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54화 (54/472)

<천검지애 54화>

54화. 만남

악불군의 말에 진재기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받았다.

“소협께서는 겁도 없으시구려. 지금 유복통의 군사가 얼마나 강성한데, 그들의 세력권에 들어와서 문제를 만든단 말이오?”

“그래 말이야. 동전 열 냥만 집어 줘도 그냥 보내 주었을 텐데 쯧!쯧!”

진재기의 말에 윤칠이 혀를 차자 오동근이 말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도망도 잘못 쳤소이다. 남쪽이나 서쪽으로 움직였어야 하는데 더 깊숙이 들어왔으니, 참!”

네 명의 상인은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 듯 한마디씩 던졌다. 하지만 여전히 악불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진재기는 담수련을 슬쩍 보았다.

‘얼굴을 가렸지만 풍기는 기운이 대단히 귀한 여인인데, 누구일까?’

진재기는 아까부터 담수련의 정체가 궁금했다. 궁장은 아니지만 비싸 보이는 옷에, 여간한 사람은 구경하기도 힘든 고급진 마차, 거기다 그녀 옆에 있는 시녀는 무공까지 알고 있는 듯했다.

“소협의 사문은 어떻게 되시오? 절강에서 왔다면 잠룡세가밖에 없는데?”

“전 사문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냥 막 배운 무공이지요. 지금은 마부 겸 아가씨의 호위 무사입니다.”

“그냥 호위 무사라는 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장사하시는 분이 무림인인 제게 궁금한 것이 너무 많으신 것 같습니다?”

“궁금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좀 특별한 행색이라서 그러는 거요. 강호를 이런 식으로 주유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기 딱이니까요. 아마 계속 이런 식으로 다닌다면 시비가 끊이질 않을 게요.”

“무엇이 특별하다는 것입니까?”

“소협 같은 분이 마부를 하는 것도 그렇고 마차도 그렇고, 하여간에 보통 사람하고는 여러 가지로 다르게 보인다는 말이외다.”

“하긴 좀 특이하게 보일 수는 있겠군요. 그런데 처음 보는 제게 그런 조언까지 해 주시다니, 참 친절하신 것 같습니다.”

“강호에서 독불장군은 생존하기 어렵소이다. 그래서 우린 서로 돕는 것이 생활화가 되어 있소이다.”

“대인들께서는 이 길을 자주 이용하시나 봅니다?”

“예전에는 상인들이 안휘와 호북을 잇는 지름길로 많이 사용을 했소이다. 하지만 근래는 사방에서 반군들과 원나라 군간에 전쟁이 심해서, 성과 성을 넘는 장사는 죽을 각오를 한 우리 같은 사람들만 하고 있지요.”

그때 숲속에서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진재기를 비롯한 모두는 급히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유는 모르지만 뭔가 상당히 경계를 하는 것을 악불군은 직감했다.

“새들이 장난치는 겁니다. 우리 근처에 사방 삼백 장 안에는 아무도 없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악불군의 말에 진재기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삼백 장이면 큰 소리를 쳐도 잘 안 들릴 거리인데, 그게 들린단 말이오?”

“무림인들은 들립니다.”

‘이자가 진짜 우리가 장사꾼이라고 믿고 허풍을 떠는 건가? 아니면 진짜 삼백 장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느꼈음인가?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인가…….’

삼백 장 안을 모두 감지한다면 최소한 내공이 일갑자는 넘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느낀 악불군의 내공은 넉넉잡아 삼십 년 정도에 불과했다.

[대형, 이자들은 그들과 연관이 없는 것 같소.]

계속 악불군을 주시하며 살피던 오동근이 진재기에게 전음을 보냈다.

진재기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주방 쪽을 보며 말했다.

“음식이 나오는 것 같으니 그럼 식사하시구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주인이 요리 접시를 들고 나왔다.

“이것들이 제가 가장 자랑하는 요리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가게는 이래도 맛은 좋습니다.”

주인은 요리를 악불군의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자 악불군은 품에서 바늘 하나를 꺼내더니 숙련된 동작으로 음식마다 세심하게 찔렀다. 독을 감지해 내는 은침이었다.

침에서 아무런 반응도 없자 악불군은 음식을 조금씩 자신의 접시에 덜어 자신이 먼저 먹었다.

“드셔도 됩니다.”

호위 무사들 중 유별나게 충성스러운 행동을 하는 자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보통은 그만큼 얻을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랬다.

하지만 악불군의 행동은 그녀를 진정으로 위하고 있음이 절로 보였다.

‘이자들의 정체는 뭐지?’

주인은 악불군의 행동을 보며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지만, 곧 담수련의 모습을 한 번 보고는 곧 얼굴에 미소를 지며 말했다.

“조심성이 많으시군요? 하긴 강호에 나오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음식이기는 하지요.”

“그러게 말입니다. 음식에 장난을 안 치신 것은 정말 잘하셨습니다.”

동문서답 같은 악불군의 말에 주인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이상하게 긴장하게 만드는 놈이군…….’

“그럼 저는 건식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그러십시오. 그리고 그것도 이 요리들처럼 깨끗하기를 바랍니다.”

“헤헤, 걱정 마십시오. 제가 청결에는 아주 신경을 많이 씁니다.”

주방으로 사라지는 주인을 보며 악불군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때 담수련이 입을 열었다.

“소군.”

“예.”

“저자 좀 수상한 것 같은데, 소군 생각은 어때?”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의아한 듯 물었다.

“저도 좀 수상해 보이긴 합니다.”

악불군의 답에 담수련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가 계속 주위를 살피고 악불군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이유는, 그녀 스스로 책략을 계속 수련하는 와중이기 때문이었다.

‘이자의 정체가 뭐지? 겉보기에는 나 정도의 무공을 지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 위압감을 준단 말이야…….’

아까부터 악불군을 조심스럽게 살피던 진재기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대형, 그들과 연관이 없다 해도 좀 수상하긴 하지 않습니까? 하필 이때 이곳에 나타난 것이 우연이라 보기에는 너무 절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에는 윤칠이 전음을 보냈다.

[나도 그게 좀 이상하긴 한데, 도대체 정체를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유복통의 군사들과 충돌을 일으킨 것으로 보아 원나라와 가까운 자일 수도 있습니다.]

[원나라와 가까운 자 같지는 않은데?]

진재기의 말에 주위를 경계하듯 계속 사방을 살피던 추공삼이 말했다.

[대형, 그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그래. 계속 시간을 끌 수는 없으니, 삼제가 안으로 들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물어보거라.]

[알겠습니다.]

진재기의 명을 들은 윤칠이 일어서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순간 악불군의 검미가 꿈틀했다.

‘같은 패가 분명하군. 하지만 서로 안면이 있는 자들은 아니야.’

“소군.”

식사를 하던 담수련이 말을 걸었다.

“예, 아가씨.”

“아무래도 저들이 아니고 우리가 불청객인 것 같아.”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들의 행동만 봐도 보이는데 뭐.”

정말이었다. 담수련이 머리를 쓰기 시작하면서 상대의 행동이나 목소리, 눈치만 봐도 그녀의 머리에서 상황이 쫙 그려지고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현명한 여인의 탄생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아직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저들, 누구한테 쫓기는 것 같아.”

이어지는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우리 때문에 시간이 지체된 모양인데, 그 와중에도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 것을 보면 나쁜 자들은 아닌 듯해. 그런데 저자들과 주인이 아는 사이 같은데 뭔가 좀 이상해…….”

담수련은 주막 주인에 대해 뭔가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뭐가 이상하십니까?”

“확실히 모르겠어. 그냥 그의 행동과 말투 같은 데서 이상함이 느껴져.”

악불군은 슬쩍 주방 쪽을 쳐다보았다. 그는 담수련의 말을 믿었다.

일각쯤 지났을까……

윤칠과 주인이 같이 주방에서 나왔다. 윤칠의 손에는 술병이 하나 들려 있었다.

주인은 대나무 광주리에 육포와 벽곡단을 담아 내왔다.

“빨리 만드셨군요.”

“지금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준비해 둔 것입니다. 하지만 양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긴, 산이 커서 빠져나가는 데 며칠은 걸릴 것 같긴 하군요. 그런데 이 산에는 산적은 없습니까?”

“예전부터 이 산에는 산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요? 이상하네요?”

“뭐가 말입니까?”

“삼십 명쯤 되는 자들이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는데, 그 기세가 마치 산적들 같아서 말입니다.”

악불군의 말에 주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때 진재기를 비롯한 네 명의 장사꾼이 벌떡 일어섰다.

“정말이오?”

진재기는 악불군을 보며 물었다.

“다시 보니 산적이 아니라 무림인들 같군요. 다가오는 속도가 굉장히 빠릅니다.”

진재기를 비롯한 모두는 악불군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안 되자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의심은 짧았다.

악불군의 말대로 다가오는 자들의 신법은 대단히 빨라서, 차가운 물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 만에 오십 장 이내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대형, 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그들도 느낀 듯 얼굴이 확 굳어진 오동근은 진재기를 보며 다급하게 전음을 보냈다.

[이쪽으로 오시오. 도망가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숨으시오. 다행히 아주 비밀스러운 장소가 있소이다.]

주막 주인이 주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전음을 날리자, 모두는 그 뒤를 따라 주방 안으로 사라졌다.

“악 무사님. 저자들의 무공이 저를 능가하는 것 같네요?”

무공을 알고 있다고 짐작은 했지만 무공 수위까지는 감지할 수 없었던 추국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쉿! 이제부터 절대 입을 열지 마라.”

악불군은 그녀의 말에 답 없이 손가락을 입에 대며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은 옷에 검은 두건을 쓴 자들 수십 명이 간이 주막 주위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경험이 상당히 많은 듯 민첩하게 무기를 빼 들고는 간이 주막 주위를 완벽하게 봉쇄했다.

포위망이 완성되자 정면이 열리며 원나라인 특유의 복장과 머리를 한 중년인이 네 명의 호위를 받으며 앞으로 나섰다.

[악 무사님, 어찰단이에요. 설마 우리…….]

추국은 중년인의 복장을 보자 불안한 눈으로 악불군에게 전음을 날렸다.

[우리를 추격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사히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쉽지는 않아 보이는구나.]

“어서 오십시오, 나리!”

주방에서 주인이 후다닥 뛰어 나오더니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인사를 했다.

“본 좌는 어찰단의 흑수영주다. 장사꾼으로 변복한 반역의 무리가 이쪽으로 왔다. 본 적이 있느냐?”

흑수영주는 커다랗게 물었다. 그런데 그의 행동이 이상했다. 주인에게 물으면서 수하들에게는 안으로 진입하도록 손짓을 한 것이다.

마치 진재기 등이 그곳에 숨은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곧 안에서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주인이 간세군.’

악불군은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즉각 감지했다. 그리고 절로 담수련에게 눈이 갔다. 주인의 수상함은 그녀가 먼저 눈치를 챘기 때문이었다.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은 흑수영주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자들에게 들어가라는 듯 손짓을 하고는, 떠나려는 듯 몸을 일으키는 악불군 일행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흑의인들 다섯 명이 악불군의 앞을 막아섰다.

“저희는 그냥 지나가는 행인입니다. 저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악불군은 담수련의 앞에 서더니 흑수영주에게 포권을 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네놈이 저 반역도들과 상관이 없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겠느냐?”

“저들이 지금 싸우는데 제가 돕지 않는 것이 증명 아닐까요?”

그러나 불운하게도 흑수영주의 눈에 담수련이 띄고 말았다.

‘저 계집은 누구지?’

쾅!

그때 간이 주막의 기둥 하나가 부서지며 흑의인들과 진재기 일행이 주막 밖으로 튀어나왔다.

“저놈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잡고 있어라.”

흑수영주는 악불군 일행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흑의인들에게 명령을 내리고는 진재기를 쳐다보았다.

주막을 간신히 빠져나온 진재기 일행은, 안쪽보다 더 많은 인원이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는 것을 보자 절망의 눈빛으로 변하고 말았다.

우두두둑!

순간 주막의 지붕이 내려앉았다. 대부분 대나무로 만든 간이 주막으로서는 꽤 오래 버텼다고 할 수 있었다.

“호북사걸, 오랫동안 네놈들을 추적해 왔는데 드디어 오늘 잡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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