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46화>
46화. 추격(1)
날이 밝자 항주는 발칵 뒤집혔다.
항주 시내를 거점으로 잠룡세가를 압박하던 혈랑사자가 이끌던 전위대가 전멸한 것이다.
발견된 시신이 백 구를 넘었으니, 무림인이라면 무조건 두려워하는 양민들에게는 커다란 공포가 아닐 수 없었다.
고작 단 한 번의 기습으로 망외의 대승을 거둔 잠룡세가는, 날이 완전히 밝자 세가로 다시 철수했다.
그동안 주눅이 들어 불만이 팽배하던 잠룡세가의 제자들은 대승에 고무된 듯, 사기가 오랜만에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하지만 담무룡을 비롯한 간부들의 표정에는 승리의 기쁨 따위는 없었다.
본격적으로 대공이 움직인다면 이후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 *
서호와 연결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 유람선은 천목산 입구 한적한 장소에 멈췄다.
“여기서부터는 육로로 가셔야 합니다. 왼쪽 길로 오백여 장만 가시면 마차와 말들이 준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단주님과는 연락이 됐습니까?”
천화오녀의 말에 악불군이 물었다. 담무룡이 그들을 내보내면서 가장 걱정한 것 중 하나가 종리화와 연락이 끊겼다는 사실이었다.
담수운 역시 종리화를 통해 소식을 듣기 때문에, 그녀와 연락이 끊긴 것은 상당히 심각한 일이었다.
“저희의 임무는 잠룡세가에서 신호를 하면 그곳에서 기다리다가 아가씨를 여기까지 모시는 것뿐입니다. 그 외에는 아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악불군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의 추적을 끊기 위해서는 점조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주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예.”
대답한 오녀가 담수련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했다.
“소군, 저분들은 무사히 돌아가겠지?”
“그러기를 바라야겠지요.”
악불군도 자신이 없는 듯 대답하고는 매향과 추국을 보며 말했다.
“아가씨와 나는 천천히 갈 테니, 매향과 추국은 마차가 있다는 곳으로 먼저 가서 상황을 확인하고 보고해라.”
“예!”
“연화와 흑란은 내가 전음을 보낼 때까지 이곳에 은신해 있다가, 누군가 추적하는 자들이 보이면 즉시 마차로 달려와라.”
“알겠습니다.”
“아가씨, 가시지요.”
악불군은 이미 주위에 매복한 자들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어떠한 기도 감지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에 조심 또 조심했다.
그에게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적이 숨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악 무사님, 마차와 말들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악불군과 담수련이 중간쯤 갔을까 추국이 달려와 보고했다.
“수상한 낌새 같은 것은 없었느냐?”
“예, 조용했습니다.”
“그럼 됐다. 아가씨, 신법 펼치실 수 있지요?”
“응.”
“그럼 빨리 움직입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잠복하고 있는 연화에게 전음을 보냈다.
[철수하고 이쪽으로 빨리 와라.]
* * *
“이쪽입니다.”
혈랑무 대주 야목귀는 악불군 일행이 빠져 나온 동굴을 보며 혀를 찼다.
“이런 곳에 동굴이 있으니 찾을 수가 있나?”
“대주님!”
동굴 근처를 한참 살피던 요시호가 야목귀를 불렀다.
“발견했느냐?”
“예.”
야목귀는 요시호가 가리킨 곳을 자세히 살피더니 몸을 날렸다.
“이쪽이다. 모두 따라라.”
정확하게 유람선이 떠난 방향을 따라가던 야목귀는 공중을 향해 신호탄을 날렸다.
그러자 두 대의 쾌속선이 일각도 안 되어 도착했다.
“저쪽 방향으로 가라.”
쾌속선에 올라탄 야목귀는 신기할 정도로 정확하게 유람선이 간 방향을 향해 소리쳤다.
“대주님, 군주님의 능력이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부대주인 인지강이 선두에 서 있는 야목귀에게 감탄스럽다는 듯 물었다.
“우리가 함부로 짐작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 분명한 것은, 담수련을 놓치면 우린 죽는다는 사실이다. 대원들에게 정신 바짝 차리라고 해라.”
“예.”
그때 야목귀의 눈에, 항주 방향으로 가고 있는 유람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서호는 태호 같이 큰 호수는 아니었지만 경관이 아름다워, 선남선녀들이 유람선을 타고 풍류를 즐기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실지로 지금도 꽤 많은 유람선과 어선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야목귀의 눈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저 배를 잡아라!”
“예!”
유람선보다 배는 빠른 쾌속선이기에 따라잡는 건 금방이었다. 따라잡자마자 야목귀와 그 수하 이십 명은 유람선 위로 날아갔다.
천화오녀는 갑작스런 그들의 등장에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곧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이 유람선은 기루에서 운영하는 것이온데, 무사님들께서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오늘 이 유람선에 누군가 탔었다. 그들은 어디에 있느냐?”
오녀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당연히 손님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항주에서도 유명한 고관대작의 자제분들이십니다. 그 분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야목귀는 씨익 미소를 지며 다시 물었다.
“한 번만 더 묻는다. 여기에 탔던 자들을 어디에 내려 주었느냐? 만약 시답지 않은 잔꾀를 부리려 든다면 목을 칠 것이다.”
“소녀들은 한낱 기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저희들께 왜 이러시는…….”
하지만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야목귀의 도가 정말로 그녀의 목을 쳤기 때문이었다.
“꺄아아악!”
“아악! 언니!”
나머지 사녀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짓다, 목이 잘린 여인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자 그제야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크고 처절한지, 근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 모두 그쪽을 쳐다볼 정도였다.
“다시 묻는다. 어디다 내려 줬느냐?”
“모른다! 이 악귀 같은 놈! 우리가 무슨 잘못을…….”
오녀 중 한 명이 악에 받힌 듯 소리쳤지만 그녀 역시 말을 끝내지 못했다. 역시 목이 잘렸기 때문이었다.
남은 삼녀는 더 이상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얼굴은 공포로 인해 사색이 되었고 바들바들 떨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반항도 할 수 없었다.
그녀들 또한 무공을 배우기는 했지만 고작 삼류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삼녀는 서로를 한 번 보더니 갑자기 호수를 향해 몸을 날렸다. 목이 잘리느니 물속으로 뛰어드는 게 조금이나마 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자들은 어찰단에서도 최정예라는 혈랑무였다.
물속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녀들의 몸은 반으로 잘리고 말았다.
야목귀는 사실 그녀들의 증언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추적의 단서는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배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잠룡세가와의 관계에 대해 알아내라고 전해라.”
“예!”
인지강은 즉시 품에서 전서구를 꺼내 몇 자 적더니 날려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피로 물든 유람선을 그대로 둔 채 다시 쾌속선을 타고 어디론가 빠르게 사라져 갔다.
* * *
마차와 말이 있는 곳에 도착한 담수련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그려졌다.
“백설아! 여기 있었구나.”
그곳에는 마차와 이십여 필의 준마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백설의 위용은 얼핏 보기에도 달랐다.
다른 말들도 상당히 덩치가 큰 대완구들로, 사람 없이 이십여 마리가 남아 있다면 서열 정리를 위해싸움이 나거나 시끄러워야 했다.
하지만 백설에게 완전히 주눅이 들었는지 꼼짝 못하고 있었다.
담수련이 백설의 목을 껴안자 백설도 반가운 듯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문질렀다.
“아가씨 마차에 타십시오.”
백설과 회포를 풀기도 전에 악불군이 그답지 않게 담수련을 재촉했다. 이상한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최소 삼갑자의 내공이 있어야 형성된다는 위험 감지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는 단지 불안하다고 생각할 뿐, 그게 무엇인지 아직 몰랐다.
사화와 마차에 탄 담수련은 작은 책자 하나를 보자 집어 들었다. 그것은 그 마차에 대한 설명서였다.
놀랍게도 마차는 정교한 기관 장치의 집대성이었다.
마차 전체를 보검으로도 자르기 힘들다는 만년한철로 만들어져 있었고, 곳곳에는 밖의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기관에 사방에 있었다.
책자를 펼친 담수련은 뜻밖이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몇 년 전 그녀가 공부한 진법과 기관책을 보고 직접 설계한 마차였기 때문이었다.
여러 번의 납치 시도를 당하면서 마차에 이런 장치가 있으면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 설계를 했고, 담무룡에게 보여 주었던 것이었다.
이후 담무룡이 아무런 말도 없어서 그대로 잊고 있었는데, 그녀도 모르게 설계도대로 마차를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아버님, 꼭 무사하셔야 해요.’
담수련은 다시 한번 담무룡의 사랑을 느끼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만드는 도중 변경된 부분이 몇 군데 있었지만, 직접 설계한 그녀답게 설명서를 한 번 읽고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숙지할 수 있었다.
* * *
“멈춰라!”
좌우를 유심히 살피던 야목귀가 갑자기 쾌속선을 세웠다.
“저기다.”
야목귀가 몸을 날리자 삼십여 명의 혈랑무가 그 뒤를 따랐다.
“너희는 이만 돌아가라.”
야목귀는 주위를 샅샅이 살피더니 쾌속선에 소리치고는 악불군 일행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추적의 대가라 해도 야목귀는 너무 쉽게 악불군의 뒤를 잡아내고 있었다.
* * *
두두두두!
백설의 등에 탄 악불군은 따르는 마차와 다른 말들과 보조를 맞추며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절강성을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소군이 이상할 정도로 급한 것 같지 않아.”
담수련은 같이 마차에 탄 사화에게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게요. 악 무사님께서 이렇게 다급하게 행동하실 분이 아닌데, 좀 이상하긴 이상하네요.”
흑란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즉시 동조했다.
“악 무사님께서는 모든 일의 우선을 아가씨의 안전으로 두잖아요? 아무래도 빨리 항주에서 벗어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추국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자 매향이 받았다.
“대공의 수하들은 대단히 무섭다고 들었어요. 특히 어찰단은 추적의 명수들이 많다고 하니까, 그래서 그럴 거예요.”
사화의 말을 들으며 담수련은 마차의 앞창을 열어 악불군을 보았다.
‘그래, 소군이 저럴 때는 다 이유가 있을 거야.’
악불군에게만은 무조건적인 신임을 보내는 담수련이었다.
* * *
야목귀는 말 발자국과 마차 바퀴를 발견하자 볼 것 없다는 듯 최고의 속력으로 흔적을 따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무공이 대단하다 한들, 평지에서 달리는 말을 잡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구불구불한 산길에서는 신법을 사용하는 그들이 말보다 빠를 수 있었다. 계곡이나 말들이 쉽게 넘어갈 수 없는 곳을 만났을 때 그대로 중간을 뛰어넘으면 거리를 많이 단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저기다! 먼저 앞으로 가서 매복한다.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곧장 살수를 펼쳐라. 단 마차는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해라. 담수련은 반드시 생포하라고 하셨다.]
야목귀는 산등성 하나를 두고 달리고 있는 마차를 발견하자 모두에게 전음을 날렸다.
* * *
빠르게 달리던 백설의 속도가 줄어들자 다른 말들은 저절로 속도가 줄었다.
“악 무사님, 무슨 일이 있나요?”
마차를 몰던 연화가 바삐 가던 악불군의 속도가 떨어지자 의아한 듯 물었다.
[연화, 아무래도 적이 이미 우리를 찾은 것 같다.]
숨은 적들의 기를 감지하는 훈련을 받긴 했지만 아직 완벽하지 못한 악불군이었다. 하지만 미미하게 느껴지는 기분 나쁜 파장은 잡아낼 수는 있었다.
연화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지만, 그녀보다 무공이 높은 혈랑무의 기를 감지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녀 역시 악불군이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즉시 마차 안으로 전음을 보냈다.
[악 무사님 말씀이 주위에 적이 있는 것 같대. 너희들 아가씨 잘 경호해.]
우선 사화에게만 주의를 준 악불군의 표정은 상당히 심각했다. 추적자들이 그들의 앞을 벌써 막았다는 사실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이 느껴지는 기운이 정말 추적자라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우리를 찾아낸 거지? 동굴을 빠져나와 이곳 천목산에 도착할 때까지, 누구도 우리의 뒤를 따라온 자가 없었어.’
악불군은 잠룡세가를 빠져나올 때부터 지금까지의 행보를 천천히 분석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