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55화 (55/472)

<천검지애 55화>

55화. 호북사걸(1)

잔재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흑수영주가 자신들의 정체를 한 번에 알아채자 놀란 목소리로 반문했다.

“우리의 정체를 네가 어떻게 알았느냐?”

“어찰단의 정보망은 네놈들의 생각보다 광범위하다. 그래, 영웅회에서 네게 전달한 것이 무엇이냐?”

진재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절대로 어찰단이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이었기 때문이었다.

“네놈이 간세였더냐?”

진재기는 주막 주인을 보며 물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푹 숙일 뿐 답을 하지 못했다.

진재기는 윤칠과 오동근을 보았다. 윤칠은 버틸 만 했지만, 오동근은 이미 상당히 많이 다쳤는지 몸 전체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대형, 둘째 형님께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막내인 추공삼의 목소리에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 비장함이 가득했다.

[나와 삼제가 어떻게든 막을 테니, 너만이라도 도망을 쳐라.]

[우리 호북사걸은 같이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죽음만은 같이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을 치겠습니까?]

[우리 조직에 구멍이 생긴 게 분명하다.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면 더 큰 피해가 생길 수 있다. 준비해라. 우리가 공격을 시작하면 너는 왼쪽으로 몸을 날려라.]

진재기는 강하게 말하고는 검을 들어 올렸다.

그때 옆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딜 움직이느냐!”

악불군을 지키고 있던 흑의인 중 한 명이, 악불군이 움직이려 하자 소리를 친 것이었다.

흑수영주는 호북사걸은 이미 독 안에 든 생쥐라고 판단한 듯 악불군을 보며 물었다.

“왜, 가고 싶으냐?”

흑수영주는 비릿한 미소를 지며 물었다.

“우리는 상관없는 일에 연루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저 마차가 너의 것이냐?”

“그렇습니다.”

“말이 없는 마차라? 여기까지는 어떻게 왔느냐?”

“말은 있습니다. 지금 잠시 휴식하라고 풀어 주었을 뿐입니다.”

흑수영주는 악불군의 등에 숨어 모습을 감추던 담수련이 살짝 고개를 빼고는 자신을 보자 눈이 커졌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도착하는 순간부터 담수련에게서 풍기는 고아함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커다란 눈에 담긴 아름다움을 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 계집의 면사를 벗으라고 해라.”

흑수영주는 최대한 시비를 피하려고 노력하던 악불군의 역린을 결국 건드리고 말았다.

“아가씨, 아무래도 그냥 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헉!”

순간 악불군의 앞을 막고 있던 흑의인이 가장 먼저 짧은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악불군의 검이 그의 가슴을 그대로 뚫어 버린 것이다.

갑자기 자신의 동료가 죽어 넘어가자 나머지 네 명은 순간 잠시 어리둥절한 듯 서로를 보더니, 그제야 상황을 짐작했는지 악불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일류급 고수 네 명이라면 보통 고수들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악불군은 무려 담무룡과 맞먹는 비무를 한 고수였다.

악불군의 눈에 그들의 움직임은 한없이 느릴 뿐이었다.

“저놈을 죽이고 저 계집은 생포해라!”

흑수영주는 악불군의 앞을 막고 있던 수하들이 순식간에 모두 죽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진재기를 포위하고 있던 자들 중 반이 악불군에게 달려들었다.

흑수영주의 뒤에 팔짱을 낀 채 살기만 풀풀 날리고 있던 네 명의 무인도 악불군의 공격에 합세했다. 쉽게 상대할 고수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들이 흑의인들보다 강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악불군과 싸우기에는 그 격차가 컸다.

특히 악불군은 강호에 나오면서 스스로도 몰랐던 승부사의 기질이 발현되고 있었다.

그에 더해 담무룡이 악불군의 일취월장하는 무공을 보며 질투심까지 느꼈던 본연의 잠재력까지 나타나면서, 잠룡세가를 나오기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이, 이, 이게…….”

흑수영주의 얼굴은 완전히 탈색이 되어 버렸다.

아예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 더욱이 악불군이 사용하는 검법은 도대체가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초식도 안 보였고, 단지 이상한 자세를 취하며 검을 찌르고 베는 동작만 펼쳤는데 자신의 수하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버린 것이다.

특히 그를 지근에서 보좌하는 네 명의 합공은 그도 상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했다. 그런데 그들 역시 삼 초를 버티지 못했다.

“이런 일에 연관되기 싫었는데, 당신이 자초한 일이니 나를 원망하지 마십시오.”

악불군이 흑수영주를 향해 몸을 돌리고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자, 진재기를 포위하고 있던 수하들이 급히 몸을 날려 흑수영주의 주위를 감쌌다.

그리고 그 덕에 한숨을 돌리게 된 것은 진재기였다.

진재기와 추공삼은 급히 오동근을 부축하고는 지혈을 했다.

“좋다. 네가 떠나는 것을 허락하겠다.”

흑수영주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내린 채 다가오는 악불군을 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절대 해서는 안 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의 몸이 사라졌다.

환영전궁보였다.

흑수영주를 보호하던 어찰단 무사들 이십 명이 전멸하는 데는 반각도 채 걸리지 않았다.

“너, 너의 정체가 무엇이냐?”

왼쪽 어깨에 깊게 검상을 입은 흑수영주는 몸을 떨며 물었다. 절정 고수인 그가 마지막 발악조차 하지 못하고 몸을 떤다는 것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모르는 게 좋습니다.”

간단하게 말한 악불군은 그의 심장에 검을 그대로 박아 버렸다.

“컥!”

흑수영주는 짤막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앞으로 그대로 고꾸라져 버렸다. 모르는 사람들은 조금의 사정도 봐주지 않고 살수를 펼치는 악불군의 손속이 너무 잔인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죽이기로 마음먹은 이상 최대한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빠르게 죽이는 것은 악불군 나름의 상대에 대한 배려였다.

악불군은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는 주막 주인을 보더니, 검을 흔들어 묻은 피를 털어 내고는 검집에 꽂았다.

“건식은 이상이 없겠지요?”

“이, 이상 없습니다.”

주인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는 급히 답했다.

“이분의 처리는 당신들끼리 해결하십시오.”

응급치료를 끝내고 악불군을 보고 있는 진재기를 보며 한마디 한 악불군은 담수련 앞으로 가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처리했습니다.”

담수련은 악불군이 사람을 자신 때문에 죽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눈과 표정만 봐도 악불군의 마음까지 헤아리게 된 그녀로서는, 악불군의 눈에 담긴 고뇌를 보자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응, 수고했어.”

담수련의 그의 손을 잡으며 작게 말하자 악불군은 미소를 지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제 마차에 오르시지요.”

고개를 끄덕인 담수련과 추국이 마차에 오르자 악불군은 크게 휘파람을 불었다. 백설을 부른 것이다.

“네놈이 어떻게 우리의 신호를 알아낸 것이냐? 네 뒤에 있는 놈이 누군지 말해라!”

진재기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치며 주인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주인은 갑자기 입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일어나! 죽으면 안 돼!”

진재기는 주막 주인이 쓰러지자 급히 혈도를 찔렀다. 하지만 이미 독은 온몸에 퍼져버렸다.

“어떤 놈인지 알아낼 수 있는 기회를 또 이렇게 놓치다니…….”

진재기는 원통한 듯 중얼거리다가는 악불군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급히 악불군에게 달려가 포권을 했다.

“호북사걸 진재기가 구명의 은인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저들을 제거한 것은 저들이 아가씨께 무례를 저지른 죄 때문입니다. 당신들과는 아무 상관없으니, 구명의 은인이라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이유가 무엇이건 우리의 목숨을 구해 주신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지요.”

악불군은 이런 문제로 계속 대화하는 것이 거북한 듯 화제를 돌렸다.

“호북사걸이시면 호북에 대해서는 잘 아시겠군요.”

“거기서 태어나서 자랐으니 잘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호북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저 길을 따라가다가 보면 길이 두 갈래로 갈릴 것입니다. 그때 서쪽 방향으로 길을 타고 가면 됩니다. 그런데 말이 없는데 어떻게 가시려고…….”

의아한 듯 묻던 진재기는 급히 검을 들어 올리며 몸을 돌렸다. 뭔가 커다란 물체가 숲속에서 달려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괜찮습니다. 제 말이 오고 있는 것이니까요.”

악불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설이 숲속에서 튀어나왔다.

“서, 설총마?”

진재기는 백설을 보자 단번에 종류를 알아맞혔다.

“설총마를 아십니까?”

“어렸을 때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조련이 결국 안 되어, 아무도 이용하지 못하고 마구간에서만 지내다 죽고 말았지요.”

백설이 악불군의 앞까지 달려오더니 당연하다는 듯 마차 앞에 서는 것을 보고 진재기는 신기하다는 듯 답했다.

악불군은 백설에게 고삐를 채우더니 출발 준비를 했다.

“은인, 저희도 호북으로 가는데 같이 가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제가 마차가 쉽게 지나갈 수 있는 길도 알고 있습니다.”

진재기의 말에 악불군은 잠시 멈칫했다. 지리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안내자가 있는 것은 굉장히 유용했기 때문이었다.

“소군. 부상자도 있으신 것 같은데, 같이 가.”

그때 마차 안에서 담수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차 뒤에 세 명이 앉을 만한 공간이 있으니, 부상자는 뒤에 앉히십시오. 그리고 진 대협은 제 옆에 앉으면 되겠군요.”

“감사합니다.”

진재기는 포권을 하고는 아우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더니 곧 부상자들을 추공삼과 함께 부축해서 데려왔다.

뜻하지 않은 인연.

악연이 될지 선연이 될지는 그들도 아직 알 수 없었다.

* * *

“대공께서 긴급 서찰을 보내셨습니다.”

다급하게 뛰어 들어온 금령사자가 봉서를 바쳤다. 금잔화는 서찰을 보자마자 얼굴이 굳어졌다. 붉은색 봉투는 그녀도 본 적이 없었다.

봉투를 뜯어 낸 그녀는 안에 들어 있는 서찰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그리고 순간 그녀의 눈이 커졌다.

대공이 보내온 서찰은 그녀가 보낸 부검 보고서에 대한 답이었다.

“뭐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놀라십니까?”

금령사자는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담수련이 문제가 아니다. 혈랑무를 죽인 자가 누구인지 먼저 알아내고 반드시 생포하라고 하신다.”

“예? 그게 무슨……?”

“대공의 특명이다. 당장 어찰단에 연락해라. 그자를 찾아 생포하는 것이 제일 순위다.”

“존명!”

금잔화의 말에 금령사자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크게 소리치며 밖으로 나갔다.

“천륭검법이라……. 담수련은 무공을 익힐 수 없는 신체라고 들었는데, 담무룡이 과연 자신의 자식이 아닌 다른 자에게 천륭검법을 익히게 했을까?”

담수련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본 담무룡은 검보를 없애면 없앴지,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아니야. 아무리 천륭검법이 신묘하다 해도, 일 년도 채 안 됐는데 이런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어.’

금잔화는 자신의 눈을 조금도 흔들림도 없이 또렷하게 쳐다보던 악불군의 모습이 떠오르자 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 * *

악불군과 같이 마부석에 탄 진재기는 슬쩍슬쩍 악불군을 쳐다보다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는 우선 백설을 통해 대화의 물꼬를 틀 생각을 했다.

“설총마는 부르는 게 값이라 할 정도로 좋은 말인데, 이렇게 마차를 끄는 데 사용하다니 솔직히 좀 놀랍습니다.”

“난 말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리고 백설이는 평범한 말이 아닌, 친구입니다.”

‘확실히 특별한 분이군?’

진재기는 악불군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동물까지 친구라 칭하는 사람이 악인일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을 그는 경험상 알고 있었다.

“친구인 것을 모르고 제가 실수를 했군요. 그런데 은인께서는 호북의 어디로 가십니까?”

첫 대화가 어렵지, 물꼬만 트이면 그다음부터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도 모릅니다. 호북은 그냥 지나가는 곳이니까요.”

“호북은 지금 진우량이 꽉 잡고 있습니다. 거기다 그는 고수들도 많이 수하에 데리고 있으니, 되도록 시비는 벌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전 시비를 먼저 건 적은 없습니다. 제 목적은 아가씨를 최대한 조용히, 그리고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모시는 것이니까요.”

말하는 악불군의 눈빛은, 그의 신념이 어찌나 중요한지 보이는 듯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