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58화>
58화. 영웅회(2)
한 명의 청년과 세 명의 중년인.
청년은 등에 무기를 매고 있으니 무림인이 분명했다. 하지만 입고 있는 고급 옷을 보면 고관대작의 자식 같기도 했다.
그런데 악불군이 급히 그들이 담수련에게 다가오는 것을 막은 것은, 그들의 무공이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청년은 악불군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거기 소저와 얘기 좀 나누고 싶은데, 비켜 주겠느냐?”
그는 예상대로 귀하게 자란 자인지 시작부터 반말이었다.
“아가씨께서는 모르는 분과는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이런 건방진 놈을 봤나? 소저께 물어보지도 않고 네 마음대로 대답을 해!”
청년은 담수련이 마차에서 내려 배에 올라탈 때부터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비록 얼굴을 가렸음에도 그녀에게서 저절로 풍겨 나오는 우아함과 고귀함에, 배를 타는 수많은 사람사이에서도 눈에 확 띄었기 때문이었다.
황강을 출발하고 한 시진, 이제 다음 도착지인 무한까지는 하루는 가야 했다. 그는 그 안에 담수련과 어떻게든 친분을 만들 생각이었다.
“전 아가씨의 호위 무사로서, 아가씨께서 제게 내린 명을 수행할 뿐입니다.”
“이놈이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는 것이냐? 이분은 너 같은 호위 무사 따위가 나서서 막을 분이 아니다!”
청년의 옆에 서 있던 중년 무사가 앞으로 나서더니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위협적인 말에도 악불군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더 가까이 오면 다칩니다.”
“공자님, 어떡할까요?”
중년인은 청년을 보며 물었다. 최대한 담수련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하라는 주의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소저, 전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어디까지 가시는지는 몰라도, 다음 도착지인 무한까지 가려면 하루정도는 더 가야 합니다. 이왕 이렇게 한 배를 탄 것도 인연인데, 대화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강 쪽으로 시선을 돌린 채 가만히 있던 담수련이 몸을 돌렸다.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조금 더 예의를 배우셔야겠어요. 전 지금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제 생각을 말했으니 이만 돌아가세요.”
‘목소리까지 아름답군. 저 면사를 벗겨서 저 안에 어떤 얼굴이 있는지 꼭 알아야겠어.’
청년은 담수련의 면사로 가린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강호란 곳이 상당히 험한 곳이긴 하지요. 하지만 저는 경계할 필요 없습니다. 저는 장강을 관장하는 교룡방의 소방주인 위사묵이라고 합니다. 강호에서는 저를 소장룡왕이라고 부릅니다.”
교룡방은 장강 수적들의 집합체인 장강 삽십육수로채를 규합해 만든 연합세력으로, 원나라가 중원을 정복한 후 그들에게 부역을 하며 급격하게 세를 불린 사파였다.
처음에는 숫자만 많고 고수가 적은, 말만 무림 문파였다. 하지만 지금은 철룡방의 도움으로 상당히 많은 고수들을 거느린 중견 문파가 되어 있었다. 특히 수공에 특화되어 장강에서만은 웬만한 무림 문파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세력이었다.
위사묵은 자신의 위치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 가슴까지 펴며 자신을 소개했다.
“다음에 제가 편해지면 그때 대화를 나누도록 하지요.”
하지만 담수련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다시 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아가씨의 의사를 들으셨을 테니 이만 돌아가시지요.”
위사묵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지.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소군. 저자, 그냥 포기할 자가 아니야.”
위사묵이 수하들을 모두 데리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담수련이 말했다.
“저도 압니다. 선두에 몰려 있는 무림인들이 모두 저자의 수하들 같습니다.”
배의 앞쪽인 선수에는 최소한 오십 명은 넘는 무림인들이 모여 있었다.
“한 배로 저렇게 많은 방도가 움직인다면 이유가 있을 텐데?”
“알아볼까요?”
“됐어. 간신히 시비 없이 끝났는데, 그런 거 알아보려다가는 진짜 싸우게 될 거야.”
담수련은 위사묵이 그대로 물러난 것이 오히려 의아했다.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집요함을 생각하면 이대로 물러설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은 자신을 노려보는 여러 명의 눈길을 느꼈지만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소군.”
“예.”
“선방으로 가자.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어.”
“예.”
“저들이 선실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담대한 척 선수에 뒷짐을 지고 선 채 강의 풍경을 구경하는 척하던 위사묵은 수하의 말을 듣자 몸을 돌렸다.
“저 계집이 나를 보더냐?”
위사묵의 질문에 수하는 잠시 머뭇거렸다.
“왜 말을 안 해?”
“죄송합니다. 한 번도 소방주님을 보지 않았습니다.”
“계집이 점점 흥미 있게 만드네?”
잠시 생각하던 위사묵은 수하의 귀에 대고 뭔가를 지시했다.
“괜찮을까요?”
“아무도 죽이지 않고 약탈만 안 하면 된다. 저 계집만 잡아서 가라고 해.”
“알겠습니다.”
수하가 어디론가 뛰어가자 위사묵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나타났다.
* * *
“언니!”
크게 소리치며 천화궁주 예서령이 뛰어 들어오자 종리화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새로운 소식 들어온 것이 있어?”
“안휘에 있던 우리 아이에게 연락이 왔는데, 기루에 온 무인 하나가 황산삼웅이라는 안휘의 무림인이 주루에서 하늘의 선녀처럼 예쁜 여자에게 찝적대다가 호위 무사에게 호되게 당하고 도망쳤다는 얘기를 해 줬답니다.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아가씨 같은데, 언니 생각은 어때요?”
“아가씨, 맞다! 그렇다면 정말 큰일 아니냐?”
절강에서 안휘로 넘었다면 그들이 오는 곳은 그녀의 예상대로 악양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악양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요. 지금 어찰단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언니를 쫓고 있는데, 어쩌지요?”
“만약 악양으로 온다면 비밀 암호부터 내걸 거야. 거기 애들한테 어떻게든 접속할 방법을 찾아보라고 해라.”
“언니도 알다시피 지금 악양은 장사성의 반군과 원나라의 군사, 거기다 어찰단까지 혼재되어서 보보에 위험이 깔려 있어요. 거기다 철룡세가의 지배력이 약화되면서 철룡세가에 빌붙어 살던 무림 세력과 낭인들까지 전부 활개를 치고 다녀서 치안이 엉망이에요. 특히 건드리기 쉬운 기녀들이 계속 변을 당하고 있다는데, 우리 애들을 어떻게 내보내겠어요?”
천화궁주 예서령이 불가능하다는 듯이 말하자 종리화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하다못해 아가씨께 악양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전갈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어디 계신지도 아직 몰라요. 무엇보다 우리 눈에 띌 정도면 벌써 어찰단에게 걸렸겠지요.”
예서령의 말은 상당히 냉정했다. 애초에 그녀는 종리화를 돕는 것이지, 담무룡의 수하가 아니었다. 당연히 자신의 수하들의 안전이 먼저일 수밖에 없었다.
“안 되겠다. 나라도 가 봐야겠다.”
종리화가 일어서자 예서령이 말했다.
“언니, 냉정을 찾으세요. 지금 언니가 나가면 어찰단에 금방 걸려요. 그들이 기루 곳곳에 언니의 용모파기를 붙여 놓고 찾고 있다는 것을 알잖아요?”
“그렇다고 아가씨를 위험하게 두고 볼 수는 없지 않느냐?”
“지금은 운을 바랄 수밖에 없어요. 언니가 걸리면 담 가주님의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간다고요.”
예서령의 말에 종리화는 결국 다시 자리에 앉고 말았다.
‘그래……. 이제 믿을 것은 소군 너밖에 없다. 아가씨를 꼭 보호해 다오.’
종리화는 악불군의 강인한 눈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 * *
“아가씨, 방이 너무 작지요?”
선방에 담수련이 들어서자 방을 깨끗이 치운 추국이 죄송하다는 듯 말했다.
“무슨 소리야? 지금 선실에는 수십 명이 그냥 바닥에 누워서 쉬고 있어. 이 정도면 사치스러울 정도야.”
배가 크다고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쉴 수 있는 선방은 고작 열 개 남짓밖에 없었다. 그것도 보통 부자도 손사래를 칠 만큼 비쌌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거적때기를 덮은 선실바닥 이곳저곳에 누워 자야 했다.
심지어 말과 짐을 싣는 짐칸과 가까워 냄새가 나는 데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파리와 모기는 물론 쥐까지 돌아다닐 정도로 엄청 지저분했다.
“그런데 바람 쐬신다더니 왜 벌써 들어오셨어요?”
“나갔더니 귀찮은 사람들이 많네. 그냥 여기서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운기조식할 시간도 됐고.”
오음절맥에 시달리는 담수련은 정해진 시간에 운기조식을 꼭 해야 했다.
“그럼 운기조식하고 계세요. 전 백설에게 한번 가 보겠습니다.”
“추국, 미안해.”
“뭐가요?”
뜻밖의 말에 추국이 깜짝 놀라 물었다.
“나 때문에 추국이 너무 힘든 것 같아서.”
“솔직히 세가 안보다 지금이 저 좋으니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지금이 더 좋다고?”
담수련은 의아한 듯 물었다.
“지금은 좀 위험하긴 하지만 자유롭잖아요? 구경도 마음껏 하고요. 하지만 세가에서는 말 한마디도 함부로 못했어요. 주위에 눈과 귀가 너무 많아서요. 전 지금 아주 좋아서 아가씨께 감사드리고 싶을 정도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그럼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담수련은 나가는 추국을 보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미안함이 가득했다.
추국의 말이 사실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뒷바라지하는 어려움이 희석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 * *
밖으로 나온 추국은 방 옆에 기대고 서 있는 악불군을 보자 목례를 하며 물었다.
“선상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봐요?”
“배란 공간이 밀폐된 공간과 비슷해서 그런지 날파리들이 많이 꼬이더구나. 그래서 귀찮으셨던 모양이다.”
“아가씨는 어렸을 때부터 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셨대요. 그래서 악 무사님 말고는 어떤 남자도 호위를 맡지 못한 거고요. 면사로 얼굴을 가렸는데도 남자들은 아가씨께서 예쁜 것을 어떻게 알고 그렇게 따라붙는지 모르겠어요.”
추국의 질문에 악불군은 씨익 미소를 지며 말했다.
“난 남자가 아닌 거 같으니, 다른 남자들에게 물어봐라.”
* * *
홍강선은 장강을 오가는 배 중에서 가장 큰 배로 손꼽혔다.
그리고 양성구는 자신이 홍강선의 선장이라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은 물결이 잔잔해서 노꾼들이 좋아하겠습니다.”
배를 조종하던 조타수는 옆에서 좌우를 살피던 양성구를 보며 말했다.
“그래, 이대로만 가면 반나절은 시간을 앞당길…… 저게 뭐지?”
말하던 양성구의 얼굴이 굳어졌다.
멀리서 괴이한 깃발을 단 배들이 그의 배를 따라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뒤를 본 조타수도 깜짝놀라 소리쳤다.
“저, 저거 혈수련(血水聯)의 깃발 아닙니까?”
혈수련은 장강에서 가장 잔인하다고 소문난 수적 집단이었다. 하지만 장강에서 거의 살다시피 한 양성구도 소문만 들었을 뿐 혈수련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혈수련을 만나 배는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혈수련, 이놈들이 미쳤나? 왜 우리를 쫓아오는 거야, 정말 이 배의 주인이 누군지 모르나?”
양성구는 사색이 된 얼굴로 말하고는 조타수를 보며 말했다.
“내가 배를 운전할 테니 넌 당장 내려가 노꾼들에게 혈수련이 쫓아온다고 말하고 전속력으로 노를 저으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조타수는 급히 답하고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 내려갔다.
* * *
눈을 감은 채 담수련의 선방 외벽에 기대 서 있던 악불군은 갑작스런 소란에 눈을 떴다.
고개를 돌려 시끄러운 쪽으로 시선을 돌린 악불군은 추국이 달려오는 것을 느끼자 검미를 살짝 좁혔다.
‘뭔가 일이 벌어진 모양이군.’
“악 무사님!”
추국은 악불군을 보자 급히 불렀다.
“무슨 일인데 그래?”
“저도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수적이 이 배를 따라오는 모양이에요.”
“원래 장강은 수적이 많기로 유명하지 않나? 이 배에는 무림인들이 상당히 많이 타고 있어. 그렇게 호들갑 떨 필요 없다.”
“그게 그렇지 않은가 봐요. 수적이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해요. 거기다 잔인하기가 짝이 없어서, 습격한 배는 여자는 모두 끌고 가 노예로 팔아 버리고 남자는 한 명도 살려 두지를 않는다고 하네요. 그래서 지금 이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공포에 질려서 난리예요.”
그때 밖의 소란을 들었는지 문이 열리며 담수련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