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9화>
39화. 성장(2)
담무룡의 비밀 연무장에서 돌아온 악불군은, 예상치 못하게 담수련이 밖에 나와 있자 깜짝 놀라 달려갔다.
“아가씨, 이 새벽에 어찌 나와 계십니까?”
담수련은 악불군을 보자 사화를 보며 말했다.
“너희는 잠깐 밖에 나가 있어. 내가 소군하고만 할 얘기가 있으니까.”
뜻밖의 명에 사화는 머뭇거렸지만 곧 허리를 숙이고는 몸을 날려 사라졌다.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소군, 언제나 이 시간에 돌아와?”
“언제나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그렇습니다.”
“그럼 언제 자?”
“충분하게 자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난 걱정되는데 왜 자꾸 걱정 말라고 해?”
약간 투정스런 말에 악불군은 미소를 지며 말했다.
“저를 기다리신 겁니까?”
“그럼 내가 여기서 누굴 기다렸겠어?”
“죄송합니다. 다만 그냥 부르시면 될 것을 굳이 기다리셔서 드린 말일 뿐입니다.”
“아까부터 계속 불렀거든! 그런데 소군이 안 나타난 거지.”
담수련은 악불군이 무공 수련을 위해 밤마다 새벽까지 자리를 비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불러도 나타나지 않자 약간 삐친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죄송합니다. 이 시간에 아가씨께서 저를 찾은 적이 없어서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다음부터는 새벽에도 부르면 즉시 나타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야. 갑자기 새벽에 잠이 깨서 오늘만 나온 거야. 다음에는 안 부를 거니까 계속 수련해. 나 때문에 소군 수련을 방해받는 거 싫어.”
“그런데 무슨 일로?”
“소군은 내가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불러야 하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
“……수운 오라버니께서 얼마 전부터 안 오셔. 유모도 사라졌는데 자꾸 주위 사람이 사라지니까 좀 불안했나 봐. 미안해.”
“아가씨께서 왜 미안하십니까?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소가주님이나 종리 단주님 두 분 모두 아무 일 없을 것입니다.”
“소군까지 나가는 것은 아니지?”
사실 담수련은 조금 전 꿈에서 악불군이 갑자기 떠난다고 인사를 하자 안 된다고 울면서 잠에서 깬 터였다.
그리고 꿈인 것을 알았지만 불안한 마음을 잡지 못해 결국 밖으로 나와 악불군을 기다린 것이다.
하지만 꿈 때문에 울었다는 얘기를 악불군에게 할 수는 없었다.
“아가씨, 전 절대로 아가씨 옆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안심이 된 듯 배시시 웃었다.
천진난만한 어린애 같은 그녀의 미소를 악불군은 정말 좋아했다.
“언제까지 내 옆에 있어야 해. 약속!”
담수련이 손가락을 내밀자 악불군은 곤란한 표정으로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왜 약속 못해?”
“아가씨 존체에 제가 함부로 손을 댈…….”
하지만 악불군은 대화를 잇지 못했다. 담수련이 다짜고짜 악불군의 손을 잡아끌어 새끼손가락을 걸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제 수련이의 새끼손가락은 소군 거야. 절대 내 곁을 떠나면 안 돼.”
“손가락 안 걸어도 절대 안 떠납니다.”
담수련에게 손을 잡힌 악불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다행히 주위가 어두워 알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상해……?”
“뭐가 말입니까?”
“소군 손을 잡으니까 뭔가, 찌릿한 느낌이 와.”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즉답을 하지 못했다. 그 역시 담수련의 손이 자신의 손을 잡는 순간 몸을 얼게 할 정도로 강력한 찌릿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은 급히 손을 빼며 말했다.
“자, 이제 안심하시고 들어가서 좀 더 주무세요. 요즘 무공 수련도 열심히 하신다고 들었는데, 너무 피곤하면 안 됩니다.”
오음절맥은 잠을 푹 자지 않으면 음기가 더욱 올라와 몸을 상할 수 있었다.
“소군은 나만 보면 맨날 들어가래…….”
“맨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너무 이른 시각이라서입니다. 빨리 들어가세요.”
담수련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듯 입을 살짝 내밀었지만 결국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사화!]
담수련이 들어가자 악불군은 사화를 불렀다.
“대화 다 끝나셨어요?”
사화는 악불군의 전음을 듣자 금방 달려왔다.
“들어가셨어. 이 새벽에 밖으로 모시고 나오다니, 정신이 있는 거야?”
“죄송합니다. 악몽을 꾸신 모양이에요. 갑자기 ‘소군, 가면 안 돼!’ 소리치시며 일어서더니 우시는 거예요. 그러고는 계속 안절부절못하셔서 어쩔 수 없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추국의 설명에 악불군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나 없을 때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나오지 마라.”
“이 주위에 잠봉단이 삼십 명이 넘게 경계를 서고 있습니다. 저번과 같은 일은 없을 겁니다.”
“경계는 언제나 최악을 생각하라고 배우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혼내는 거 아니야. 수고했으니까 모두 들어가.”
“예!”
사화까지 안으로 들어가자 악불군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아가씨께서 불안해하신다…….’
악불군은 담수련이 악몽까지 꾸었다는 말에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종리화가 떠나기 전 자신과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했다.
그는 종리화에게 한 명의 힘이 더 필요할지도 모를 상황에서 굳이 밖으로 나가는 이유를 물었었다.
“이번 계획에는 간단치 않은 복선이 많이 깔려 있다. 내가 사라지는 것 자체로 적에게 상당한 혼란을 유발할 수 있을 거다.”
“솔직히 전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적들이 쳐들어온다면 죽음으로 그들을 막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소군아.”
“예.”
“가주님께서는 이번 전쟁을 필패라고 예상하고 계신다. 단지 버티기만 했다가는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그래서 잠룡세가의 뒤를 이을 핵심만은 살리려고 이러시는 것이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라고 했습니다. 필패라고 생각하신다면 후퇴를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아는 가주님은 정말 강하신 분이다. 하지만 대공은 천외천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네가 최대한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경지에 든 자이다. 거기다 천하의 모든 무력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권력자이기도 하지. 가주님께서는 도망도 가지 못하신다.”
‘대공?’
악불군의 머리에 대공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각인되고 있었다.
“대공이란 자가 어떤 자인지는 모르지만, 그 역시 사람입니다. 전 최상의 방법을 찾는다면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똘똘 뭉쳐 있다면 가능하다. 가주님께서 이렇게 복잡한 방식을 택한 것은, 바로 본가 내에 대공을 따르는 자들이 상당히 많다는 정황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오룡세가 역시 마찬가지일 게다.”
“그럼 제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이 모든 계획의 중심은 소가주님과 아가씨다. 소가주님의 신변 보호는 이미 따로 준비를 하셨다. 하지만 아가씨의 보호는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가주님께서는 너에게 도박을 해 보겠다고 하셨다.”
“도박이요?”
“그래! 가주님께서 너에게 엄청난 투자를 하실 생각이시다. 대신 그 짐을 거의 너 혼자 짊어져야 한다.”
“그냥 소가주님과 아가씨께서 함께 행동하시는 것이 더욱 좋지 않겠습니까?”
“산술적으로는 그게 훨씬 낫지. 하지만 두 세력이 합친다 해도 대공에게 발각이 된다면 멸문을 당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가주님께서는 그래서 양쪽으로 나눈 것이다. 만약 소가주님께 일이 생긴다면 아가씨께서 그 뒤를 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아가씨의 운명은 모두 네게 달렸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종리화의 대화를 반추하던 악불군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가씨의 운명이 내게 달렸다고 하셨어. 그래, 내게는 게으름 피울 시간 따위는 없어.’
입술을 꾹 다문 악불군은 다시 천륭검보의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 * *
계절이 두 번이 바뀌었다.
그러는 사이 잠룡세가에서는 계속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세가 밖으로 나간 가솔들이 행방불명이 되거나 시신으로 발견되는 일이 점점 잦아지면서 아예 출입 자체가 끊어지다시피 했고,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던 손님들도 끊어졌다.
잠룡세가에 대한 괴소문은 이제 항주를 넘어 절강 전체로 퍼졌고, 지금은 중원 전체로 퍼져 잠룡세가의 몰락은 이제 시간문제인 것처럼 회자될 정도였다.
“주군, 예상 외로 동요가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계획을 앞당겨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담무룡의 집무실에 들어선 문창현은 심각한 얼굴로 급히 말했다.
하지만 담무룡 역시 상황 파악을 하고 있는 듯, 표정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본가의 결속력이 약하구나.”
담무룡은 문창현의 계획을 따라 반전을 모색하고 있었다. 지금 항주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세력은 군부였다.
그러나 잠룡세가를 봉쇄하는 정도는 가능하지만, 공격은 그들로는 어림도 없었다. 결국 잠룡세가를 공격할 자들은 따로 있을 것이 분명했다.
문창현은 화해가 어렵다면 대공에게 잠룡세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즉,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병법의 진리를 따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담무룡의 허락이 떨어지자 곧 어찰단과 혈랑무의 고수들이 모인 곳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가장 믿을 수 있는 수하들을 모아 공격조를 만들었다.
그러나 상황은 담무룡의 계획과는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탐색을 나간 수하들은 죽거나 사라졌고, 공격을 위해 따로 모아 수련을 시키던 수하들이 도망을 치거나 오히려 다른 수하들과 싸움을 벌이며 자중지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일치단결해도 부족할 판에 두 세력으로 갈려 으르렁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담무룡도 생각지 못했던 전개였다.
“처음 시작은 간세들이 퍼뜨린 헛소문이었지만, 압박의 강도가 점점 세지고 나갔던 수하들의 시신이 자꾸 발견이 되면서 다른 수하들까지 거기에 동요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걷잡을 수없이 불만 세력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공격조까지 동요할까 걱정입니다.”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금령군주가 어제 항주로 들어왔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녀를 한번 만나 보시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담무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는 보지. 그런데 무슨 말을 하지?”
“대공과 화해할 방법을 말해 달라고 하십시오.”
“그건 이미 물 건너갔지 않느냐?”
“아닙니다. 이제 그들이 우리에게 준 일 년의 시간 중 겨우 두 달만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천하의 상황이 그때와 다릅니다. 분명 대공도 우리를 힘으로 제거하는 것에는 부담이 있을 것입니다.”
문창현의 말대로 지금 천하는 대혼란에 빠져 있었다.
우후죽순처럼 난립하던 반란 세력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더니, 이제 십만 명이 넘는 군대를 지닌 반란군이 서너 개에 달할 정도였다.
거기다 사방에 도둑과 살인이 횡행했고, 녹림의 산적들이 산 아래까지 내려와 노략질을 할 정도로 치안이 무너져 버린 상황이었다.
“그래 봐야 나만 구차해질 뿐이다. 대공은 상황이 아무리 나빠져도 거래할 자가 아니다.”
“하지만 뭔가 행동하지 않으면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수하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릅니다.”
사실 담무룡의 패도적인 성격을 생각했을 때, 아무리 상대가 대공이고 포위를 한 자들이 원나라 군부라 해도 지금까지 참고 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행동을 하는 순간 일 년이란 시한은 사라지고 당장 전면전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가 기다리는 것은 담수운과 종리화가 확실하게 준비를 끝냈다는 보고였다. 그리고 아직 담수련을 내보내지 못한 것이 걸림돌이었다.
“오늘 중으로 결정을 할 것이니, 가서 기다려라.”
“주군, 시간이 없습니다.”
“문창현! 왜 너답지 않게 이러는 것이냐? 지금 네가 가장 많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
순간 문창현의 얼굴이 확 굳었다. 담무룡의 질책에서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대로 된 판단을 지금…….”
“판단과 결정은 내가한다. 넌 분석만 해! 그만 나가 봐라.”
“알겠습니다.”
문창현, 사실 그는 지금 심각한 갈등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담무룡의 얼굴 역시 편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