다면 스스로 그 업보를 견뎌야겠지요.”
“그것도 네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냐?”
“아닙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해 주신 말씀입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세상이 어지러우니 네가 선택해야 할 상황이 많아질 것이라고 하시면서, 선택이 어려울 때는 인간의 도에 합당한가를 생각해서 결정하라고 하셨습니다.”
담무룡은 점점 악불군에게 빠져 들어가는 자신을 느끼자 급히 마음을 안정시키며 말했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계획이 시작된다. 모든 계획은 문창현이 기획하고 지휘하지만, 그 속에는 또 다른 계획이 숨어 있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는 것이니 너도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
“가주님, 죄송하지만 그 계획을 다음에 들어도 되겠습니까?”
“왜?”
“제가 가주님께 큰 은혜를 입었지만 가주님과 함께한 시간은 그리 길지 못합니다. 만약 계획이 어디선가 새어 나간다면 전 당장 의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저를 의심하더라도 가주님만은 절대 저를 의심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실 때, 그때가 되면 제게 말해 주십시오.”
“넌 정말 특이하구나. 하하하하! 알았다. 그리고 내일부터 자시에 이곳에 올 필요 없다. 대신 네가 무공을 마음껏 수련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와서 수련해도 된다.”
“사화는 지금처럼 아가씨를 밀접 경호하게 해 주시고, 잠봉단의 수를 좀 더 늘려 주십시오.”
“왜?”
“제 일 순위 임무는 아가씨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련이 중요하다 해도, 아가씨께서 불안해하신다면 올 생각이 없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무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나 젊었을 적과 너무 달라.’
담무룡도 무공이 급속도로 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그는 모든 것을 뒤로 미루어 놓았었다.
무공을 배운 무림인으로서 강해진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사랑까지도 그에게는 후순위였다.
하지만 악불군은 무조건 담수련이 먼저였다.
“최소한 석 달간은 잠봉단이 수련이 경호에 전념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상황이 바뀔 수 있으니 유념하거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가 보거라.”
“예!”
악불군이 사라지자 담무룡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처음에 담무룡은 악불군을 단지 담수련을 보호하기 위한 소모품으로만 생각했다. 그가 악불군을 선택한 것도 담수련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진정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악불군에 대한 담무룡의 생각에 점차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담수련을 보호하는 소모품이 아니라 잠룡세가의 부활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