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57화>
57화. 영웅회(1)
“그럼 저들과 엮이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아니, 내 생각에는 그들과 최대한 친해지는 게 좋을 것 같아.”
“오룡세가의 적이라면 본가의 적이기도 합니다.”
“본가와 적이었지. 하지만 이미 본가와 대공이 척을 지었으니 더 이상은 아니잖아. 그리고 여전히 본가와 적이라 해도, 우리와 적은 아니잖아? 적의 적은 우군이라는 말도 있어. 난 영웅회가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계획이 이미 있으시군요?”
“오면서 조금 생각해 봤어.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알겠습니다. 아가씨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영웅회와 친분을 쌓아 두면 분명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올까요?”
“내 짐작이 맞다면 분명히 와. 진재기라는 분은 소군에게 궁금한 것이 많아. 그리고 친해지기를 원하지.”
“아가씨께서 점쟁이라도 된 것 같습니다?”
악불군이 미소를 띠며 말하자 담수련도 미소를 지며 답했다.
“영웅회는 적이 많은 조직이야. 소군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면, 영웅회라는 단어를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꺼낼 리 없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추국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악 무사님. 연화와 매향 그리고 흑란은 괜찮겠지요?”
추국의 질문에 악불군은 즉답을 하지 못했다. 그 역시 오는 내내 사화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담수련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추국아.”
“예.”
“지금 우리는 강호에 나왔고, 사방에 적뿐인 상황이야. 나쁜 일은 연화, 매향, 흑란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어. 세가에서 숙부께서 무림인들은 오로지 오늘만 사는 족속이라고 했을 때 이해를 못했는데, 이제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하지만…….”
담수련도 추국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화는 어려서부터 그녀와 친자매처럼 자란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자신까지 걱정을 한다면 악불군에게 너무 큰 짐을 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악불군이 사화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지금 상황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판단이었다.
그때 진재기가 이 층으로 올라왔다.
‘아가씨의 머리가 점점 완벽해지시는 것 같구나……. 이러면 안 되는데?’
담수련이 점점 상황을 정확하게 맞추자 악불군은 기쁘기도 했지만 걱정도 같이 커져 갔다.
악불군은 나오기 전, 잠룡세가의 의원인 전환후에게 담수련에 대해 여러 가지 주의할 점을 전해 들었다. 그중 하나가 뇌가 너무 활성화될 경우 생명을 갉아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우 분들의 간호를 더 하시지 않고 왜 오셨습니까?”
진재기가 가까이 오자 악불군은 짐짓 모른 척 물었다.
“의원 말이 며칠 의숙에서 쉬어야 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은인의 길 안내가 필요할 것 같아서 저만 왔습니다.”
“지도도 있고 사방에 사람이니 길을 물어도 되는데, 괜히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군요.”
“생명의 은인께 길을 좀 안내하는 것뿐인데 어찌 폐가 되겠습니까? 은인, 강호에 나와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글쎄요? 제가 초출이라 그것까지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정보입니다.”
“정보요?”
“아무리 무공이 높아도 인해전술은 상대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거기에 가는 곳마다 싸우다 보면 쉴 새가 없어서 제풀에 지쳐 버릴 수도 있지요. 전 호북 토박이라 호북 내의 정보가 훤합니다. 거기다 주위에 도와주는 사람도 많아서 정보를 얻기도 쉽습니다.”
“지도만 보고 가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이곳도 지금 원나라 군과 진우량의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곳을 피해 가지 않는다면 가는 곳곳마다 시비가 생길 것입니다. 제가 안내하면 그런 곳을 다 피해갈 수가 있습니다.”
“진 대협께서 귀찮음을 무릅쓰고 수고를 해 주신다니, 저로서는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악불군이 포권을 하자 진재기는 아니라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구명의 은인이자 후대의 영웅이 되실 분과 친분을 갖게 된 것만도 저로서는 감격할 일입니다.”
진재기의 목소리에는 진정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담수련은 이상하게 가슴이 뿌듯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 * *
악불군이 식사를 한 주루의 맞은편 주루.
창가에 앉은 한 명의 중년인과 노인이 악불군 일행이 나오는 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르신, 어떻게 보이십니까?”
청수한 인상의 노인은 수염을 한 번 쓰다듬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진 대협의 말이 사실이라면 백대고수의 상위 고수와 맞먹는 실력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나이도 너무 젊고, 내공의 깊이가 너무 얕은 것 같습니다.”
“내 생각과 같구먼. 그런데 진재기가 아주 신중한 아이란 말이야. 거기다 그 아우들의 진술도 똑같지 않던가?”
“그럼 우리까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내공이 높은 것일까요?”
“아예 감출 수는 있지만 저 아이처럼 삼, 사십 년의 내공만 보이고 나머지는 감추는 것은 있을 수 없네.”
“그럼 조금 더 주시를 해 보아야겠군요?”
“진재기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에게는 정말 필요한 인재이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다만 저자의 사문도 모르고, 천목산에서 만난 것도 인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인위적인 느낌이 듭니다.”
“나도 그게 좀 걸리기는 하지만, 완전히 알기 전까지는 무례를 범하지 말라고 주의를 시켜야 할게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천목산에서 호북사걸을 기다리기로 한 것을 아는 자들이 얼마나 있는지 알아보게. 아무래도 지휘부에 간세가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이미 알아보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계속 사라져 가는 마차를 주시하던 노인은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우선 얼굴은 알았으니 이만 가세. 자세히 알아볼 분이 곧 따라갈 거야.”
“예!”
악불군에게 관심을 가지는 세력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 * *
“정말 거대하군요.”
황강포구에 도착한 악불군은 엄청난 물을 자랑하며 흐르고 있는 장강의 위용을 보자 놀랍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호남의 악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배를 타고 가는 방법이 가장 빠를 것입니다.”
안내를 받기 위해서는 목적지를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악불군이 가는 곳은 바로 악양이었다.
“진 대협 덕에 편하게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안휘 접경에서 황강포구까지는 하루 거리였다. 하지만 호북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방에 검문이 있었고, 진유량의 군대에 들어가기 위해 몰려 온 낭인들로 곳곳에서 싸움이 벌어져 양민들이 공포에 떨고 있었다.
“은인.”
“말씀하십시오.”
“꼭 악양으로 가셔야 하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왜 그것을 알고 싶어 하십니까?”
“지금 호북과 안휘 북부 그리고 강소성을 점거하고 있는 반군들은 어느 정도의 지휘 체계가 잡혀 있고, 원나라 군부와도 확실한 경계선이 있어 그나마 혼란이 덜합니다. 하지만 호남은 진짜 혼란스럽습니다.”
“호남의 북부에도 반군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닙니까?”
“장사성이란 자가 있긴 합니다. 오히려 군사 수만 따지면 다른 반군보다 더 많습니다. 하지만 지휘 체계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아서 그 횡포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악불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오는 동안 본 상황도 혼란 그 자체였는데, 이보다 더 심하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악불군이 침묵을 하자 진재기가 다시 말했다.
“은인께서 호북에서 지내신다면 제가 은인과 아가씨께서 안전하고 편하게 지내실 장소를 마련해 드릴 수가 있습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 하지만 꼭 가야 할 이유가 있어서 안 될 것 같군요.”
* * *
금잔화는 커다란 지도를 쳐다보며 담수련의 동선을 그리고 있었다.
“여기 유복통의 군사와 시비가 난 곳이고, 여기가 철무정이 담수련의 호위 무사들을 잡은 곳인데……. 그렇다면 어디쯤에서 빠졌을까?”
잠시 생각하던 금잔화는 금령사자를 보며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어디로 갈지를 모르니 한곳을 지정하기에는 너무 범위가 넓습니다.”
“그래 지금 가장 문제가 그들의 목적지를 모른다는 거야. 담수운과 종리화 그리고 담수련. 둘은 아직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어. 그렇다면 담수련은 그 둘을 만날 확률이 가장 높다. 우리의 정보망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어디일까?”
“광동과 호남 남부 그리고 운남 정도가 어사대의 정보망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광동은 남행을 해야 하는데, 담수련은 서행을 했단 말이야.”
“그럼 호남 남부와 운남만 남습니다.”
“운남은 너무 멀어. 아무리 담무룡이 비밀 조직을 만들었다 해도 운남은 조종하기가 어렵지.”
“그렇다면 담수련이 움직이는 곳은 호남이겠군요?”
그때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군주님, 은령사자입니다.”
“무슨 일이냐?”
“급보가 날아왔습니다.”
“들어와라.”
“천목산에서 흑수영주께서 이끌던 어찰단 수십 명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흑수영주가 거길 왜 간 거지?”
“호북사걸이라는 영웅회의 하부 조직원을 쫓은 모양입니다.”
“호북사걸이 그렇게 강한가?”
“모두 일류 고수급의 실력을 지니고는 있지만, 흑수영주가 이끄는 어찰단을 상대하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금잔화는 급히 지도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탁자를 탁! 쳤다.
“여기로구나. 마차가 다닐 수 없는 산길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이곳을 생각도 안 했어.”
“담수련이 천목산으로 갔다는 것입니까?”
“그래, 분명하다.”
“하지만 육 호는 분명 서호 포구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철 소가주님께서 거기서 그녀들을 잡기도 했고요.”
“육 호가 동선을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을 담수련이 눈치챈 거야! 잡은 계집들 중 지휘자는 다음에 만날 곳을 알고 있을 게다. 당장 연락해서 그 계집을 다시 고문하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금령사자는 천목산에서 마차가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모두 조사해서 담수련이 어느 길로 빠져나갔는지 알아내도록 해라.”
“존명!”
둘이 급히 나가자 금잔화의 시선은 다시 지도로 향했다. 그렇게 지도에 선을 그으며 동선을 조사하던 그녀가 갑자기 멈칫했다.
‘철무정의 보고에 의하면 설총마라고 했어. 거기다 보기 드문 마차이고……. 이렇게 도망을 친다면 당연히 사람들 눈에 띄는 설총마나 마차는 버리고 사라지는 것이 맞는 거 아니야?’
금잔화는 갑자기 어떤 속임수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 * *
“이 배는 참 크네?”
악불군이 탄 배는 마차를 다섯 대, 말은 열 필이나 실어 나를 수 있는 매우 큰 대형선이었다.
당연히 배에 타고 있는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이렇게 큰 배는 처음 봅니다. 선두로 가 보시겠습니까?”
담수련은 선두 쪽을 슬쩍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냥 여기 있자.”
선두에는 대부분 무기를 등에 멘 무림인들이 서 있었다. 경치를 보기가 가장 좋기 때문에, 무공이 약하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은 감히 선두 쪽으로 갈 수가 없었다.
담수련도 선두에 가서 경치를 마음껏 보고 싶었지만, 앞으로 갔다가는 쓸데없는 시비가 생길 것이 싫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추국은 어디 갔어?”
“지금 아가씨 선방(船房)을 청소하고 있을 겁니다.”
보통 배에는 수십 명이 옹기종기 모여 자는 바닥 선실과 상당히 큰돈을 지불해야 얻을 수 있는 선방이 있었다.
진재기는 담수련을 위해 선방까지 얻어 준 것이다.
“추국도 피곤할 텐데?”
“배의 선방은 대부분 지저분하다면서 반드시 치워야 한다고 하더군요.”
“사화가 나 때문에 너무 희생을 하는 것 같아.”
담수련은 마음이 아픈 듯 말했다.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 키워졌습니다. 사화도 다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소군, 사화는 내 자매 같은 애들이야. 그리고 소군은…… 어쨌든 중요한 사람이고. 나를 위해 키워졌다는 말하지 마. 그러면 나 미안해서 못 견뎌.”
담수련은 소군은 오빠라고 하려고 했지만 살짝 말을 돌려 버렸다.
이제 어느 정도 자신의 마음을 눈치챈 그녀로서는 오빠라고 하는 것이 좀 맞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가씨 마음은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다시는 그런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말을 하던 악불군이 옆을 슬쩍 보더니 그녀의 등 뒤에 섰다.
네 명의 무인이 그들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