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53화>
53화. 북으로……(2)
안휘 북쪽을 통해 호북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최소한 일주일의 시간이 필요했다.
악불군에게 창피를 당한 황규왕은 유복통을 암살하기 위해 원나라에서 보낸 자객 같다고 보고를 올렸다.
유복통은 당연히 자신의 세력권의 모든 무림인에 대한 검문검색을 강화하라 지시했고, 특히 신분이 확실치 않은 자들은 무조건 추포하라고 명을 내렸다.
악불군과 황규왕과의 충돌이, 뜻밖에도 악불군을 쫓는 자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생각지 못한 효과가 생긴 것이다.
“소가주님, 담수련이 합비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반란군 놈들이 너무 설치고 다녀서 추격에 상당히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보고를 들은 철무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창밖을 보며 물었다.
“정확한 정보냐?”
세가에 돌아와서도 담수련의 생각에 집중을 못하던 철무정은, 담수련이 잠룡세가를 나갔다는 말을 듣자마자 수하들을 이끌고 달려왔다. 다행히 철룡세가는 안휘와 가장 가까웠다.
“담수련과 같이 움직이는 우리 측 첩자가 있습니다. 그녀가 남긴 표식이 합비 방향이라고 합니다.”
“지금 숨어서 다녀도 시원찮을 판에, 안휘에서 가장 큰 합비로 간다?”
철무정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합비는 안휘의 성도로 유복통의 본진이 있는 곳에서 아주 가까웠다.
잠시 생각을 하던 철무정의 눈에 수십 명의 군병이 그들이 있는 주루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귀찮은 놈들이 오는군. 알았다. 우선 이곳을 떠난다.”
말을 마친 철무정이 사라지자 그 뒤이어 수하들도 같이 사라졌다.
무림인이 있다는 말을 듣고 달려온 반란군의 병사들은 주루를 이 잡듯 뒤졌지만 아무도 발견할 수 없었다.
* * *
관도에서 한참 벗어난 한적한 산길.
작은 간이 주막 앞에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마부석에서 내린 악불군은 주위를 주욱 살피더니 마차의 문을 열었다.
“내리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추국이 먼저 내리고 그 뒤를 이어 담수련이 내렸다. 둘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했다.
반란군의 검문에서 충돌 이후 사흘 동안 계속 마차 안에서 건식만 먹고 지냈기 때문이었다.
“이런 곳에 간이 주막이 있네?”
“그러게요? 악 무사님, 좀 수상한 것 같지 않으세요?”
담수련의 말에 추국도 동의한다는 듯 답하고는 악불군에게 물었다.
“당연히 수상하다.”
주위를 살핀 악불군은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주위에 특별하게 수상한 기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한적한 곳에 간이 주막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수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피하는 것이 맞지 않았을까요?”
“그러는 것이 맞긴 하지. 하지만 먹을 것이 떨어졌는데, 수상하다고 주루를 그냥 지나갈 수는 없지 않겠느냐?”
그때 악불군의 눈에 창문 너머로 자신을 주시하는 한 명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는 악불군과 눈이 마주치자 언제 보고 있었냐는 듯,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어서 오십시오.”
“식사 됩니까?”
“물론이지요. 생긴 것은 좀 이상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맛있는 음식을 제공합니다. 빈자리 아무 곳에나 앉으십시오.”
점소이 겸 주방장이자 주인인 중년인은 텅 빈 의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가장 잘하는 요리 몇 가지하고 육포와 벽곡단 열흘치만 준비해 주시오.”
“어디 가시나 보지요?”
“여행 중입니다.”
“황산에서 오셨습니까?”
“저희는 황산은 구경한 적도 없습니다.”
중년인은 악불군의 말에 실망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모두를 살피더니 다시 말했다.
“이 길은 보통 사람들은 여간해서 사용을 하지 않는데, 용케도 오셨습니다?”
주인은 추국과 담수련을 슬쩍 보더니 한마디 더했다.
“호북으로 가는 지름길이 있다는 말을 듣고 들어섰는데, 상당히 복잡하군요.”
“호북으로 가는 중이면 제대로 찾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마차가 움직이기 힘든 곳이 좀 있는데…….”
주인은 이번에는 백설과 마차를 보며 이상하다는 듯 말을 흐렸다. 사실 가는 중이 아니라 오는 동안에도 마차가 다니기 힘든 지역이 여러 곳 있었기 때문이었다.
“좀 험하기는 했지만 노력하니까 다 되더군요.”
악불군의 말에 주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마차가 지나기 힘든 길이 노력한다고 지날 수 있는 길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음식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주인은 꾸벅 허리를 숙이더니 안으로 사라졌다.
“악 무사님, 저자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요?”
추국은 중년인의 등을 보며 물었다.
“이런 곳에 누가 온다고 간이 주막을 만들어 놨겠느냐?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자겠지.”
“누구를요?”
“난들 알겠느냐? 괜한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빨리 먹고 건식을 챙겨서 떠나야 할 것 같다.”
“어머, 백설이가 어디로 가고 있어요? 고삐가 풀렸나 봐요?”
추국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마음껏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먹고 오라고 내가 풀어 줬다.”
“하지만 말들은 자꾸 자유롭게 풀어 주면 도망갈 수도 있다고 하던데요?”
“안 오면 더 행복한 곳이 있다는 말이니까 그것도 괜찮지, 뭐.”
백설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불안한 표정으로 말하는 추국을 보며 담수련이 답했다.
“아가씨, 백설이 없으면 마차를 누가 끕니까?”
“말은 또 살 수 있잖아?”
“백설 같이 빠르고 지치지 않는 말을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요?”
아닌 게 아니라 백설은 사람 셋에 다른 마차보다 많이 무거운 담수련의 마차까지 몰면서도 뒤를 쫓는 유복통의 군사를 가뿐하게 따돌릴 정도였다.
“백설은 내 친구야. 백설이 나를 도와준다 생각하지, 힘 좋은 일꾼을 쓰고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어. 그러니 추국, 너도 생각 바꿔. 그렇지 않으면 백설이하고 영원히 친해질 수 없을 거야.”
“아가씨는 너무 이상적이세요. 백설이 귀한 말이긴 하지만 결국 동물인데 어찌 친구가 되겠어요? 안 그래요, 악 무사님?”
“동물은 친구가 되면 절대 배신을 하지 않는다. 백설은 아가씨께 좋은 친구가 분명하다.”
악불군의 답에 추국은 자신의 머리를 툭 쳤다.
“이 바보! 악 무사님은 언제나 아가씨의 편인 걸 알면서, 쯧!”
“언제나는 아니다.”
“그럼요?”
“무조건이다. 그리고 아가씨의 말은 틀린 적이 없다.”
추국은 더 할 말을 잃은 듯 고개를 돌렸고, 담수련은 살짝 미소를 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소군. 내가 오는 동안 계속 상황을 분석해 보았는데, 검문을 하던 장수와 시비가 벌어진 것이 어쩌면 우리에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렇습니까?”
“그동안 반란을 일으킨 자들은 꽤 많아. 하지만 대부분은 원나라의 어철단에 의해 암살을 당했어. 유복통 같이 큰 세력을 가진 자들의 특징은 무림인들과 연계를 했다는 거야. 즉, 무림인들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다는 거지.”
“하긴, 무림인들의 조력이 없다면 아무리 군사가 많다 해도 그들의 혈수를 막아 내기는 힘들 겁니다.”
“소군과 시비가 붙었던 자는 자신이 당한 창피 때문에라도, 소군이 유복통을 노리는 대단한 고수라고 보고를 올렸을 거야. 그렇다면 안휘 북부의 경계는 아주 심해질 거고, 결국 우리를 쫓는 자들도 행동에 제약을 받지 않겠어?”
“듣고 보니 아가씨 판단이 맞을 것 같습니다.”
“무조건 동조하지 말고 소군의 생각을 말해 봐.”
“전 아가씨께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아가씨의 분석은 아주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소군이 그렇게 말해 주니까 힘이 좀 나네.”
“누군가 오고 있습니다.”
담수련의 미소를 보며 같이 기분 좋아하던 악불군이 갑자기 조그맣게 말했다.
그리고 반각쯤 지나자 네 명의 장사꾼들이 숲에서 나왔다. 행색은 봇짐장수들이었지만 악불군은 그들이 무림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악불군을 보자 흠칫 놀라는 듯하던 그들은, 곧 태연한 표정을 지며 주루의 탁자에 앉았다.
그들은 악불군 쪽을 한 번 보더니 안을 향해 소리쳤다.
“주인장, 식사 되오?”
그러자 주방 안으로 사라졌던 중년인이 고개를 내밀더니 반갑다는 듯 소리쳤다.
“당연히 됩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요즘 사방이 너무 시끄러워서 장사도 안 되고 죽겠네. 소면하고 만두 좀 주시오.”
밖으로 나온 주인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술은 안 드십니까?”
“술도 한 병 주시오.”
“황산에서 오셨습니까?”
“우린 탕계산 쪽에서 왔소이다.”
순간 주인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그는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먼저 온 손님들이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둘의 대화를 듣던 악불군의 검미가 살짝 좁아졌다.
누가 보아도 손님과 주인이 나누는 평범한 대화였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소군.”
“예, 아가씨.”
“황산에서 오셨냐고 묻는 것이 무슨 암호 같지 않아?”
“아가씨께서도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아까 우리에게도 물었잖아? 이곳에서 황산은 꽤 먼데, 왜 같은 질문을 연달아 하겠어?”
“악 무사님, 우리를 추격하는 자들은 아니겠지요?”
추국이 약간 불안한 듯 물었다.
“우리를 추격하는 자들은 아니야. 풍기는 기운이 정명(正明)해. 먼저 시비를 건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굳이 우리가 먼저 나설 필요는 없다. 우리는 식량만 챙기고 떠나면 된다.”
“알았습니다.”
악불군이 추국에게 주의를 준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인 중 한 명이 악불군에게 말을 걸어왔다.
“강호를 떠도는 사람은 모두 동도라고 하는데, 이렇게 만나 것도 큰 인연인 듯하니 통성명이나 합시다. 난 호북 출신으로 진재기라고 합니다. 이쪽은 오동근, 윤칠, 추공삼이요.”
“전 절강 출신으로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악불군은 공손히 포권을 하며 받아주었다.
“이분, 소저들은?”
진재기가 굳이 모두의 이름을 장황하게 다 말한 것은, 악불군은 물론 추국과 담수련까지 이름을 말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함부로 이름을 말할 수 없는 분들입니다.”
하지만 악불군은 단칼에 잘라 버렸다.
“절강이면 지금 중원에서 가장 안전한 곳인데, 뭐 하러 이렇게 위험한 안휘까지 오셨소?”
“아직까지는 그렇게 위험하다는 생각은 안 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무림인답게 배짱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려!”
진재기가 커다랗게 웃자 악불군은 미소를 지며 반문했다.
“상인이십니까?”
“상인이라고 하기는 그렇고, 안휘성의 특산품을 조금 사서 다른 지역에 가서 파는 보부상이오.”
“그런데 무공도 상당하신 것 같습니다.”
악불군의 반문에 진재기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가 느끼는 악불군의 무공 수준으론, 절대 자신의 무공을 알아채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표정을 풀며 말했다.
“우리 같은 봇짐장수는 어디를 가든 위험한 자들을 만날 확률이 많지요. 그냥 호신 차원으로 약간 익힌 것뿐이오.”
“그렇다 해도, 보통 양민들은 이런 한적한 곳에서 저 같은 무림인을 만나면 무척 두려워하시던데 네 분께서는 많이 다르시군요?”
악불군의 의미심장한 질문에 진재기는 다시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맞소이다. 처음에는 저도 무림인을 보면 벌벌 떨었소이다. 하지만 강호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기게 되고 무림인들과도 친분을 갖는 인연도 생깁디다. 그래서 이젠 무림인을 만나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소이다.”
그러자 진재기 옆에 앉아 있던 추공삼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우리도 원나라 군사는 무서워합니다. 그놈들은 말이 통하지를 않아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을 할 수 없답니다. 그래서 우린 언제나 이렇게 은밀한 길만 찾아 돌아다니지요.”
“하긴, 군인들과 문제가 생기면 좀 귀찮기는 하지요.”
“그런데 여기는 우리 같은 봇짐 장사꾼들만 아는 길인데, 어떻게 마차까지 끌고 여기에 오셨소?”
진재기는 말이 없는 마차를 이상하다는 듯 보며 물었다.
“유복통의 군사와 시비가 좀 일어나 어쩔 수 없이 도망을 치고 있는 중입니다.”
진재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유복통의 세력 안에서 유복통의 군사와 시비가 생겨 도망을 친다는 말은 절대 자신들처럼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할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윤칠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우리가 합지 근처를 지나는데 유복통의 군사가 흰색 말이 끄는 마차를 찾는다고 난리던데, 혹시 그 사람이요?”
“아마 맞을 겁니다.”
분명 쉽게 할 수 없는 말임에도, 악불군은 태연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