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2화>
42화. 암막(1)
가등우에게 연행된 연성문은 삼 일 간 뇌옥에 갇혔다.
호법이라는 지위는 최고위직으로서 아무리 큰 죄라 해도 변명의 기회를 주는 법이라고 고숭무가 따졌지만, 문창현의 결정을 바꿀 수는 없었다.
연성문은 새를 날린 것은 사실이지만 전서구는 아니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가등우와 잠룡대의 무인들 여럿이 전서구라고 증언했기 때문에, 빠져 나오기는 어려웠다.
“불편하시지요?”
옥의 한가운데 정좌를 하고 앉아 있던 연성문은 자신에게 말을 건 자를 보고서 약간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옥 안인데 불편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 아니겠나?”
“연 호법께서 가주님을 보필한 것이 이십 년 되어 가지요?”
“이십이 년 되었네.”
“본가에서 호법이면 거의 최고의 지위까지 올라가신 것인데, 가주님을 배신하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난 가주님을 배신한 적 없네. 난 여전히 가주님을 존경하고, 충성하고 있네.”
“저한테까지 전서구를 날린 적이 없다고 우기실 생각이십니까?”
“우기고 자시고 할 필요가 있겠나? 자네가 직접 왔다면 이미 내 처우가 결정되었다는 의미겠지?”
“전 연 호법께서 대공께 전서구를 보냈다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가주님께는 아직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배신자로 이미 낙인을 찍었는데도 아직까지 살아 있어서 이상하다 했는데, 가주님께서 아직 보고를 못 받으셨군. 그런데 왜?”
“이유를 좀 알고 싶어서지요. 제게 전서구를 보낸 적이 없다는 말은 하지 마시고, 솔직하게 말해 주십시오.”
“나라에는 황제가 있고 그 밑에 승상이 있네. 승상에게 충성을 한다 해도 황제의 명이 있으면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신하의 숙명인 게야. 난 가주님을 만나기 전 대공께 먼저 충성을 맹세했네.”
“역시 대공은 정말 대단하시군요. 제가 한 가지 제안을 하겠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전음으로 뭔가를 말했다.
그러자 연성문의 눈이 경악한 듯 동그래졌다.
* * *
“가주님, 반군의 세력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들이 이곳을 공격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 같습니다.”
호남의 맹주인 화룡세가는 지금 사면초가의 상황에 빠져 있었다.
회의실에 모인 모두의 표정은 심각했다.
화정무는 추설붕을 보며 물었다.
“추 군사, 생각은 어때?”
“지금 반군이 가장 강성한 곳은 호북과 강소 그리고 호남 북부입니다. 하지만 원나라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호남 남부에 많다 보니, 원나라 군부에서 치안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아직은 양민들 위주인지라 수는 많지만 저희들에게 큰 위협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하에 숨은 중원 무림인들이 차츰 밖으로 나오고 있다는 보고가 있으니, 대비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문제는 영웅회입니다. 몰락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잔당들이 전부 영웅회에 가입을 했다고 하니, 그들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호법인 대력천강부(大力天强斧) 부응철이 부언했다. 부응철은 도끼에 관한 한 최고의 고수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아직 영웅회의 총단은 찾아내지 못했지?”
“대략적인 위치는 어느 정도 특정을 했지만, 범위가 너무 넓습니다.”
화정무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략적인 위치라는 것이 바로 그들의 세력권인 호남 남부였기 때문이었다.
“추 군사.”
“예!”
“대비를 해야 한다고 했으면 대비책도 말해야지?”
“지금 원나라 관은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그 바람에 곳곳에서 흑도들과 도적들이 사방에서 창궐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모조리 제압해서 본가의 하부 조직으로 만들었으면 합니다. 수에는 수로 대적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추 군사.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들의 수가 최소한 삼만은 될 터인데 거기에 소모되는 재정은 어떻게 충당한단 말입니까? 지금도 수입이 예전에 비해 삼분지 일이나 줄었습니다.”
살림을 책임지는 총관 서절갑이 급히 나섰다.
“그들을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상납을 받으면 됩니다.”
“명색이 오룡세가인 우리가 도적들과 흑도놈들에게 상납을 받는다면 천하가 비웃을 걸세.”
부응철이 어불성설이라는 듯 반박했다.
“이미 세상은 난세에 접어들었습니다. 스스로 지키지 못한다면 죽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저는 강한 것이 강한 자가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추 군사님 말대로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 과제입니다. 제게 무력 집단 오백만 내려 주시면 본가 사방 천 리에 있는 모든 무력 세력들을 본가에 복속시키겠습니다.”
뜻밖에도 나선 사람은 화우성이었다.
잠룡세가에서 본의 아니게 철수한 후, 담수련을 차지하고 싶으면 지금보다 두 배 이상 강해지라는 화정무의 말에 화우성은 지난 십 개월간 정말 죽어라 수련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잠룡세가에 대한 소식을 계속 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담수련을 데려오려면 대공도 함부로 하지 못할 힘을 얻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그는 호남 남부의 모든 무력 세력들을 복속시킨 후, 화룡세가를 무림 세가가 아닌 군벌로 탈바꿈할 계획을 세웠다.
그동안 화룡세가의 움직임을 제어하던 원나라의 군과 관이 모두 철수한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네가 직접 하겠다는 것이냐?”
“천하에 저 화우성이 어떤 사람인지를 각인시키겠습니다.”
화정무도 화우성이 미친 듯이 무공 수련만 하고 있다는 보고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가의 일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변화를 보이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화정무는 추설붕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리고 추설붕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다시 입을 열었다.
“좋다. 이번 일은 소가주에게 맡긴다. 소가주는 추 군사와 의논하여 사방 천 리를 본가에 복속시켜라.”
“존명!”
예상보다 강력하게 세를 불리는 반군들 덕에 그동안 제룡회라는 족쇄에 묶여 있던 오룡세가가 독자 생존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이 악불군과 담수련의 행보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아직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정(靜), 행(行), 류(流)…….’
언제나처럼 담수련의 거처가 보이는 나뭇가지에 앉은 악불군은 무명비급 속에 적혀 있는 서른여섯 글자들을 하나씩 되뇌고 있었다.
한 글자 한 글자는 누구나 다 아는 쉬운 글자로서 의미야 알겠지만 그림과는 전혀 연관 관계가 없었다.
아니, 연관 관계가 없이 써 놓았을 리 없으니 그가 못 찾았다는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그림과 글자를 계속 조합해 나가며 연구를 하던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가 잠입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고수다! 그렇다 해도 근래 세가의 경계가 철통같은데 여기까지 어떻게 걸리지 않고 들어온 거지?’
예전 같으면 아예 느끼지도 못했을 정도로 미약한 기운을 감지해 낸 악불군은, 침입자가 어디에 있는지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무공 자체는 일취월장했지만 기를 구분하고 잡아내는 데는 아직 경험이 부족한 그였다.
[사화, 자나?]
악불군은 처소 안으로 전음을 날렸다. 그러자 곧 매향의 전음이 들려왔다.
[매향입니다. 나머지는 자고 있어요.]
사화는 밤새 교대로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침입자가 있다. 조용히 모두 깨워 아가씨를 철벽 경호해라.]
[네.]
사화가 부리나케 준비하는 것을 느낀 악불군은 다시 침입자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
‘저기다.’
드디어 침입자의 위치를 특정하는 데 성공한 악불군은 몸을 날렸다.
담수련의 처소 외곽을 경계하고 있는 잠봉단을 가볍게 뚫고 안으로 들어선 침입자는 조심스럽게 담수련의 침실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에 여긴 어떤 일이십니까?”
침입자의 앞을 막은 악불군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뜻밖에도 침입자가 연성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이구나. 아가씨 계시냐?”
“호법님께서 이 시간에 왜 아가씨를 찾는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감히 나를 심문하는 거냐? 가주님의 명으로 온 것이다. 비키거라.”
“가주님의 명으로 오신 분께서 왜 숨어서 오신 것입니까?”
“숨어서 온 것이 아니라, 가주님께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아가씨를 모시고 오라고 해서 온 것이다.”
“가주님의 명령서를 보여 주십시오.”
“네가 지금 호법의 말을 의심하는 것이냐?”
“명령서가 없다면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아가씨를 모시고 가시려면 가주님의 명령서를 가지고 오십시오.”
“이놈이……. 일개 호위 무사 놈이 아가씨를 모신다고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제 임무를 수행하는 것뿐입니다. 명령서가 없다면 아가씨의 처소 십 장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연성문은 악불군의 목소리가 커지자 급히 머리를 굴렸다.
‘이놈을 죽이는 순간 안에 있는 사화가 눈치챌 거야. 우리의 언쟁을 듣고 어쩌면 이미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럼…….’
연성문은 더 시간을 끌 수 없다고 느끼자 다시 입을 열었다.
“악불군. 내가 그동안 귀엽게 봤는데, 존장에 대한 예의가 이렇게 형편없을 줄…….”
쉭! 쉭!
말 중간에 연성문의 소매에서 무엇인가가 번쩍하며 악불군을 향해 날아갔다.
“……은 몰랐다.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만 네가 스스로 원한 것이니 날 원망하지 말……?”
그리고 뒷말이 이어졌다.
육관을 통과한 무인들의 무공 수위를 잘 알고 있는 연성문은 그의 한 수로 이미 악불군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연성문의 말은 결국 끝을 맺지 못했다.
악불군이 그가 날린 비도를 가볍게 피하더니 오히려 그를 향해 공격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 이놈이!’
연성문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듯 급히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악불군의 움직임은 훨씬 빨랐다.
“으윽! 네, 네놈의 무공이 어떻게……?”
연성문의 자신의 가슴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악불군의 검에 의해 가슴의 피부가 쩍 벌어졌고 옷으로 피가 흥건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그대로 죽을 뻔한 것이다.
“저야말로 호법님께서 왜 이런 행동을 하시는 것인지 정말 이해가 안 되는군요. 설마 호법님께서 적의 간세였습니까?”
‘큰일났군.’
한차례 싸우는 소리가 났으니 이제 사방에서 잠봉단이 몰려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연성문은 이를 악물더니 전력을 다해 악불군을 공격했다.
지금 최선은 빨리 악불군을 제거하고 담수련을 납치한 후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잠룡세가의 지리를 완벽하게 안다는 장점이 있었다.
‘보인다…….’
연성문이 공격하는 모든 모습이 눈에 확연하게 보이자, 악불군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생사결에서 한쪽은 상대의 움직임을 전부 간파하고 또 한쪽은 간파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상인과 장님이 싸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퍽!
“어어억!”
연성문은 악불군이 자신의 공격을 보법도 사용하지 않고 몸을 약간 비트는 정도로 피하더니 팔꿈치로 자신의 가슴을 강하게 치자 기이한 비명성을 터뜨리며 뒤로 다섯 발자국이나 밀려 나가더니 넘어질 뻔했다.
가까스로 넘어지는 치욕은 면했지만 곧 한 움큼의 피를 토해 내고 말았다.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어찌 네놈의 무공이 가주님과 맞먹는단 말인가……?”
연성문은 지금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말까지 더듬거렸다.
그는 대공이 강하다는 말만 들었을 뿐, 직접 무공을 펼치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담무룡과는 수많은 전투에 참가했기에 잘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담무룡은 연성문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존재였다. 수십 년 동안 아예 천외천으로 인정했던 고수가 바로 담무룡이었다.
그런데 어찌 육관을 겨우 일 년 전에 통과한 악불군의 무공이 담무룡과 맞먹을 수 있단 말인가…….
연성문은 찢어질 듯 눈을 크게 뜨고는 악불군을 보며 절규하듯 소리쳤다.
“네, 네놈의 정체가 뭐냐?”
“아직 제가 누구인지 모르셨다니, 의외로군요. 다시 말씀드리지요. 누구도 저의 허락 없이는 아가씨께 삼 장 안으로 갈 수 없습니다. 전 담수련 아가씨만의 호위 무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