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4화>
44화. 암막(3)
“연 호법을 자결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친위 세력이 있다면 왜 제게까지 그것을 비밀로 하신 것입니까? 설마 저까지 의심하고 계신 것입니까?”
자신이 알지 못하는 친위 세력이 연성문을 압박해 자결을 하게 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대단한 변수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너를 못 믿는다면 세가 내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주군. 사실 금령군주가 본가를 방문한 이후, 주군께서 뭔가를 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했다는 거냐?”
“종리 단주도 그렇고 소가주님도 그렇고, 전 두 분께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릅니다.”
문창현은 무척이나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그것은 너를 못 믿어서 비밀로 한 것이 아니라, 내 개인적인 일이라서 말을 안 한 것뿐이다.”
“그럼 비밀 친위 세력은 어찌 제게 숨기신 것입니까?”
“넌 군사라는 자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냐? 만약 그들의 존재를 대공이 안다면 어찌 되겠느냐? 마지막 패는 최대한 감추는 것이 병법의 기초가 아니더냐?”
“하지만 대공과의 싸움은 수하들의 수부터 고수의 수까지 모든 면에서 중과부적입니다. 거기다 주군의 예상대로 간부 중 간세가 있다면 아무리 계획을 잘 짠다 해도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그 비밀 친위대가 연성문을 제거할 정도의 전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제가 알고 있었다면, 완벽한 대비책을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차피 곧 알려 주려고 했다. 오늘은 내가 생각할 일이 많으니 그만 돌아가거라.”
담무룡의 달래는 말에 문창현은 더 조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는 나가고 말았다.
‘이대로는 오래 못 버틴다.’
문창현이 나가자 담무룡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그가 회의청에 들어올 때는 연성문에 대한 보고를 감춘 자들을 심문하고 수상한 자는 아예 이 자리에서 징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간부들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막상 연성문에 대해 물어보면서 간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가는 자들이 예상외로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증거도 없이 의심만으로 간세로 몰아 죽인다면 그 순간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진신 무공을 보임으로써 갈등하는 자들을 잠시 붙잡아 두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대공이 약속한 날까지 버티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속으로 곪고 있었어. 은근히 사기를 저하시킨 놈이 있어. 그놈이 진짜 간세인데…… 이 나이가 되도록 주변에 믿을 놈이 이렇게 없다니, 정말 수운이 말대로 인생 잘못 살았군.’
담무룡은 이렇게 된 이상 계획을 앞당기기로 결정을 했다.
* * *
“소군!”
“예, 아가씨.”
“얘기 들었어. 소군이 또 날 구해 줬네. 미안해.”
“미안하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난 소군의 보호만 받으면서 소군에게 뭐 하나 해 주지도 못하고…….”
담수련이 시무룩한 얼굴을 하자 악불군은 급히 말했다.
“아가씨,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제게 아가씨는 새로운 생명을 주신 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아가씨 덕에 어머니의 마지막을 행복하게 해 드릴 수 있었습니다.”
“소군은 오로지 그것 때문에 내 옆에 있는 거야?”
“예? 그게 무슨?”
“그러니까 내가 어렸을 때 어떤 상황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소군을 도와준 그 일 때문에 내 곁에 있는 거냐고?”
생각도 못한 질문에 악불군은 잠시 즉답을 하지 못했다. 담수련을 지키는 것이 그의 임무라고만 생각했지, 왜? 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담수련을 멍한 눈으로 보던 악불군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급히 고개를 숙였다. 담수련의 얼굴을 그렇게 빤히 보는 것도 금지 사항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피한 것은 금지 사항이기 때문만은 분명 아니었다.
“왜 말을 안 해? 정말 내 옆에 있는 게 오로지 그것 때문이야?”
“솔직히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뭔데?”
“…….”
“말 안 할 거야?”
“제게…… 아가씨는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운……명?”
담수련은 갑자기 망부석이라도 된 듯 몸이 굳어졌다. 운명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녀의 전신에 찌릿한 전율이 지나갔다.
‘왜 소군만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자꾸 슬퍼지는 지 이제 알았어……. 왜 밤마다 소군 생각만 나는지 이제 알겠어. 운명…… 유모가 말한 사랑이 이거였어.’
담수련은 악불군을 멍하니 바라보다 힘없이 쓰러졌다.
아니, 쓰러질 뻔했다.
악불군이 어느새 그녀를 부축한 것이다.
[사화! 빨리 와라.]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던 사화는 전음을 받자 즉시 달려왔다.
“아가씨께서 오늘 일 때문에 충격을 받으신 모양이다. 빨리 안으로 모시고 의원을 불러라.”
“예!”
매향이 급히 밖으로 몸을 날리자 나머지 삼화는 담수련을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확실해졌습니다. 아가씨는 제 운명입니다. 전 아가씨 옆에 있어야만 살아 있는 것이지요.’
삼화에 안겨 처소 안으로 사라진 담수련을 보며 악불군은 아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 *
“연성문이 백수철검이지?”
금잔화의 물음에 혈랑사자가 답했다.
“예.”
“그자, 무림 백대고수 안에 들어 있지 않아?”
“대단한 고수입니다.”
“담수련을 납치하러 담까지 넘었는데 자결을 했다? 이상하지 않아?”
“자결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죽은 것이 분명합니다.”
“담무룡이 직접 손을 썼을까?”
“담무룡은 아닙니다.”
“그럼 누가 죽였다는 거야?”
“그게 굉장히 의문이라고 합니다.”
연성문의 죽음에 대한 회의가 끝난 지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았건만 이미 모든 내용을 알고 있는 그들이었다.
“담수련을 대단한 고수가 호위하고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겠지?”
금잔화는 담수련의 앞을 막던 악불군의 모습이 갑자기 떠올랐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본 악불군의 무공은 상당히 강했지만 절정 고수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잠룡세가에 우리 예상보다 더 많은 고수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이번 실패로 담수련에 대한 경계가 더 강화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연성문이 당할 정도면 더 이상 잠룡세가 내에서는 빼낼 인원도 없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금잔화가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시려고요?”
“담수련의 납치가 실패했어. 그럼 담무룡이 다음 행보를 어떻게 할까?”
“설마, 담무룡이 우리를 먼저 친다는 것입니까?”
“그자의 성정상 그럴 확률이 있어. 난 피 보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니까 본진에 가 있을게. 혈랑사자는 죽지 말고 잘 상대해.”
“담무룡이 직접 공격에 나선다면 여기 있는 인원으로는 못 당합니다.”
“그래서? 혈랑사자도 후퇴하겠다고?”
“그, 그건 아닙니다만…….”
“쳐들어오면 빨리 연락탄을 날려. 원군을 준비해 놓고 있다가 곧장 투입시킬 테니까. 대공 전하께서도 요즘 중원 상황이 다급해서 계속 두고만 보기는 어렵다고 하셨어. 그래도 전하께서 직접 한 약속인데 먼저 깨기는 그렇지만, 담무룡이 먼저 공격을 한다면 우리가 약속을 깬 것이 아니니까 잘된 거지 뭐.”
말을 마친 금잔화가 밖으로 나가자, 이미 나올 것을 알고 있었는지 가마가 준비되어 있었다.
* * *
“사화, 백설이 없어졌다는 게 무슨 말이야?”
연성문의 죽음 이후 완전 전시 체제로 바뀌면서 며칠간 백설을 보지 못했던 담수련은, 백설이 없어졌다는 보고에 깜짝 놀라 사화를 불렀다.
“악 무사님께서 백설이를 데리고 갔다는데, 이후는 저희도 모릅니다.”
“소군이 백설을 데려갔다고?”
담수련은 안심한 듯 말했다. 악불군이 데려갔다면 무조건 안심이 되는 그녀였다.
“예.”
“그런데 왜 내게 말도 안 하고 백설을 소군이 데려갔을까?”
“아가씨께서 쓰러지셔서 말씀을 못 드렸을 거예요. 그리고 백설이가 아가씨하고 악 무사님 이외에는 누구의 말도 듣지를 않으니까 악 무사님께서 직접 움직이신 것 아닐까요?”
담수련의 표정이 다시 불안해졌다.
그녀가 아는 한 악불군에게 자신 이외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담무룡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군 좀 불러와.”
* * *
세가 전체에 비상을 걸은 담무룡은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쌍월검을 기름으로 닦고 있었다.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빼돌린 날부터 만약을 대비해 나름 모든 준비를 해 왔다. 하지만 그가 천륭검보를 익히지 못하면서 계획은 비틀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담수운은 그의 기대를 저버렸고, 담수련은 오음절맥에 걸려 무공을 극성으로 익힐 수 없었다.
담수운과 담수련을 잘 키워 맡기려고 비밀리에 준비한 두 조직은 종리화와 악불군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자신이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 공포로 다스려 온 잠룡세가 역시 사상누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생전 처음 그에게 좌절감을 안겨 주고 있었다.
‘세상을 다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군……. 결국 아버님의 말씀이 맞았나?’
담무룡의 아버지는 담무룡이 태산을 벗어나려고 하자, 부귀영화나 권력은 욕망일 뿐 결국 남는 것은 후회밖에 없을 것이라고 경고를 했었다.
[가주님, 악불군입니다.]
[들어와라.]
비밀 통로의 문이 열리며 악불군이 들어왔다.
[부르셨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원래 종리화의 연락을 받고 너희를 내보내려고 했는데, 상황이 급박하게 변했다. 사화와 잠봉단에서 엄선한 아이 열다섯만 데리고 나가게 될 게다. 넌 수련이를 약속된 장소로 안전하게 호위하면 된다.]
[장소는 알지만 아직 시간이 정해지지 않았는데, 종리 단주님께서 저희가 간 것을 모르면 어떡하지요?]
[내가 방금 말하지 않았느냐? 상황이 변했다. 종리화의 연락을 기다리다가는 너무 늦어.]
[하지만 무턱대고 나갔다가 엇갈리면 아가씨께서 대단히 불편해질 상황에 놓일 수도 있습니다.]
[본가와 대공 간에 싸움이 벌어지면 곧 천하로 소식이 퍼질 거다. 그렇다면 종리화도 약속 장소로 달려올 것이다. 그리고 강호에 나가서 편하길 바라지 마라.]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 출발을 할까요?]
[내일이다. 이것을 가지고 가거라.]
담무룡은 준비된 보따리 하나를 던졌다.
[이게 무엇입니까?]
[강호에 나가면 생각보다 돈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전표와 금자를 두둑이 넣었다. 그래도 모르니 최대한 아껴라.]
[예.]
[그리고 이건 수련이에게 전해라.]
담무룡은 따로 준비한 듯 봉서 하나를 건넸다.
[아가씨를 안 만나시려고요?]
[수련이 성격에 내가 직접 만나면 안 떠나겠다고 고집을 부릴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우선 잠시 피하는 것이라고 네가 잘 달래서 나간 후, 절강성을 벗어나면 그때 주거라.]
[가주님, 그래도 대화라도 한 번 하시는 것이…….]
[마지막도 아닌데 뭘 그렇게 심각해. 가 봐라.]
담무룡의 마지막 전음에 악불군은 일어서더니 갑자기 바닥에 엎드렸다.
[가주님과 빠른 시간 안에 다시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악불군은 어쩌면 오늘이 담무룡과의 마지막 대화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찾으셨다고요?”
다시 돌아온 악불군은, 담수련이 찾는다는 매향의 전갈에 급히 그녀의 처소로 달려갔다.
“잠깐 들어와.”
평소 같으면 안 된다고 했을 악불군이었지만 이번은 별 말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백설 때문에 부르신 것이지요?”
“응, 백설이 갑자기 없어졌어. 그런데 소군이 데려갔다고 해서.”
“백설이는 지금 항주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왜?”
“아가씨께서 타셔야 하니까요.”
“우리 나가?”
“지금 세가의 상황이 일축즉발인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가씨를 안전한 곳으로 모시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안전한 곳이 어딘데?”
“종리 단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종리화를 만난다는 말에 담수련의 얼굴에 기쁜 표정이 나타났다. 하지만 곧 심각해지며 다시 물었다.
“그럼 아버님은?”
“가주님께서는 무림에서 최고의 고수로 불리시는 분입니다. 안전할 것이니 염려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니야. 나갈 때 나가더라도 아버님은 한 번 뵙고 나갈 거야.”
“아가씨, 지금 가주님께서는 대단히 큰 싸움을 앞두고 계십니다. 지금 아가씨를 보시면 마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비록 무공은 극성으로 익히지 못하지만, 그녀 역시 무림 세가의 여식이었고 무림인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있었다.
담수련은 마음이 편치는 않았지만 악불군의 말에 수긍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소군 생각에 아버님은 무사하시겠지?”
“당연히 무사하실 것입니다.”
“그래, 내가 여기 있으면 내 안전 걱정에 제 기량을 제대로 발휘 못하실 수도 있어. 그럼 언제 떠나?”
“새벽에 떠날 것입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사화를 보며 다시 말했다.
“사화는 이미 알고 있었지?”
“시간은 몰랐지만 이미 준비는 다 해 놓고 있었습니다.”
“이번 여행이 상당히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
“단주님께서 이미 얘기해 주셨습니다.”
“그럼 가서 마지막 점검을 해.”
“예.”
사화가 나가자 악불군은 담수련을 보며 말했다.
“제가 있는 이상, 누구도 아가씨는 건드리지 못합니다.”
둘의 강호초출.
그것은 신화의 시작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