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59화>
59화. 장강(1)
악불군은 담수련의 앞을 막으며 말했다.
“방금 운기조식이 끝나셨습니다. 지금은 나오시면 안 됩니다.”
보통은 운기조식을 하고 나면 몸이 개운해진다. 하지만 담수련은 운기조식을 하면 몸이 더 피곤해지는 특이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고 운기조식을 안 하면 몸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지기 때문에 안 할 수도 없었다.
“소군.”
“예.”
“지금 상황에서 내가 방 안에서 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나가서 저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보는 것이 나을까?”
“그건…….”
악불군의 그녀의 말에 머뭇했다.
강호는 보보(步步)가 위험이었다. 특히 담수련에게는 더 그러했다.
그렇다면 무조건 보호하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을 할 정도의 경험은 쌓게 해 주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녀가 힘들어 하는 것을 보는 것도 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군, 저런 수적 정도는 처리할 수 있지?”
“할 수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전 아가씨께서 처리하라고 하시면 처리합니다.”
악불군의 대답에 담수련은 희미하게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여인을 노예로 팔아먹고 남자는 모두 죽인다면 그들은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이라고 생각해. 그런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힘이 없는 선량한 백성들에게 우리가 해를 끼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럼 어떻게 할까요?”
“우선 소문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으니까 먼저 그들의 행동을 내가 직접 봐야겠어. 그리고 내가 고개를 저으면 모두 죽여.”
담수련의 단호한 말에 악불군은 물론 추국까지 눈이 커졌다. 담수련은 너무 착해서 새가 죽거나 꽃이 시들어도 눈에 눈물이 달리곤 했었다.
그렇게 여리던 그녀에게 변화가 생긴 것은 천목산 간이 주막에서의 혈투 이후였다. 그렇다 해도 망설임 없이 모두 죽이라는 말은 둘에게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악불군은 곧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담수련의 명은 그냥 지상 과제일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 * *
“연락이 왔다. 액수를 더 올렸어.”
“금령군주가 이렇게 애가 단 모양인데요?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액수는 처음입니다.”
“그런데 청부가 조금 바뀌었다. 잠룡세가의 딸만 생포해서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이제는 그 계집의 호위 무사까지 생포해 오란다.”
“호위 무사 따위를 왜 생포하라고 하지요?”
“우리가 알 바 아니지. 청부액이 두 배로 올랐으니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금령군주의 말에 따르면 그들이 가는 곳은 악양이다.”
“대단하군요. 우리도 아직 못 찾은 것을 찾았다니 말입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자신들이 어찰단과 원나라 군사들까지 지휘하는 금잔화보다 정보망이 더 대단하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악양 쪽에 누가 있지.”
“구 호와 십삼 호가 각각 열 명씩을 이끌고 있습니다. 무공을 모른다는 담수련이나 호위 무사나 하는 놈을 생포하는 데는 충분할 것입니다.”
“백인막은 실수를 하면 안 된다. 만약을 위해 사 호와 오 호에게 열 명씩 붙여서 지원을 보낸다.”
“알겠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백 년간 단 한 번의 청부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살수들의 전설, 백인막이었다. 특히 백인막의 막주는 무림 백대고수 여섯 명을 홀로 제거하면서 그 위명을 천하에 알렸다.
하지만 그의 정체는 백인막의 구성원들조차 모르고 있었다. 백인막의 살수들은 이름도 없이 그냥 번호로 불렸다.
오룡세가의 가주들조차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다는 백인막의 살수들이 담수련을 쫓고 있다는 것은 실로 나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 * *
선실에서 밖으로 나가는 출입구는 선수 쪽으로만 나올 수 있었다.
위사묵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짓자, 담수련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악불군에게 물었다.
“소군, 교룡방의 소방주란 자가 수적들을 조종할 수 있을까?”
“교룡방이 어떤 방파인지를 알지 못해서 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아가씨는 저들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공포에 절어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면서도, 저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떠들고 있어. 저들이 정말 수적들이 나타난 것을 몰라서 저럴까?”
담수련은 위사묵과 그 수하들이 수적의 출몰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 수상했던 것이다.
“제가 알아볼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뒤로 가자.”
선미로 간 담수련은 건장한 선원들이 손에 무기가 될 만한 것은 닥치는 대로 들고는 다가오는 혈수련의 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자 커다랗게 외쳤다.
“저들은 무공을 배운 무림인이에요. 여러분들은 도움이 안 되니 모두 물러가 주세요.”
“소저께서 저들을 막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장담은 저도 못해요. 하지만 우리는 최소한 무공을 배운 무림인이니, 여러분들보다는 나을 겁니다.”
선원들을 지휘하던 조타수는 선원들에게 말했다.
“이분 소저께서 무림인이신데 우리를 돕겠다고 하신다. 우선 뒤로 물러나고, 만약 이분들이 위험해지면 우리도 같이 싸운다.”
선장의 명에 어쩔 수 없이 싸울 준비를 하긴 했지만 대부분 벌벌 떨고 있던 선원들은, 조타수의 말을 듣자 살았다는 듯이 부리나케 배의 양옆으로 피했다.
노꾼들이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내며 최선을 다해 노를 저었지만, 거대 수송선으로 수적들이 사용하는 쾌속선의 추격을 뿌리치기는 애당초 불가능했다.
그렇게 반각쯤 지났을까…….
선미의 난간에 쇠갈고리가 여럿 걸리더니, 곧 갈고리와 연결된 밧줄을 타고는 삼십 명은 넘는 수적들이 배에 올라탔다.
가장 늦게 배에 오른 자는 좌우를 살피더니, 중앙에 짝 버티고 있는 세 명의 남녀를 보자 피식 미소를 지었다.
‘소방주님께서 말한 계집이 알아서 나타나주니, 시간 절약이 되겠군.’
혈수련의 대조장인 호대칠은 담수련을 보자마자 위사묵이 말한 여인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가 보기에도 신비한 느낌이 드는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호대칠이 자신을 보자 담수련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물었다.
“제가 들으니 당신들은 사람들을 모조리 죽인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호대칠은 담수련의 목소리가 너무 듣기 좋다는 생각을 하며 말했다.
“본 련에 대해 듣기는 했구나. 하지만 오늘은 이 영웅께서 자비심을 베풀 테니, 네가 자진해서 나를 따른다면 다른 사람들은 건드리지 않고 그냥 가겠다.”
담수련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갑자기 이 배를 따라온 것이 나 때문이었다는 말인가요?”
“그런 것은 네가 알 바 아니다. 어떠냐. 따라오겠느냐, 아니면 모두 죽는 것을 보겠느냐?”
“우와!”
호대칠의 말이 끝나자 혈수련의 수하들은 무기를 들어 올리며 괴이한 포효를 터뜨렸다.
악불군은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선체 위에 위사묵을 비롯한 무사들이 미묘한 미소를 지며 구경하는 것이 보였다.
[아가씨, 교룡방의 소방주란 놈이 혈수련까지 조종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악불군의 전음을 들은 담수련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혈수련의 수하들을 죽 둘러보았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거나 죄책감을 보이는 사람이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피에 굶주린 악귀처럼 눈을 희번덕거리며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네. 소군, 다치지 마.”
“예! 추국은 아가씨 잘 보호해라.”
담수련이 뒤로 물러서며 말하자 대답을 한 악불군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의 손에는 이미 검이 잡혀 있었다.
호대칠은 악불군이 자신에게 달려오자 다급하게 무기를 들어 올렸다.
퍽!
호대칠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밑으로 내렸다. 악불군의 검이 그의 심장을 이미 찌르고 다른 쪽을 향해 날아간 것이다.
어찌나 빨랐는지 모두 죽는 데 걸린 시간은 차가운 물 한 잔 마실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비명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악불군의 일검에 모두 즉사했기 때문이었다.
모두를 제거한 악불군은 검을 뿌려 피를 떨군 후 검을 겁집에 넣으며 위를 쳐다보았다.
위사묵은 물론, 옆에서 실실 웃던 수하들 역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들은 악불군의 눈만 보고도 느낄 수 있었다. 또다시 허튼 수작을 부리면 그들도 다 죽이겠다는 경고라는 것을…….
담수련은 전에는 악불군이 사람을 죽일 때 눈을 감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두가 죽을 때까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끝까지 보고 있었다.
“수고했어.”
악불군이 그녀에게 다가오자 담수련은 작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시체는 당신들이 처리하세요.”
담수련이 악불군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가자, 추국은 긴장한 얼굴로 서 있는 선원들에게 말하고는 급히 그 뒤를 따랐다.
* * *
“그 건방진 놈을 그냥 두실 겁니까?”
위사묵의 심복인 어극표가 흥분해서 말했다.
“아까 그놈의 무공을 보았잖아?”
“소방주님. 우리는 교룡방의 정예들입니다. 혈수련놈들이 수적으로는 무공이 상당히 센 편이지만 우리와는 차이가 많습니다. 소방주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제가 당장 그놈을 죽이고 그 계집을 끌고 오겠습니다.”
“어극표! 나는 지금 기분이 좋아서 참고 있는 줄 아냐! 우리가 지금 왜 가는 줄 몰라?”
위사묵이 버럭 화를 내자 어극표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 수하 한 명이 달려왔다.
“알아보았습니다.”
“뭐라고 하더냐?”
“그놈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만 악양까지 간다는 것만 알아냈습니다.”
“악양? 우연치고는 공교롭군.”
위사묵도 지금 악양으로 가는 중이었다.
“악양이 지금 얼마나 혼란스러운데 거기를 가는 걸까요?”
어극표도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그가 보아도 담수련은 아름다울 것 같았다. 그런데 겨우 두 명의 호위만 데리고 악양으로 들어간다면 온갖 놈들이 집적댈 것이 분명했다.
어국표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위사묵은 좋은 생각이 난 듯 다시 말했다.
“귀도방에 청부를 하자.”
“귀도방이요? 소방주님. 저희가 지금 가는 것이 귀도방 때문에 가는 것인데, 그놈들이 우리 말을 듣겠습니까?”
귀도방은 교룡방과 함께 철룡세가의 협력 세력으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장사성이 이끄는 군대가 악양을 장악하면서 철룡세가가 장강 북쪽으로 물러나자, 지금은 교룡방과 악양의 이권을 두고 사사건건 시비를 벌이는 앙숙 같은 사이가 되어 있었다.
지금 그가 오십 명이 넘는 수하들을 이끌고 악양으로 가는 이유도 교룡방이 귀도방에 밀리고 있다는 보고 때문이었다.
그가 지금 악불군과 싸우지 못하는 이유였다. 악불군의 무공으로 보아, 이긴다 해도 상당한 희생은 불가피해 보였다. 지금 한 명의 수하가 아쉬운 판에 그런 희생은 그의 입지에 큰 부담이 될 것이 분명했다.
“우리라고 하면 안 되지. 그놈들이 모르는 사람을 시켜, 귀도방 놈에게 저 계집을 납치해서 넘겨 달라고 하는 거다. 그놈들은 돈하고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니까, 금자 열 냥 정도만 줘도 청부를 받을게다.”
“그러다가 저 계집을 귀도방에 빼앗기면 어쩌시려고요?”
“저 정도의 놈이면 귀도방에서 저 계집을 납치하려면 꽤 많이 죽을 게다. 우리는 천천히 저놈을 미행하다가, 둘이 양패구상하면 그때 달려들어 모두 죽이고 저 계집만 납치해 오면 된다.”
“역시! 소방주님의 머리는 천하제일입니다. 감탄했습니다.”
어극표는 엄지손가락까지 치켜세우며 아부성 발언을 토해 냈다.
* * *
악불군이 혈수련의 수적들은 모조리 죽인 것이 소문이 나면서, 배 안의 사람들은 담수련의 선방 쪽으로 절대 다가가지 않았다.
이미 악불군은 그들에게 신인(神人)이 되어 있었고, 그런 악불군이 모시는 여인이라면 그들이 얼굴조차 봐서는 안 될 귀한 여인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담수련이 피곤하다며 선방으로 들어가자 악불군은 언제나처럼 벽에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그는 그 자세로 잠을 잘 수도 있었고 심지어 운기조식까지 할 수 있었다.
그때 악불군의 이야기로 웅성거리던 선실 한쪽에서 꾀죄죄한 노인 한 명이 일어서더니 선방으로 통하는 통로로 다가왔다.
그는 안쪽을 살피더니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악불군을 보고는 슬금슬금 다가왔다.
“이쪽은 막혔는데 계속 다가오는 이유가 뭡니까?”
노인이 일 장 가까이 다가서자 눈을 뜬 악불군은 스윽 보더니 엄중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