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60화>
60화. 장강(2)
노인은 짐짓 놀란 듯, 흠칫 하며 말했다.
“하하하! 젊은 영웅이 경계심도 대단하구먼. 노부가 자네에게 흥미가 좀 생겼어. 그래서 좀 친해 볼까 하는데, 어떤가?”
노인의 말투를 들은 악불군은 역시 하는 표정을 지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어제의 사건을 겪고 자신을 가까이 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노인은 자연스럽게 악불군에게 하대를 하고 있었다.
사실 악불군은 처음 담수련을 선방으로 안내할 때부터 그 노인에 대해 의아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가 느끼기에 노인은 위사묵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고수였다.
그런 고수가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양민들 틈에 끼어 자신을 숨기고 있다는 자체가 경계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전 별로 친해지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젊은 친구가 까칠하긴! 나이 많은 사람이 얘기를 하면 좀 부드럽게 들어주는 것이 좋다네. 노부가 아까 자네 싸우는 것을 봤는데, 대단하더군. 사문이 어디인가?”
“제가 말해 줄 이유가 있습니까?”
“이 늙은이가 강호를 수십 년을 돌아다녔지만 자네 같이 빠르면서도 변화가 많은 검법은 본 적이 없어서 그런다네.”
“그것은 제가 말해 줄 이유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자네, 악양으로 가지?”
노인의 말에 악불군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뒷조사까지 하셨습니까?”
“뒷조사는 무슨? 선원한테 물으니까 이박삼일로 지불을 했다고 하던데, 시간상 악양에서 내리는 것 아니겠나? 그런 거 비밀이 아니야.”
“더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어르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노인이 대화를 하면서 얼렁뚱땅 두 걸음을 더 다가오자 악불군이 강력하게 경고했다.
“내가 이래봬도 사람 보는 눈이 있는데, 자네는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야.”
“전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제 임무에 충실할 뿐이지요. 전 어르신 같은 무림인들과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
“자네 무공이 대단하긴 하지만, 천하에는 생각보다 나쁜 놈들이 참 많다네. 그리고 나쁜 놈들은 혼자 다니는 법이 없어. 한 손으로 두 손을 당하지 못한다는 격언은 자네도 들어 봤을 걸세.”
“하고 싶으신 말이 뭡니까?”
“내가 자네에 대해 알아야, 나 스스로도 자네에게 뭘 말하고 싶은지 알 게 아닌가?”
노인은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펴며 또다시 한 걸음을 더 다가섰다.
그리고 동시에 악불군의 손에 검이 들렸다.
노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벽에 등을 대고 있는 상태에서 등에 멘 검을 이렇게 빨리 뽑는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마술로 착각할 정도였다.
“어르신이라 두 번이나 경고했습니다. 더 이상은 없습니다.”
“알았다, 알았어! 에잉, 가까이 안 간다. 그래도 얘긴 좀 할 수 있지?”
“전 별로 할 얘기 없습니다.”
“그냥 내가 하는 얘기나 들어, 그럼.”
“말씀해 보십시오. 단 사문이 어디냐는 등 개인적인 질문은 하지 마십시오.”
‘고놈 참! 이 어른이 구담(口談) 하나는 신경(神境)에 들었는데, 이놈한테는 안 먹히는구나.’
노인은 악불군의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말했다.
“무공은 상당히 높던데, 너 같은 식으로 싸우면 곧 비명횡사한다.”
“무슨 뜻입니까?”
“혈수련 놈들은 너한테 한참 모자라니까 순식간에 당했지만, 고수들은 네 공격에 방어가 없다는 것을 금방 알아챌 게다. 아무리 상대가 약해도, 방어 없는 공격일변도는 언제든지 한칼 맞을 수 있다는 말이지.”
노인의 말에 악불군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그가 철포삼을 믿고 방어를 무시한 채 공격일변도로 나간 것은, 그만큼 상대를 빠르게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의 움직임을 확실하게 파악한다는 사실은, 상대가 담무룡만큼은 아닐지라도 거의 맞먹는 고수임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조언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악불군은 어찌 됐든 노인의 말이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을 하고는 인사는 했다.
“그럼, 이제 우리 좀 친해진 거냐?”
“가까이 오지만 마십시오.”
“악양은 가 본 적이 있느냐?”
“처음입니다.”
“처음? 그럼 지금 악양이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가는 거냐?”
“일이 있어 가는데 굳이 주변 상황까지 알고 가야 하는 겁니까?”
“너, 강호 초출이지?”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네가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 해도, 저렇게 예쁜 여자를 혼자 보호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으냐?”
“……어르신께서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내가 교육을 좀 시켜 주어야겠다. 지금 악양 상황이 어떠냐 하면…….”
노인은 그대로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더니, 묻지도 않은 천하 정세에 대해 풀어 놓기 시작했다.
“원래, 호남은 철룡세가의 세력이었다. 너, 철룡세가는 알지?”
“압니다.”
“그놈들이 아주 못된 놈들이거든. 원나라 칸의 직계 자손이 세운 문파인데 고수가 엄청 많아. 호북과 하남, 하북까지 다 그놈들 세력이야. 각설하고, 지금 가장 강력한 반군이 강서와 안휘, 호북 그리고 호남 북부에 자리를 잡으면서, 결국 철룡세가가 호남을 포기하고 북으로 물러섰단 말이다. 그럼 호남은 어떻게 됐겠냐?”
“절대자가 사라졌으니 무주공산이 됐겠군요.”
“그래, 완전 아사리판(阿闍梨判)이다. 예쁜 여자만 나타나면 낮이고 밤이고 상관없이 달려드는 놈투성이고, 철룡세가에 빌붙어 온갖 패악질을 다 하던 놈들이 서로 악양을 차지하겠다고 사방에서 싸움질이지. 거기다 악양의 치안을 담당해야 할 장사성의 군사들조차 제대로 지휘 체계가 안 되어 있어서 오히려 온갖 약탈을 자행하니, 완전 무법지대가 되어 버렸다.”
“그럼 철룡세가가 지배할 때가 더 좋았다는 말이 나오겠군요.”
“원나라 놈들이 남송 지역을 탄압을 했기 때문에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백성들의 고통이 대단히 크긴 하지.”
“이런 얘기를 제게 해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중원 무림을 지탱해 주던 구파와 오대세가는 지금 모두 몰락해서 지하로 숨었지만, 일방만은 아직 지상에서 활동을 하고 있네.”
“일방이요?”
“그래, 천하제일방 개방이 아직 죽지 않았거든.”
“어르신은 개방의 소속이십니까?”
“난 남개방의 사해신개라고 한다.”
“그렇습니까?”
사해신개는 악불군의 시큰둥한 대답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주시했다.
개방은 원나라의 침공으로 말미암아 두 개로 나뉜 상태였다. 하남의 개봉에 있던 총단이 원군에 의해 함락이 되면서 지휘부가 원나라에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그러자 남쪽에 있던 개방의 제자들은 총단의 결정에 반발해 중원의 정신을 지킨다며 새로운 개방을 만들었다.
이후 원나라에 굴복한 북개방은 궁가방으로 이름을 바꿨고, 총단의 결정에 반대한 남쪽 개방은 개방의 적통을 잇는다며 스스로를 남개방이라고 칭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개방의 핵심 지도자 중 한 명이 바로 사해신개였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직접적인 활동은 줄였지만 여전히 신출귀몰하며 원나라를 괴롭히고 있었다.
어느 정도냐면, 어찰단과 오룡세가의 살생부 첫 장에 적혀 있는 인물이 바로 그였다.
“너 솔직히 말해 봐라.”
“뭘 말입니까?”
“내가 누군지 모르지?”
“제가 알아야 합니까?”
“이제 보니 너, 강호만 초짜인 게 아니라 무림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구나?”
“모르는 것이 아니라 신경을 쓰지 않은 것입니다.”
“그게 그거지! 내가 얼마나 거물인데. 어찰단 놈들이나 오룡세가에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만 알려 줘도 금자 천 냥은 줄 게다.”
“지금 저 보고 금자 천 냥을 벌라는 말은 아니시겠지요?”
“진짜 재미있는 놈이네. 그 정도면 믿을 만하겠다.”
사해신개는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리더니 품에서 조그만 죽패를 꺼내 건넸다.
“이걸 받아라.”
“이게 뭡니까?”
“남개방의 신패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장강 이남의 거지들에게는 제법 권위가 있다. 혹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내 도움이 필요하면 거지에게 보이고 노부의 명호를 말하거라. 아마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게다.”
“전 이유 없는 호의는 받지 않습니다.”
“호북사걸의 진재기가 부탁을 한 거다. 무림에 신성이 나타났으니 노부에게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하더구나. 솔직히 크게 기대는 안 했는데, 지금은 잘 왔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진 대협께서 말입니까?”
“그래! 그럼 나 간다.”
사해신개는 악불군에게 죽패를 던지는가 싶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어르신!”
괜찮다고 말하기도 전에, 이미 죽패는 악불군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오룡세가에서 현상금 금자 천 냥이나 걸었다면 가주님께도 적일 수 있다는 말인데, 이걸 가지고 다녀도 될까?’
하지만 악불군은 사해신개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에 죽패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사용하기 위해서 챙기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만나면 돌려주기 위해서였다.
* * *
“악양을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장사근의 말에, 장사성은 잠시 생각하더니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을 보며 물었다.
“제갈 군사의 생각은 어때?”
장사성의 군사를 맡고 있는 제갈신우는 무림 오대세가 중 하나인 제갈세가의 후손으로, 장사성이 처음 군사를 일으킬 때부터 그를 도운 인물이었다.
“악양에서 들어오는 돈이 지금 왕야의 가장 큰 자금줄입니다. 악양을 너무 강압적으로 통제하면 치안은 좋아지겠지만 상인들이 악양을 피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태는 도가 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갈신우의 말에 장사근이 발끈한 얼굴로 나서려고 하자, 장사성이 손을 내밀어 막았다.
“장 장군은 잠시 기다려. 우선 제갈 군사의 말을 다 듣고 나서라.”
장사근은 장사성의 친아우였다.
“예!”
장사근이 고개를 숙이자 제갈신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악양에 주둔한 군사들의 약탈행위가 도를 넘어 원성이 자자한데, 군사를 더 동원해서 치안을 잡았다가는 민심이 이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양 대주를 악양에 보내, 대장군을 은밀하게 돕는 무림 세력을 만들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장사성을 호위하는 장호대는 무림인들로 이루어진 집단으로, 어찰단이나 어사대의 장사성에 대한 암살을 막고 있었다. 그 대주가 바로 광풍비룡창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양지운이었다.
그는 남송의 명문이었던 양가장의 후손으로 무림에서 손가락에 꼽는 창술의 대가였다.
“제갈 군사, 장호대를 악양에 투입하면 왕야의 호위는 누가 한단 말이오!”
장사근이 어불성설이라는 듯 반박했다.
“지금 악양의 문제는 철룡세가에 붙어 원나라에 부역하던 매국 무림 세력이 악양을 자신들의 세력으로 만들기 위해 벌이는 전쟁입니다. 그들이 세력을 공고히 한다면 또다시 원나라와 야합을 하며 왕야를 힘들게 할 것입니다. 그들을 이번 기회에 뿌리 뽑기 위해서는 무림 세력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입니다. 그리고 왕야의 호위는 걱정 마십시오. 장호대의 반 정도만 빠질 것이고, 그 공백 역시 다 메울 복안이 제게 있으니까요.”
제갈신우의 말에 장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제갈 군사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대책을 마련해 놨군. 좋다. 허락할 테니 그대로 행해라.”
“왕야.”
장사근이 급히 장사성을 향해 소리쳤다.
“장 장군.”
“예.”
“그럼 네 계획이 뭐냐? 악양으로 군사를 몰고 가 무작정 다 죽이려고?”
장사근은 자신의 친아우라는 친분 여부를 떠나,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으며 장사성이 가장 믿는 용장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호전성이었다. 처음 반란을 시작할 때는 좋았지만, 스스로 왕으로 칭하고 있는 지금은 문제가 있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럼 군사들이나 잘 정비하고 있어. 지금 유복통의 군세가 점점 커지고 있어. 장 장군은 진우량과 유복통을 어떻게 상대할지만 생각해라.”
장사성의 말에 장사근은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 * *
악양으로 가기 전, 배는 무한에 도착했다. 장강을 오가는 모든 물류가 모이고 퍼지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군사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원나라의 의지도 대단해서, 장사성이나 진우량조차 아직 무한만은 점령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한을 지키는 원나라 군대가 이미 고립이 된 상황이라,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악 무사님!”
배가 무한에 도착하자 선상에 올랐던 추국이 다급한 표정으로 급히 달려왔다.
악불군은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태연하게 손가락을 입에 댈 뿐이었다.
“아가씨께서 지금 주무신다. 조용히 해라.”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담수련이었으니까.