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0화>
40화. 폭풍전야(1)
잠룡세가의 한 전각을 이십여 명의 잠룡대와 함께 가등우가 에워싸고 있었다.
그때 전각의 창문이 하나 열리며 새가 날아가자, 누군가에게 손짓을 하더니 열렸던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새를 날린 노인은 가등우가 갑자기 창문으로 뛰어들자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 대장이 어쩐 일인가?”
노인은 창문을 통해 잠룡대가 계속 들어오자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감히 네놈들이 호법의 방을 함부로 들어와!”
“연 호법께서 간세일 줄은 몰랐습니다.”
“간세라니? 그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가 대장, 아무리 가주님의 호위대장이라 해도 이런 무례는 용서하지 못하네!”
“그럼 전서구는 누구에게 날린 것입니까?”
“전서구? 아! 그건 내가 새 한 마리 키워 볼까 해서 가지고 왔는데, 계속 바빠 모이도 못 주고 그래서 자유롭게 살라고 날려 보낸 거지. 절대 전서구는 아니네.”
연 호법은 새를 날린 것까지는 부인하기 어렵다고 본 듯 다른 변명을 늘어놓았다.
“제가 아무리 애완용 새하고 전서구를 구별 못할까요? 호법까지 하시는 분이 그러면 되겠습니까? 남자답게 솔직히 말하시지요.”
“가 대장, 지금 내가 참을 수 있는 수위를 넘어가고 있다는 거 아나?”
“저항하시려고요?”
“감히 호법인 나를, 호위대장 따위가 체포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간세를 더 이상 호법 대우를 해 줄 수는 없지요.”
연성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계속 무례를 저지른다면 하극상의 죄를 물어 죽일 수도 있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그때 방문이 열리며 고숭무가 안으로 들어왔다.
“고 호법, 잘 왔네. 가 대장이 지금 나를 간세로 몰면서 압박하고 있어. 내가 가주님을 보필한 것이 이십 년이 넘거늘, 이 나이에 이런 꼴을 당할 줄은 생각도 못했구먼.”
“가 대장, 이게 무슨 소리인가? 연 호법이 간세라니?”
“연 호법께서 전서구를 날리는 것을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
“가 대장! 증거가 있는가? 지금 세가의 분위기가 흉흉한데 호법까지 간세로 몰아붙인다면 세가 내에 누가 있어 가주님께 충성을 하겠나? 어처구니없는 오해로 세가 전체를 서로 간에 의심하는 조직으로 만들지 말게.”
고숭무는 가등우보다는 수십 년을 같이 사선을 넘나들었던 연성문을 더 믿었다.
“그럼 가주님께 가서 직접 해명하도록 설득해 주십시오.”
가등우의 말에 고숭무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연 호법, 가 대장 말대로 여기서 다투지 말고 가주님께 직접 말하세. 만약 가 대장이 틀렸다면 내가 앞에 나서서 가 대장에게 벌을 줄 것이네.”
고숭무의 말에 연성문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하지만 자신보다 고수인 고숭무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반대를 한다면 고숭무도 의심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다. 가세. 내가 가주님께 자네의 월권에 대해 직접 말하겠네.”
* * *
“소군, 요즘 세가가 무척이나 분주하던데? 세가 무사들이 외부로 나가는 일도 거의 없는 것 같고?”
담무룡은 담수련에게만은 세가 외부에서 퍼지고 있는 흉험한 소문을 알리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악불군만은 예외였다.
함구하라는 담무룡의 명보다는 말하라는 담수련의 명이 그에게는 첫째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먼저 말하지는 않았지만, 담수련이 묻는 것은 다 알아내서 그녀에게 알려 주었다.
무엇보다 결국 알게 될 것을 계속 숨기다가 한꺼번에 알면 더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세가 상황이 크게 좋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본가에서 운영하는 상단도 지금 운영을 멈췄고, 지부와도 전혀 연락이 안 되고 있다고 합니다.”
“아버님께서 고심을 많이 하시겠다. 휴우~”
“가주님께서는 보통 분하고 다르십니다. 분명 타개책을 가지고 계실 겁니다. 전 솔직히 아가씨가 더 걱정입니다.”
“왜?”
“골치 아픈 일이 자꾸 생기면 아가씨 마음도 불편하실 테니까요.”
“소군이 내 옆에 있는데 불편할 것이 뭐가 있어? 난 소군만 다치지 않고 내 옆에 있으면 아무 걱정도 안 해.”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그려졌다.
하루도 쉬지 않고 수련에 전념하면서 담수련의 호위까지 완벽하게 해내고 있는 그의 일상은,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하기 어려울 정도의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담수련의 이런 말을 들으면 모든 힘듦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소군.”
“예.”
“요새 사화가 좀 이상해.”
“뭐가 말입니까?”
“잠봉단에서 회의를 자주 하나 본데, 자꾸 나한테 중요한 일이 있을 거라고 언질을 주네.”
“무슨 일인지는 말 안 하고요?”
“응, 내가 물어봐도 곧 알게 된다고만 해.”
“제가 알아 올까요?”
“됐어. 말 안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 뭐. 그런데 백설이도 운동 좀 시켜야 하는데, 요즘은 바깥출입이 완전 금지라서 좁은 정원만 도니까 좀 예민해진 것 같아.”
설총마는 일 년 만에 그 크기가 다른 말들의 한 배 반은 될 정도로 커져 있었다. 거의 성마가 다 되었지만 까칠한 성격은 여전해서 담수련과 악불군 외에는 누구의 손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가주님께서 백설이를 위해서 준비한 갑옷이 도착했다고 들었습니다.”
담무룡은 담수련의 발이 되어야 할 백설이가 상처를 입을 것을 염려해 여간해서는 잘리지 않는 천잠사로 만든 백설만을 위한 옷을 준비했다.
“정말이야? 빨리 보고 싶다. 백설이는 소군처럼 멋있어서 어떤 옷을 입어도 어울릴 거야.”
나무 좋아 환한 미소를 지며 말하던 담수련은 깜짝 놀라 입을 손으로 막았다. 자신도 모르게 또 속마음을 말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악불군은 그녀의 이런 행동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햇살이 좋은 날, 둘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에서 소소하지만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작은 행복을 느끼는 것도 이제 곧 끝나리라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 *
다른 일을 보고 사 개월 만에 항주에 들어온 금령군주는 혈랑사자의 보고서를 보며 고운 아미를 찡그렸다.
“담무룡이 생각지도 못한 반격을 가하고 있나 보네?”
“그동안 너무 조용해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은밀하게 대공 전하를 돕는 수하들을 찾아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항주에 들어온 것은 귀에 들어갔겠지?”
“예, 이미 알렸습니다.”
“내게 면담 요청을 하라는 언질도 줬고?”
“예, 문창현을 통해 넌지시 권유를 하도록 했습니다.”
“역시 예상대로 대비를 하고 있었다는 말인데?”
복잡한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하던 금잔화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혈랑사자.”
“예!”
“담무룡이 자신의 목숨을 아끼는 자인가?”
“그자의 성격이 대단히 패도적입니다. 젊을 적 그를 봤을 때, 솔직히 같은 남자인 저도 감탄이 날 정도로 저돌적이었습니다. 당연히 상대는 물론 자신의 목숨까지도 도외시했던 기억이 납니다.”
“여색은 어땠어?”
“신기할 정도로 자신의 아내밖에 몰랐습니다. 제가 알기로 아내가 죽은 이후로 다른 여인을 가까이 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효웅이라……. 그런 자는 신기하게 자식들을 아주 사랑하지.”
“담수운과는 사이가 너무 나빠 중원 전체에 소문이 퍼질 정도였습니다.”
“진짜 사이가 나빴다면 그자의 성격에 죽였을 거야. 사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기대에 못 미쳐 화가 난 거겠지.”
“거기까지는 모르겠지만 딸인 담수련에 대한 사랑은 유명합니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질까, 진짜 보석 대하듯 키웠다고 하더군요.”
“그래 바로 거기야!”
“뭐가 말입니까?”
“내가 다른 지역을 돌면서도 그게 계속 이상했어. 왜 담수련은 그냥 세가에 있을까? 우리의 정식 공격이 시작되면 죽을 게 뻔한데, 그렇게 사랑하는 딸을 왜?”
“너무 사랑하니까 죽어도 같이 죽자 아닐까요?”
혈랑사자는 자신의 말에 금잔화의 표정이 변하자 급히 부언했다.
“죄송합니다. 잘못 말했습니다.”
“머리 좀 쓰면서 살아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종리화와 담수운은 아직 못 찾았지?”
“강서성이나 호남성으로 들어간 것은 어느 정도 확인됐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지금 반군들의 발호가 아주 심한 지역이라, 추적에 어려움이 상당히 많습니다.”
“상관없어. 그래 봐야 숨겨 놓은 세력을 규합해 잠룡세가를 이어 가겠다는 건데, 어차피 절강을 놓친 이상 큰 의미는 없을 거야. 잠룡세가는 절강에 있기 때문에 오룡인 거지, 다른 지역에 숨어 있다면 그저 그런 군소문파에 불과할 뿐이다.”
“담수운이나 종리화가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가지고 숨었을 확률은 없을까요?”
“천륭검보는 여자는 못 익힌다고 알려져 있고, 담수운은 그 무재가 담무룡보다 떨어지는데 자신도 익히지 못한 무공을 줬을까?”
“하긴 그렇군요?”
“담수련을 피신시키지 않은 이유. 난 거기에 해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굳이 다른 이유를 만들려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모두 개연성이 떨어져.”
“그럼 어떻게 할까요?”
잠시 생각하던 금잔화는 결심한 듯 말했다.
“담수련을 납치해라.”
“담수련은 잠룡세가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데, 가능할까요? 잘못하면 전면전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혈랑사자.”
“예.”
“언제부터 내 명령에 토를 다는 버릇이 생겼지?”
“용서하십시오. 당장 명을 시행하겠습니다.”
차가운 금잔화의 말에 혈랑사자는 급히 부복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녀의 권위가 혈랑사자를 훨씬 능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만 나가 봐.”
“예!”
혈랑사자가 급히 나가자 금잔화는 한 남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악불군……. 담수련을 납치하려면 그자를 죽여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좀 더 알아보고 싶었는데, 그의 명이 그것밖에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
넉 달간 다른 지역을 지휘하러 떠났을 때도 그녀는 간간이 악불군을 생각하곤 했다. 태어나서 남자 생각을 그렇게 자주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남자는 언제나 소모품에 불과했다. 그리고 악불군 역시 기억에 좀 남는 특별한 소모품일 뿐이었다.
* * *
비밀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고 있던 악불군은 담무룡이 비밀 통로에 들어서자 예를 갖춘 채 기다렸다.
“오랜만이구나.”
“예.”
“거의 한 달만이지.”
“예.”
“내가 들어온 것을 느꼈느냐?”
“느낀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는 대답이 아니다.”
“느꼈습니다.”
“언제부터 느꼈느냐?”
“가주님께서 집무실로 들어올 때부터 느낀 것 같습니다.”
사실 악불군은 담무룡이 집무실이 있는 전각 근처에 왔을 때 이미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 담무룡이라고 확신한 것은 집무실에 들어오고부터니까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담무룡으로서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올 일이었다. 이 갑자가 넘는 내공을 지닌 그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들어왔는데, 일 갑자도 안 되는 내공을 지닌 악불군이 그를 느낀 것 자체가 비상식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여간에 여러 가지로 무공의 궤를 벗어나는 현상이 네게 많이 일어나는구나. 그래 요즘은 어떤 무공을 많이 수련했느냐?”
“환영전궁보(幻影電弓步) 많이 수련했습니다.”
악불군의 답에 담무룡은 또다시 감탄하고 말았다.
환영전궁보는 그가 모은 비급 중 보법에 해당하는 것으로, 삼백 년 전 보법만으로 무림 백대고수 안에 들었던 환영신군의 절기였다. 그 오묘함과 변화무쌍함으로는 따를 보법이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지만, 공격을 할 때 강력함이 부족했고 펼칠 때 내공 소모가 많아 더 이상 익히는 사람이 없었다.
담무룡이 감탄한 것은, 그가 가진 비급 중 환영전궁보가 다수로부터 누군가를 보호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보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적절한 보법을 골랐구나? 구결만 보고 고르기는 어려웠을 텐데, 어떻게 그것을 골랐느냐?”
“며칠간 보법들을 모두 수련해 보았습니다. 그중 환영전궁보가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가장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가에 있는 보법 전부를 수련했다는 말이냐?”
“완벽하게는 익히지 않고 그냥 수박 겉핥기식으로 조금씩 연습을 한 정도였습니다.”
악불군은 겸손하게 말했지만, 보법의 특성상 오성이상 익히지 않으면 그 효과를 알아내기는 힘들었다.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능력을 보유하고 성실한데 겸손하기까지 하다……? 정말 보면 볼수록 진국인 아이인데 담씨가 아닌 것이 정말 아깝군.’
점점 악불군에게 빠져 들어가고 있는 담무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