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56화 (56/472)

<천검지애 56화>

56화. 호북사걸(2)

악불군의 답에 진재기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마차 안의 여인은 누구기에 이런 고수가 이렇게 충성을 바치는 것일까?’

보통 지위가 높은 세가는 마차에 그들을 알리는 표식이 있었다.

하지만 악불군이 이끄는 마차에는 아무리 보아도 그녀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없었다.

더구나 전투에서 본 악불군의 경지는 백대고수 중 상위에 들어갈 정도로 강해 보였다.

그런 고수를 마부로 부리는 담수련에 대해 궁금증이 이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정파건 사파건 공통적으로 특징이 있었는데, 무공이 강한 자는 절대 무공이 약한 자에게 충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정파에서는 무공이 강한 제자가 무공이 약한 장문인의 명에 복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전통이고 교육이었다. 그리고 문파에 대한 충성이지, 장문인에 대한 충성은 아니었다.

그러나 악불군은 분명 여인에 대한 충성이 분명했다. 다만 그 충성심이 너무 지극해서 충성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강하게 풍기고는 있었다.

“그럼 은인의 목적지는 어디십니까?”

정면만 보고 마차를 몰아가던 악불군은 고개를 돌려 진재기를 보며 반문했다.

“제가 어디로 가는지가 궁금하신 모양입니다.”

“지금 천하는 혼란의 시기입니다. 보통 이런 시대에 여러 영웅이 탄생하지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은인께서도 영웅의 풍모가 확실하게 있습니다.”

“전 영웅도 아니고, 그런 것에는 흥미도 없습니다. 그리고 진 대협과도 호북에 도착하면 더 이상 만날 일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 저에 대해 과도한 관심은 접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지금 그에게 진재기 일행은 호북으로 가는 지름길을 안내하는 것을 빼면 크게 관심이 없었다.

‘큰 희생 없이 돌아올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자신의 계획으로 삼화 중 한 명은 큰 위험에 봉착할 수도 있었다.

* * *

소호 북단의 작은 포구에 위치한 작은 주루.

연화와 그녀가 이끄는 잠봉단원 다섯 명이 변장을 한 채 나눠 앉아 있었다.

[왜 아직 아무도 안 오시는 거지요?]

밖에 있는 탁자에 앉아 있던 시성란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시성란은 연화와 비슷한 나이로 잠봉단의 선임 격이었다.

약속대로라면 지금쯤 악불군은 물론 다른 두 명의 사화가 이끄는 잠봉단원들이 이미 도착했어야 했다.

[곧 오겠지. 안절부절 말고 주위 경계나 잘해.]

시성란은 연화의 전음에 다시 주위를 살폈다.

그때 그녀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말을 타고 나타난 이십여 명의 무림인들 때문이었다.

[사화님!]

[나도 봤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모른 척해라.]

전음을 마친 연화는 분산해서 앉아 있는 잠봉단원들 조심스럽게 살폈다.

‘악 무사님 말씀대로 이들 중에 우리의 동선을 알려 주는 첩자가 있다는 것인가?’

악불군은 흑란과 매향 그리고 연화에게 각각 다섯 명의 잠봉단을 이끌고 세 곳의 장소에 가서 기다리게 했다.

그리고 하루 정도 기다리다가 두 번째 장소로 움직이라고 했던 것이다.

만약 간세가 있다면 셋 중에 한 곳은 분명 추격을 받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운 나쁘게 연화가 이끄는 조가 걸린 것 같았다.

전음으로 나머지 네 명의 잠봉단에게도 태연하라고 명을 내린 연화는, 주루 안으로 들어서는 한 남자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탈색이 되었다.

그녀로서는 절대 상대할 수 없는 한 인물이 안으로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그는 철무정이었다.

* * *

산속의 밤은 빨리 어두워진다.

작은 공터를 발견한 악불군 일행은 그곳에서 하룻밤 노숙을 결정했다.

마차를 공터 중앙에 멈춘 악불군은 진재기 일행의 움직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노숙을 많이 해 본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곧 마차 옆에 꽤 큰 모닥불과 구수한 고기 굽는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노숙을 많이 하신 모양입니다.”

불 주위에 앉은 악불군이 묻자, 진재기는 미소를 지며 말했다.

“우리야 매일 하는 일이 노숙이지요.”

악불군도 노숙 첫날에는 여러 가지로 실수를 했었다.

가장 큰 실수는 불을 붙이지 않고 그냥 잠드는 바람에 최소 삼십 마리는 되는 늑대 떼의 습격을 받은 것이었다.

늑대들은 곧 악불군에 의해 반 이상이 죽음을 당한 후 도망을 쳤다. 하지만 이미 주위는 늑대가 흘린 피 냄새가 진동해, 잠을 자기가 괴로울 정도였다.

“하긴 봇짐장사를 하면서 매번 객잔에서 잔다면 돈 벌기는 어렵겠지요.”

악불군은 어렸을 때 동전 한 푼을 벌기 위해 온갖 험한 꼴을 당하며 일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진재기는 악불군의 말을 들으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속으로 중얼거렸다.

분명 자신들이 무림인이라는 것을 다 보았는데, 여전히 봇짐장사꾼으로 생각하는 듯 말했기 때문이었다.

진재기가 답을 못하고 있을 때 악불군이 먼저 물었다.

“유복통의 반군의 수가 십만 명이 넘는다고 하던데, 원나라에서는 왜 진압을 못하고 있는 겁니까?”

“유복통만 있다면 벌써 진압을 했겠지요. 하지만 호북의 진우량도 최소 십오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고, 호남 북부에 자리 잡은 장사성도 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이미 원나라에서 진압하기에는 반란군들의 규모가 너무 커졌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게 죽은 어찰단은 정예가 아닙니다. 특히 어찰단의 총 지휘자인 대공이라는 자는 대단한 고수들을 수하로 부리고 있지요. 유복통이나 진우량 등이 무림인이 아니라면 그들의 살수를 피할 수 없었을 텐데요?”

“사실은 그동안 숨어 지내던 많은 무림인들이 그들의 휘하에 들어가 돕고 있습니다. 어찰단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일갑자가 넘게 원나라의 압제에 시달리며 와신상담 무공을 익혀 온 중원 무림의 저력도 대단하거든요.”

“역시 그렇군요.”

악불군은 자신을 향해 원나라의 개라고 했던 무인들의 목소리가 다시 생각났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증오가 가득했다.

“혹시, 영웅회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진재기는 악불군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들어본 적 없습니다.”

악불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 못 들어보셨군요.”

“무림 세력입니까?”

“무림 세력이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합니다. 반원복송(反元復宋)을 외치는 곳이니까요.”

“정치 세력이군요?”

“그렇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전 정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단호한 그 말에 진재기는 더 이상 영웅회를 언급할 수 없었다.

* * *

철무정이 안으로 들어서자 연화를 비롯한 모두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누가 보아도 무림인을 만난 상인들의 모습이었다.

주루 안을 한 번 훑어본 철무정은 연화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고는 그 앞에 앉았다.

“무, 무슨 일이신지요?”

연화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변장을 아주 잘했구나.”

“그, 그게 무슨…… 아악!”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며 다시 묻던 연화의 입에서 뾰족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그녀의 손이 철무정의 손에 잡혀 있는 젓가락에 의해 뚫려 탁자에 꿰여 있었다.

“변장은 아주 잘했다만, 나까지 속일 수 있을 줄 알았느냐? 담수련은 어디에 있느냐?”

“무슨 말인지…… 아악!”

다시 연화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철무정이 그녀의 손에 박힌 젓가락을 넓게 휘젓자 뼈가 부서지고 근육이 찢어진 것이다.

피가 탁자 위를 흥건히 적시기 시작했지만 철무정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네 몸에서 풍기는 기를 보니 담수련을 옆에서 호위하던 네 명의 계집 중 한 명인 것 같구나. 그렇다면 내가 누구인지 알 것인데, 감히 나를 속이려고 해!”

“저희는 잠룡세가의 일원으로 잠룡세가의 임무를 수행 중입니다. 같은 오룡세가이신 소가주님께서 제게 이러시는 것은 무슨 이유이십니까?”

연화는 더 이상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끼고는 당차게 말했다.

“오룡세가? 잠룡세가는 이미 오룡세가를 배신했다. 더 이상 너희는 오룡세가의 일원이 아닌 우리의 적이다. 하긴 너 같은 비천한 지위에 있는 계집이 그것까지 알 수는 없겠지. 담수련이 어디에 있는지만 말한다면 네 목숨까지 취하지는 않으마.”

철무정의 말에 연화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잠봉단원들 넷은 모두 제압이 된 상태였다.

“저희는 지금 아가씨께서 어디에 계신지 모릅니다. 다만 여기서 기다리면 오신다고 했으니,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네가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구나. 쯧쯧!”

말을 마친 철무정은 한쪽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얼굴에 자상이 여럿 있는 흉측한 몰골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이 계집들에게 담수련이 어디에 있는지 한 시진 안에 알아내라.”

“예!”

철무정은 연화의 혈도를 몇 군데 찍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주루 안에서는 처절한 비명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네가 금령군주가 심어 놓은 아이냐?”

밖에는 잠봉단원 중 한 명이 시립해 있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비명 소리를 듣는 그녀의 표정은 굉장히 괴로워 보였다.

“그, 그렇습니다.”

“금령군주가 대단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담수련의 친위대인 잠봉단에까지 애를 심어 놓았을 줄은 몰랐군? 담수련이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

“올라오는 도중 유복통의 군사들과 시비가 있었습니다. 그때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럴 경우를 대비해 다음 만날 장소를 정한 것으로 압니다.”

“그 정한 장소가 바로 여기라는 것이냐?”

“제가 알고 있는 것은 그렇습니다.”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나 됐느냐?”

“하루 정도 되었습니다.”

“담수련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느냐?”

“백설이라고 하얀 설총마가 끄는 마차를 타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악불군이라는 호위 무사가 마부를 하고, 추국 사화가 지근에서 모시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설총마? 분명 설총마였느냐?”

“예.”

“흠! 그렇게 찾아도 없던 설총마를 담수련이 가지고 있다니, 반드시 찾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군.”

담수련을 보기 전까지 그가 가장 가지고 싶어 했던 것이 바로 설총마였다.

“막중혁!”

“예!”

“넌 여기를 기다려라. 저 계집들은 죽이지는 마라.”

“알겠습니다.”

“율사기.”

“예!”

“설총마는 눈에 아주 잘 띄지. 거기다 그 귀한 설총마로 마차를 끌고 있다면 당장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철룡세가에 연락해서 본 가의 정보망을 가동시켜 찾아내라고 해라.”

“지금 유복통의 세력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정보망을 가동시키는 것은 위험합니다.”

“지금 담수련과 설총마를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당장 연락해서 가동시키라고 해!”

“알겠습니다.”

‘담수련…….’

철무정은 고아하고 조신한 모습의 담수련을 눈앞에 그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었다.

“반드시 내가 취하리라!”

* * *

진재기 덕에 쉽게 호북으로 넘어온 악불군은 장강이 보이는 황강포에 도착하자 주루를 찾았다.

진재기는 부상당한 아우들을 데리고 의원을 만나고 온다며 떠났다.

“소군, 저들은 영웅회에 속해 있는 자들 같아.”

주루에 자리를 잡자. 담수련이 말했다.

“영웅회에 대해 아십니까?”

“악 무사님께서는 아가씨께서 모르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세요?”

추국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말했다.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는 아니고, 기억력이 좋아서 직접 본 것이나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을 다 기억할 뿐이야. 영웅회는 대원제국에 의해 무너진 중원 무림의 정기를 지키기 위해 무림인들이 모여 만든 조직이야. 원나라 초기부터 존재했다고 하는데, 당시 서슬 퍼렇던 어사대가 총 동원됐는데도 결국 살아남았다고 해. 오룡세가도 사실은 영웅회를 잡기 위해 대공이 만든 것이고.”

어사대는 원나라 황실을 호위하는 비밀 조직으로, 어찰단은 어사대의 하부 조직이었다.

“어사대에 오룡세가까지 합세했다면 엄청난 힘인데, 영웅회가 생각보다 대단한 전력을 가지고 있나 보군요?”

“어느 정도 전력인지는 아버지께서도 모르셨어. 다만 그들의 조직이 점조직으로 되어 있어, 언제나 꼬리만 잡을 뿐 수뇌부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하셨어.”

‘영웅회란 말이지…….’

담수련의 말을 들은 악불군은 영웅회란 단어를 한 번 되뇌었다.

뭔가 영웅회가 그와 깊숙이 엮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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