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52화>
52화. 북으로……(1)
악불군의 말에 황규왕은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백여 명의 군사들이 포위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악불군의 눈은 정말로 자신을 죽일 수 있어 보였다.
더구나 자신과 악불군과의 거리가 꽤 됐음에도, 그의 검이 입을 뚫고 들어올 때까지 몰랐는지도 의아했다.
지금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제압을 당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군사들에게 뒤로 물러서라고 수신호를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쓸데없이 수하들만 죽습니다. 현명한 지휘자는 자신의 수하들이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으, 으, 이, 이…….”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악불군을 노려보며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이상한 소리를 내던 황규왕은, 악불군의 눈빛이 차가워지자 결국 손을 들어 흔들고 말았다.
군사들이 뒤로 몇 걸음 물러서자 악불군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포위를 푸는 것입니다. 여기서 버티시면 명예도 잃고 잘못하면 목숨까지 잃게 됩니다. 지금의 지위까지 올라온 것이 자랑스러우실 텐데, 죽으면 너무 아깝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런 꼴을 수하들에게 보인 것만도 그의 출세에 치명적인 하자일진대, 목숨까지 잃는다면 너무 억을 했다. 결국 그는 포위를 풀라고 수신호를 보내고 말았다.
“나를 추격하거나 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장군은 욕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오래 살기 어려울 것입니다.”
포위망이 풀리자 악불군은 약간은 비아냥거리는 말을 남기고는 백설에게 전음을 날렸다.
[백설아, 오늘 마음껏 달려 보자.]
놀랍게도 악불군의 전음을 들은 백설은 기다렸다는 듯 앞발을 하늘 높이 치켜드는가 싶더니 빠르게 땅을 박차며 튀어 나갔다.
악불군은 동물들과 교감을 느끼는 능력을 십분 이용하여 그동안 백설에게 여러 가지 단어를 공부시켰다.
그리고 백설은 악불군의 명령을 모두 정확하게 따르며 믿음을 주었다.
히이이힝!
털썩!
검이 입에서 빠짐과 동시에 백설의 움직임에 놀란 말이 발버둥을 치면서 땅에 떨어진 황규왕은 어찌나 얼어 있었는지 그대로 철퍼덕 땅에 처박히고 말았다.
얼굴을 붉히며 벌떡 일어선 황규왕은 모두를 보며 커다랗게 소리쳤다.
“뭐 하는 거냐! 당장 추격해라!”
황규왕은 분노의 외침에 말을 탄 몇몇 부장들이 뒤를 따르는 시늉을 했지만, 속도 차이가 너무 나서 곧 돌아오고 말았다.
“장군님, 말이 너무 빠릅니다.”
황규왕은 분노에 몸을 부르르 떨더니 다시 소리쳤다.
“본진에 연락해서 첩자로 보이는 자들이 양우현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연락해라. 반드시 사로잡으라고 해라. 보기 드문 백마에 군마처럼 마갑(馬鉀)까지 걸치고 있는 말이 끄는 마차이니, 찾기는 쉬울 것이다.”
“알겠습니다.”
부장은 여전히 군례를 하며 대답했지만, 황규왕은 자신의 권위가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 * *
삼 마장 정도를 달린 악불군은 추격을 따돌렸다고 판단한 듯 산 쪽 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다시 반 마장 정도 달린 후 공터가 나타나자 마차를 멈췄다.
“수고했어.”
푸루루루!
백설은 악불군이 엉덩이를 손으로 톡톡 치며 칭찬하자 마치 아니라는 듯 푸르르거렸다.
백설의 속도는 기대 이상이었다. 만약 마차의 바퀴만 버틸 수 있었다면 정말 바람처럼 달렸을 것이었다.
그때 마차의 문이 열리며 담수련과 추국이 밖으로 나왔다.
“아가씨께서 좀 답답하시다고 하십니다.”
추국의 말에 악불군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담수련 앞에 섰다.
“어디 몸이 좀 안 좋으십니까?”
“내가 몸이 약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아. 그런데 삼화는 괜찮을까?”
“이럴 경우를 생각해서 다음 만날 장소를 약속해 놓았으니 거기서 만나면 될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소군이 왜 죄송해?”
“제가 최대한 참았어야 하는데 일을 크게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그자가 백설이 탐나서 일부러 건 시비야. 소군 잘못은 없어. 대공의 추적만 피하려고 이쪽으로 가자고 한 내가 더 잘못한 거지.”
“아닙니다. 아가씨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그리고 대공의 수하들보다는 유복통의 군사들이 대처하기가 더 쉽습니다.”
“잘못하면 양쪽의 추격을 동시에 받을 수도 있어.”
“어차피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닥치는 대로 그때그때 대응을 해야지요.”
“아니야. 그런 식의 대응은 너무 위험해. 그래서 내가 오면서 생각해 보았는데…….”
담수련은 잠시 말을 멈췄다.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신 것입니까?”
“당장은 아니야. 하지만 시간만 더 있다면 이번 일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바꿀 수 있는 방법을 만들 수 있을 거야.”
“가주님께서는 아가씨께서 각성하시면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 그 말씀을 믿습니다. 아직 상황은 제가 예상한 정도일 뿐, 최악은 아닙니다. 그러니 천천히 생각하십시오.”
오음절맥은 음의 기운이 너무 강해 온몸이 차갑다. 특히 뇌가 차가워 다른 누구보다도 뇌를 많이 사용할 수 있었다.
오음절맥을 가진 자들이 대부분 천하를 울리는 천재인 이유였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남자였다. 몸은 극도로 허약하고 단명을 하긴 하지만, 몸에 선천적으로 지닌 양기가 그들에게 사오십 대 이상의 수명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천적인 음기를 지닌 여인은 달랐다. 머리는 남자들보다 더 뛰어났지만 수명은 극도로 짧아, 길어야 십오 세, 이십 세 이상 살면 장수했다고 할 정도였다.
그녀는 강호에 나온 후에도 모든 것을 소극적으로 행동했다. 하지만 열흘 가까이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을 보며 조금씩 변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모든 상황을 나름대로 분석하고 이럴 때 어떤 대응 방식이 좋겠다며 스스로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다만 아직 경험이 적고 천성적으로 너무 착해 자신의 생각을 아직 겉으로 표명하지는 않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본격적으로 머리를 사용하기 시작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 분명했다.
“미안해, 소군. 도움도 되기는커녕 소군을 어렵게만 하고…….”
담수련은 백설의 털에 재를 섞은 오얏즙을 바르고 있는 악불군을 보며 중얼거렸다.
눈처럼 하얀 털이 사람의 이목을 끌 수 있어, 만약을 위해 색을 바꿀 생각으로 미리 준비해 뒀던 것이다.
그때 추국은 마차에 붙어 있던 여러 장식과 나무들을 뜯어내고 있었다.
순식간에 백설과 마차의 모양을 바꾼 악불군은 담수련을 보며 말했다.
“이제 상당히 오랫동안 가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불편하거나 쉬시고 싶으시면 말씀하십시오.”
담수련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스스로를 믿으십시오. 아가씨라면 분명 좋은 방법을 생각하실 겁니다. 그리고 아가씨의 판단은 제가 생각해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악불군이 위로하자 담수련은 고맙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마치 비를 맞은 수련꽃처럼 청순했다.
그녀의 모습에 악불군은 갑자기 가슴이 요동치자 깜짝 놀라 숨을 깊게 들이쉬며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추국, 출발하자! 아가씨를 안으로 모셔라.”
“예!”
* * *
“언제 들어온 정보냐?”
독갈적수의 보고를 받은 사도비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 왼쪽에는 이마에서부터 입술 옆까지 길게 흉칙한 자상이 뚜렷하게 그어져 있었다.
“저희가 구한 정보가 아니라, 금령군주가 부탁을 해 온 것입니다.”
“금령군주?”
사도비류는 그 와중에도 금령군주의 아름다운 눈과 금발을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 계집의 얼굴을 봐야 하는데…….’
“아무래도 담수련을 인질로 잡고 담무룡을 협박하려고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담수련이 왜 나온 것이냐?”
“그것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금령군주가 우리에게 부탁할 정도면 뭔가 있다는 말 아니냐? 담수련이 누구와 같이 나왔다고 하더냐?”
“남자 호위 한 명만 데리고 나왔다고 합니다.”
“남자 호위!”
사도비류가 극렬한 살기를 뿜어내며 벌떡 일어섰다.
“소가주님께 상처를 입힌 그놈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상관없다. 그놈이 있다면 찢어 죽이면 되고, 담수련만 취한다 해도 내게는 횡재가 아니겠느냐? 당장 추적단을 조직해라.”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금령군주가 보내온 정보에 의하면 담수련은 지금 안휘 북부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지금 유복통이 이끄는 반란군의 본영이 있는 곳입니다.”
잠시 생각하던 사도비류의 입가에 비소가 나타났다.
“금령군주, 그렇게 안 봤는데 잔머리가 대단하구나. 담수련을 미끼로 우리를 반란군의 세력으로 들어가 싸우게 만들려는 것이군. 상관없다. 당장 떠날 것이다. 준비해라.”
“어느 정도로 조직할까요?”
“마룡흑영단과 마룡살영단 각각 이십 명으로 조직하면 충분할 게다.”
“존명!”
독갈적수가 나가자 사도비류의 얼굴에는 미소가 나타났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자상 때문인지 그 미소는 더욱 살벌하게 보였다.
“담수련…… 네가 스스로 나오다니 하하하하하! 하늘이 나 사도비류를 돕는 것이 분명하구나.”
* * *
태진성은 아버지 태웅천의 부름에 정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군사인 제우환이 함께 있는 것을 보자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또 당가의 잔당들이 나타난 것입니까?”
오룡세가의 한 곳인 태룡세가는 당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천의 맹주로 군림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당가는 지하에 숨어 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진성아.”
“예!”
“담수련이라고 들어 보았느냐?”
“천하제일미라고 불리는 잠룡세가의 천금의 이름이 담수련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태진성은 담수련의 성인식 때 가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담수련이 잠룡세가를 나와 지금 안휘 북부로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태웅천의 말에 태진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그녀의 동선을 자신에게 가르쳐 주는 이유를 몰라서였다.
“무슨 일이 있는 것입니까?”
“잠룡세가와 대공 간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대공께서 잠룡세가의 가주를 무척이나 신임했다고 들었는데 의외이군요. 그런데 담 소저는 왜 잠룡세가를 나온 것입니까?”
“대공이 잠룡세가를 제거할 결정을 했다고 봐야겠지. 그에 피신을 시킨 모양이다.”
“불과 얼마 전에 성인식이라 들었는데, 빠져나오고 바로 걸리다시피 하다니, 대공의 정보망이 정말 대단하군요?”
“금령군주가 본 가에 담수련을 추포해 달라고 부탁을 해 왔다.”
“어찰단 혈랑무의 추적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들었는데, 거리도 먼 우리에게 그런 부탁을 하다니 이해가 안 됩니다.”
“거절할 명분도 없다.”
“저 보고 움직이라 하시는 것입니까?”
“지금 태룡암영단의 단주가 너니까.”
“태룡암영단을 데리고 나가라는 것입니까? 지금 중원 전체의 상황이 녹록치 않은데, 저와 본가의 정예가 빠지는 것은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닌 듯싶습니다.”
“담수련이 지금 움직이는 동선이 반란군의 점령 지역이다. 다른 수하들은 걸리기 쉽다. 반란군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은 우리도 부담이 너무 크다. 그리고 담수련을 데려오려면 너 정도는 나가야 급이 맞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모든 정보를 정리해서 주시면 오늘 중으로 출발하겠습니다.”
태진성이 나가자 태웅천은 학사모를 쓴 중년인을 보며 물었다.
“제우환, 네가 말한 대로 진성이를 보내기는 했는데 잘한 일인지 모르겠구나.”
“금령군주께서 본 세가에만 연락을 했을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세가에서 소가주들이 나올 확률이 큽니다. 다른 이들로는 그들을 상대할 수 없습니다.”
“내 말의 의미는 진성이 말마따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 대놓고 대공을 돕는 것이 잘하는 판단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태웅천이 담수현의 성인식에 태진성을 보내지 않은 이유는 오룡세가와의 친분을 굳이 과시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가주님, 아직은 대놓고 대공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무리입니다. 하지만 지금 천하의 정세를 보면 곧 윤곽이 드러날 것입니다.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그럼 우리가 손을 잡아야 할 세력이 어딘지 알 수 있습니다.”
중원의 최서쪽에 자리 잡은 사천의 맹주, 태룡세가는 자신들의 영화를 계속 이어 가기 위해 새로운 끈을 모색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