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51화>
51화. 변화(2)
금령사자도 금잔화가 묻는 이유를 아는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부검의들도 시신의 상처를 분석하면서 의견이 분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합의를 못하고 결과 보고서를 미룬 것으로 압니다.”
“합의를 못할 정도로 확실한 모양을 냈다는 얘기겠구나?”
“예.”
“왜 그러십니까?”
금잔화와 금령사자의 대화에 뭔가 이상함을 혈랑사자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직접 읽어 봐.”
보고서를 받아 그것을 읽던 혈랑사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말이 되고 안 되고, 그건 의원들이 시신의 상처를 보고 구성한 보고서야. 결과를 받아 봐야 알겠지만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고수가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제가 직접 가 보겠습니다.”
“혈랑사자, 내가 아까 내린 명령 못 들었어? 어떤 고수인지는 모르지만, 또 혈랑무를 그렇게 잃을 수는 없다. 거기다 저들은 이미 반군의 중심에 들어갔어. 우선 두고 보면서 결과를 보자고. 그러니 돌아가서 팔의 상처부터 다 나은 후에 와.”
질책하듯 말하는 금잔화의 얼굴도 그리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 * *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피난민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악 무사님, 원나라 군사들의 시체가 상당히 많이 보여요. 시체조차 처리 못한 듯, 썩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합니다.”
마차의 앞 창문이 열리며 추국이 말을 걸었다.
“그러게 말이다. 시체를 저렇게 방치하면 역병이 번질 수도 있는데, 걱정이다.”
“아가씨께서, 예상보다 유복통의 군세가 강력한 것 같은데 그들 사이를 뚫고 가는 것이 옳은 판단인지 모르겠다고 걱정하세요.”
“아가씨는 무조건 옳은 판단을 하신다. 옳지 않아도 내가 옳게 만들 것이니, 아가씨께 걱정 마시라고 해라.”
악불군의 말에 추국은 입까지 살짝 벌렸다.
‘야! 진짜 남자 중의 남자구나. 멋있다.’
추국은 존경스러운 눈으로 악불군의 뒷모습을 보더니 창문을 닫았다.
그때 앞에서 등에 봇짐을 멘 상인 한 명이 다가왔다. 얼굴에 수염이 났고 걷는 모습까지 영락없는 남자였지만, 매향과 함께 척후대를 맡은 변장한 잠봉단원이었다.
[앞쪽에 대규모 검문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거리에서 하고 있더냐?]
[여기서 반 마장 정도 앞에서 하고 있습니다.]
[몇 명이나 되는 것 같더냐?]
[적어도 오백 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알았다. 별일 없겠지만 만약 변수가 생길 수도 있으니 그땐 약속된 장소로 오라고 해라.]
[예.]
모른 척 마차를 지나친 잠봉단원은 옆에 있는 숲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로지 우리뿐이야. 아니, 나 혼자만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악불군 힘내라! 아가씨의 안전은 네게 달렸다.’
그동안 잠룡세가 안에서만 있어서 모르고 살아오다가, 겨우 며칠의 강호행을 통해 당금 천하가 얼마나 힘들고 혼란한지를 알게 된 것이다.
거기다 담무룡의 마지막 명령을 반추한다면, 종리화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들을 도울 사람은 전혀 없었다.
입술을 굳게 다물며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우던 악불군은 말의 속도를 줄였다.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원나라 군사들과 얼마나 다를지 기대되는군.’
원나라는 대 제국을 이룬 나라답게 군사들이 대단히 강압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장강 이남의 한족에게 유난히 강력했다.
한 가지 의아한 것은 피난민이었다. 반란군은 같은 한족이었다. 그런데 왜 피난민들이 반란군을 피해 남하하고 있을까…….
그 와중에 마차를 본 사람들은 분분히 마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피하기 시작했다.
양민들의 무림인에 대한 공포를 보여 주는 방증이었다.
‘그냥 기다려도 되는데…….’
악불군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기다리는 것이 그들을 더 불편하게 할 것 같아서였다.
“추국, 아가씨께 안전띠를 매 드려라.”
검문을 하는 군인들과 가까워지자 악불군이 담수련에게 주의를 주었다.
“알았습니다.”
“멈춰라!”
드디어 검문을 하는 자들 앞에 도착하자 장비 수염을 가진 장수 하나가 손바닥을 내밀며 소리쳤다.
장수의 얼굴을 본 악불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의 얼굴에 야비함과 욕심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잘못하면 쉽게 지나가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악불군은 시작부터 일이 잘 안 풀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표정이 살짝 굳었다.
장수는 탄탄한 무공으로 낭인들 중 제법 이름을 날리던 황규왕이라는 자였다.
오랫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는 운이 좋게 유복통을 위기에서 구해 주면서 그의 수하가 되었다. 그러다 원나라와의 전쟁에서 몇 번의 큰 공을 세우고는 오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장군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심성이 대단히 나쁜 편이었다. 그런 자에게 권력까지 생기자 그 악행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문제는 유복통의 수하 장수 중 황규왕과 같이 심성이 안 좋은 자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었다. 유복통이 심성을 보지 않고 자신의 싸움에 도움이 되는 자들만 끌어모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악불군의 마차를 주시하던 그의 눈이 백설에게 향했다. 그리고 곧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보통 말이 아니란 것을 즉각 알았기 때문이었다.
“무림인이냐?”
“그렇습니다.”
“난 무림인이고 뭐고 저항하면 다 죽인다. 그러니 무림인이라고 특별대우를 받을 생각은 하지 마라.”
“그냥 지나가는 길인데 특별대우를 받을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악불군이 생각보다 공손하게 굴자 회심의 미소를 지은 황규왕은 백설을 보며 물었다.
“말이 마차를 끌기에는 아깝구나.”
“대단한 말이기는 하지요.”
“말은 어디서 샀느냐?”
“이런 말은 산다기보다는 인연이 닿았다고 해야겠지요.”
“내 말도 상당한 명마로 마차 정도는 너끈하게 끌 수 있는데, 어떤가. 내 말하고 자네 말하고 바꿀 생각은 없나? 내가 은자 열 냥도 같이 얹어 주겠네.”
황규왕은 노골적으로 말이 탐난다는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죄송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악불군이 단칼에 거절하자 황규왕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흥! 무림인이라고 했는데, 이름은 뭐냐?”
황규왕의 말투가 거칠어졌다.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처음 듣는 이름인 것을 보니 무명소졸이군.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냐?”
“아가씨를 모시고 호북으로 가는 길입니다.”
“아가씨?”
‘건방진 놈! 일개 마부 놈이 감히 내가 원한다는데 거절해? 네놈이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곧 알게 해 주지.’
황규왕은 마차에 여인이 타고 있다는 말에 음흉한 마소(魔笑)를 지며 속으로 중얼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마차를 보니 꽤 귀한 집안의 여인 같은데, 무림세가의 여인이냐?”
“귀하신 분입니다.”
악불군의 대답에 황규왕의 얼굴에 다시 분노가 어렸다. 자신의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대답이었기 때문이었다.
“내 앞에서는 귀한 분이라는 것은 없다. 마차에서 나오라고 해라.”
황규왕의 말에 악불군의 검미가 살짝 좁아졌다.
어떤 부조리도 참을 수 있는 악불군이었지만, 담수련을 건드리는 행동만은 절대 참지 못했다.
한마디로 담수련은 그의 역린이었다.
‘어쭈? 이 자식 봐라…….’
악불군의 표정 변화를 본 황규왕의 얼굴이 점점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악불군의 다음 말이 그의 화를 더 돋우고 말았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나오라면 나오는 거지, 뭔 말이 그렇게 많은 거냐?”
황규왕은 지금 백설이 무척이나 탐났다. 백설을 뺏기 위해서는 뭔가 트집을 잡으려고 하던 그에게 아가씨라는 존재는 좋은 먹이감이었다.
그런데 악불군이 그의 화까지 돋우니 아주 잘됐다는 표정이었다. 굳이 자신의 말을 주고 돈까지 줄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단지 길을 지나고 있을 뿐인데 이런 압박을 가하시다니, 좀 심하신 것 같습니다. 장군께서 이러시는 것을 유 대장군께서도 아십니까?”
악불군이 입에 담은 자는 지금 안휘 북부를 거점으로 대규모 군사 반란을 주도하고 있는 유복통이었다.
“이런 건방진 놈을 봤나! 감히 지금 대장군님을 입에 담다니, 정말 죽고 싶으냐?”
그 외침과 동시에, 주위에 있던 군사들이 마차를 포위하며 창을 겨눴다.
무림인들이 군부와 싸움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창과 활이었다.
창은 대단히 강력한 무기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림인 중 창을 주 무기로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창이 너무 길어 휴대가 어렵고, 좁은 공간에서의 대응이 검이나 도에 비해 제약이 많아서였다.
더욱이 빠른 보법을 가지고 있는 무림인들에게 찌르기에만 특화된 창은 무용지물일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군부처럼 대량의 군사가 창을 겨눌 경우는 달랐다.
수백 수천의 군사가 포위를 하고 창을 겨누고 다가서면 빠른 보법이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 수가 더 많아질수록 신법으로 그들의 머리 위를 넘어 도망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활은 더욱 무림인이 꺼려하는 무기였다.
역시 하나하나의 화살은 무림인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지만, 수백 수천의 화살이 동시에 날아온다면 그것을 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었다.
“후회하실 일을 만드시는군요.”
황규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정도 되면 알아서 기어야 하는데, 악불군은 여전히 마부석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있었다.
강호에서 낭인 경험이 있던 그는, 무림인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렇게 뻣뻣한 경우는 세 가지 이유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는 스스로가 강하다고 자부하는 경우였다. 하지만 악불군은 강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곳에 있는 수백의 군사들을 무시할 정도의 실력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는 뒷배가 든든한 경우였다. 하지만 지금 반란군이 장악한 이 지역에서는 기존의 어떤 뒷배도 통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강호 초출의 무림인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자신감이었다.
처음 강호에 나오는 후기지수들이 가장 많이 죽는 이유는 자신이 무적이라도 되는 줄 착각한다는 것이었다.
“만용은 그대로 죽음인 곳이 바로 강호라는 것을 모르는 애송이구나.”
“지금 원나라 군사와 치열하게 전쟁을 하는 중이라고 들었는데, 왜 이런 사소한 일로 문제를 만들려고 하십니까?”
“난 이곳의 치안을 담당하는 오백부장이다. 원나라의 첩자들이 얼마나 많이 횡행하는데, 어찌 이게 사소한 일이라는 것이냐?”
“저희가 첩자라는 말입니까?”
“그것은 조사해 보면 알 일이다.”
악불군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최대한 좋게 끝내고 싶었지만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장군님, 사소한 욕심으로 명성에 흠집을 내는 과오는 벌이지 마십시오.”
“뭐, 뭐야? 이런 건방진 놈이!”
대노한 듯 소리친 황규왕은 손을 들어 공격 명령을 내리려고 했다.
그러자 주위에 포위하고 있던 창을 든 군사들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섰다. 반항하면 공격을 하겠다는 경고였다.
그러자 주위에 있는 양민들이 급급하게 뒷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싸움이 나면 죄도 없이 창에 찔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규왕은 담수련을 건드리려고 한 것이 얼마나 큰 실수인지 몰랐다.
“흡!”
손을 내려가던 황규왕이 짤막한 침음성을 터트리며 마비라도 되듯 멈춰 버렸다.
언제 손을 썼는지 느낄 사이도 없이 악불군의 검이 그의 입안으로 들어와 목젖을 살짝 건드리며 멈춘 것이다.
말하는 와중에 이빨도 건드리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들어온 검이 목젖에 닿으며 멈춘 것은, 목을 꿰뚫어 버린 것보다 더욱 놀라운 수법이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제가 검을 살짝 비틀기만 해도 죽습니다.”
몸을 뒤로 빼 자신의 입안을 파고든 악불군의 검을 빼내려던 황규왕은, 악불군이 검을 살짝 돌리자 급히 멈추고 말았다.
“이, 이, 이…….”
황규왕은 차마 말은 못하고 분노에 찬 눈으로 악불군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악불군은 그의 지금 상황에 대해 전혀 관심도 없었다.
“분명 몇 번에 걸쳐 경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장군께서 제 경고를 너무 우습게 보신 결과가 이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